[66화]
1년 후.
명원고 3학년 2반.
교실이 시끄러웠다. 지난주에 봤던 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모탱, 너 성적표 잘못 받은 거 아니야? 니가 평균 82.3이라고? 니가? 왜?”
“왜긴 왜야. 내가 열심히 했으니까 당연한 결과지.”
태영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성적표를 품에 꼭 안고 행복해했다.
“아싸. 모태혁한테 뭐 뜯어낼까? 노트북? 핸드폰 바꿔 달랠까?”
“야, 나도 너희 오빠한테 과외받을래.”
“완전 비추한다.”
“왜? 너 혹시 막 오빠한테 맞으면서 배운 건 아니지?”
“왜 아니야? 나 많이 맞았어. 그 인간 아주 말로 사람 때리는데, 아오!”
그동안 오빠에게 말로 맞은 걸 생각하면 태영은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성적표를 보니 미웠던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 인간 솔직히 잘 가르치는 건 인정. 어떻게 찍어 준 거에서 시험 문제가 다 나오냐? 괴물 같은 놈!
“근데 오늘같이 기쁜 날 이런 말 해도 될라나…….”
뭔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해니가 작게 속삭였다.
“얼마 전에 수아한테 메일이 한 통 왔는데…….”
“유일반한테 왔지?”
“어? 너 어떻게 알았어?”
“나도 받았으니까.”
“헐…… 수아한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대. 그리고 지금은 미국에 있는데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대. 와서 우리들한테 정식으로 사과할 거래. 작년에 기억 상실증이라고 거짓말하고 인사도 없이 떠난 거 말이야. 근데 너한텐 뭐래?”
태영은 이틀 전 받은 메일 한 통을 떠올렸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태영이 말이 없자 해니가 흘끔 눈치를 봤다.
“뭐 안 좋은 얘기 들은 건 아니지?”
해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태영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뭐라고 왔는데?”
“작년에 내가 유일반한테 사귀자고 했을 때 바로 알았다고 한 이유를 얘기해 주더라고.”
해니가 잔뜩 궁금한 얼굴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대박. 그 이유가 뭔지 우리 완전 궁금했었잖아. 뭐래? 우리 예상이 맞았어? 질투심 유발 작전?”
“아니.”
“그럼 뭐야? 설마 유일반도 널?”
“그건 더 아님.”
“에잇. 그럼 뭔데?”
“수아를 보호하고 싶었대. 그래서 나랑 사귀기로 한 거였대. 오필희가 스토커 짓 하고 자기 괴롭힌 것처럼 수아한테도 못살게 굴까 봐.”
“뭐?”
“그래서 일부러 날 좋아하는 척 오필희를 속이려고 한 거였대. 그래서 나한테 우리 둘이 사귀는 거 소문나도 그냥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한 거였고.”
“하긴, 수아 걘 누가 지 물건 다 훔쳐 가도 우리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속앓이만 했잖아. 모탱 니 물건 훔쳤어 봐, 물건 없어지자마자 학교 다 뒤지고 다녔지. 유일반이 사람 잘 봤네. 큭큭. 작년 체육 대회 때 기억나? 오필희 그년 너한테 박으로 겁나 처맞은 거. 푸하하.”
“재밌냐?”
“그것도 화제의 영상에 떴었잖아. 이 화제 동영상 제조기 같으니!”
태영이 박을 발로 차서 날리는 영상을 또 재생시킨 해니가 배를 잡고 웃었다. 태영이 씁쓸한 얼굴로 깔깔대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해니를 째려봤다.
“내가 그거 지우랬지?”
“안 돼. 이거 내 웃음 버튼이라고. 암튼 그래서 유일반이 또 뭐래?”
“뭐라긴 뭐래. 사귄다고 한 건 진심 아니었다고 미안하다고 그러지 뭐.”
“그리고? 그게 끝? 동생 얘긴 안 해?”
“잘 지내고 있대.”
“진짜? 근데 왜 연락 한 통 없는 거야? 안 물어봤어?”
“뭘 물어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연락을 안 하는 거겠지.”
“너 솔직히 말해 봐. 무서워서 못 물어보는 거지? 소문처럼 잘못됐다는 대답 들을까 봐?”
“아니야. 됐어. 잘 지낸다잖아. 그럼 된 거지 뭐. 아, 나 동아리방 가 봐야 돼.”
“갑자기?”
“응. 지금 신입 부원 뽑는 중이라 서류 받아야 돼서 자리 지켜야 돼. 나 갔다 올게.”
태영이 괜히 바쁜 척 핸드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해니가 곧장 누군가에게 은밀히 전화를 걸었다.
“모탱 전혀 눈치 못 챔. 지금 옥상 갔으니까 그쪽으로 보내.”
통화를 마친 해니가 짓궂게 웃으며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 * *
한편, 교무실에서 전학 수속을 밟고 있는 남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 뒷모습만 봐도 잘생겼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교무실 복도 창문에 다닥다닥 붙은 여학생들은 남학생의 얼굴을 확인하곤 감탄사를 연발했다.
“X나 잘생겼어!”
꽤나 소란스러운 그 뒤를 지나가며 태영은 귀를 틀어막았다.
“왜들 저래?”
태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교무실을 지나 학교 게시판 앞에 멈춰 섰다. 학교 홍보 동아리 회장 자격으로 부원 모집 안내문을 붙이기 위함이었다.
“1학년 전학생 얼굴 봤음? 미쳤음.”
“몇 반일까?”
“이름이 뭐래?”
안내문이 삐뚤게 붙진 않았는지 확인하던 태영의 뒤로 1학년 후배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갔다. 태영은 이제야 교무실 앞에 여학생들이 잔뜩 몰린 이유를 알아차리곤 피식 웃었다.
“좋을 때다.”
태영이 웃으며 또 다른 게시판에도 모집 안내문을 붙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태영이 코너를 돌아 복도에서 사라지자마자 한 남학생이 게시판 앞에 섰다.
슈퍼 블룸에서 부원을 새로 모집합니다!
슈퍼 블룸이라는 동아리 이름이 크게 매직으로 적힌 것을 가만히 응시하던 남학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남학생은 태영이 애써 붙인 모집 공고문을 확 떼어 버렸다.
* * *
“덥다. 이제 진짜 여름인가 보네.”
옥상 난간에 기댄 채 하복을 펄럭이며 땀을 식히던 태영은 옥상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벚꽃은 다 떨어지고 나무들이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맘때가 되니 더 그리워진다.
태영은 녀석과 함께했던 지난 여름날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같이 갔던 떡볶이 가게, 오락실, 사진관, 공원, 로봇 박물관, 꼭대기 바비큐…….
태영은 목에 건 소화기 펜던트를 습관처럼 매만졌다. 그러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 성인 되면 하고 싶은 거 하나 더 추가됐다?”
이제는 자연스러운 혼잣말.
“꽃이 핀 사막을 보러 갈 거야. 왠지 그곳에 가면 니가 있을 것 같거든. 기다려. 내가 곧 갈 테니까.”
여전히 대답 없는 너. 태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쏴아―
그런데 그때였다. 소리 소문도 없이 쨍한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여우비였다.
갑자기 내린 비에 당황한 태영이 손으로 머리 위를 가리며 후다닥 옥상을 나가려는데.
쾅.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교복 입은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남학생이 나오자마자 우산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
남학생이 펼친 투명한 우산에 핀 꽃을 마주한 태영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처벅. 처벅.
발걸음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다가온 남학생이 태영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 줬다.
“사막까지 갈 필요 없어.”
“…….”
“내가 왔으니까.”
태영이 고개를 들어 남학생을 바라봤다. 녀석이 미소를 지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영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녀석의 명찰을 확인했다.
유이반.
“너…….”
“안녕? 모태영. 아니, 이제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되나?”
“진짜야? 너 진짜 유이반이야?”
“글쎄. 맞혀 봐. 혹시 모르잖아. 유일반이 유이반인 척하고 있는 걸지도.”
“?”
갑자기 혼란스러워진 태영이 잽싸게 녀석의 왼쪽 손목을 잡아끌더니 확인했다.
흉터가…….
“있네. 있잖아! 너 진짜 혼날래? 지금 농담이 나와?”
“여전하네. 여전히 씩씩해.”
“야! 너 내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형한테 못 들었어? 내 안부 좀 너한테 전해 달라고 했는데.”
“거짓말인 줄 알았지. 넌 이미 세상에 없는데 나 슬플까 봐 잘 지낸다고 거짓말하는 줄 알았단 말야…….”
“살아 있는 사람을 막 죽여 버리네? 너 기자 되려는 애가 허위 사실…….”
태영은 저도 모르게 녀석을 와락 안아 버렸다. 그리고 그 넓은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이렇게 안고 있으니 더욱더 실감이 난다. 녀석이 돌아왔다는 게.
“왜 우냐? 너 웃는 거 보려고 죽을힘을 다해 왔는데.”
녀석은 한쪽 손엔 우산을 들고 한쪽 손으론 흐느껴 우는 태영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두 사람은 꽃비가 내리는 우산 밑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그렇게 여름과 함께 첫사랑이 다시 돌아왔다.
“좋아해!”
태영이 고개를 들어 이반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 말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있고 그럴싸하게 할 수 있을지 그런 쓸데없는 고민만 하다가 말 못 하고 널 놓쳤어. 너무 어리석었어. 좋아한다, 이 한마디면 되는데.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 없었는데. 그 말을 못 하고 널 보낸 게 내내 후회됐어.”
“말 안 해도 다 알아. 알고 있어.”
이반이 피식 웃으며 아까 게시판에서 떼어 온 동아리 부원 모집 공고문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 줬다.
“내가 한 말로 동아리 이름까지 지었는데 모를 수가 있나.”
태영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근데 왜 이제야 왔어? 그동안 많이 아팠던 거야? 그래서 연락 못 했던 거지?”
녀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태영은 알 수 있었다. 녀석에게 말 못 할 그간의 사정이 있었음을.
“누가 그러더라. 내가 사는 건 형벌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그래서 하루하루 버텼어. 지금 이 고통은 널 만나기 위한 행복한 기다림이라고.”
이반이 태영의 손을 잡고 제 심장에 가져다 댔다.
“덕분에 내 심장 다시 뛰게 됐어. 어때? 잘 뛰지?”
쿵쾅쿵쾅. 힘차게 뛰는 녀석의 심장 박동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근데 지금 너무 빨리 뛰는 거 같은데…….”
제 손을 잡은 녀석의 손이 뜨거웠다. 태영은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녀석의 눈을 바라봤다. 그 순간 비는 멈췄고, 물웅덩이에 고인 빗물이 햇빛에 비쳐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툭.
태영의 말간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녀석이 우산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태영의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읍.”
두 사람 사이엔 사막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뭔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멈추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세게 맞붙은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사막에 꽃이 피는 현상을 슈퍼 블룸이라고 한다.
앞으로 우리에게 또 어떤 사막이 찾아올지라도 두렵지 않다.
우린 무수히 많은 꽃을 피워 낼 무한한 힘을 가진 청춘, 고작 열아홉이니까.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