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뭐라고? 꺼져? 너 지금 나더러 꺼지라고 했…… 어? 너 거기 왜 다쳤어?”
화를 내려던 태영이 녀석의 왼쪽 뺨에 생긴 상처를 발견하곤 걱정스레 물었다. 녀석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려 태영에게 상처를 감춘 채 말했다.
“알 거 없잖아. 가.”
“너 또 아버지한테 맞았어? 그래서 이렇게 저기압인 거구나?”
“그런 거 아니야. 그니까 제발 좀 가.”
“왜 자꾸 가래! 나 할 말 있어서 온 거거든?”
“그럼 할 말 하고 가.”
녀석이 지칠 대로 지친 얼굴로 말했다. 태영은 너무 서운했지만 지금 녀석과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화를 겨우 눌러 참고 말을 이었다.
“범인 찾았어. 로봇 망가뜨리고 부품 훔쳐 간 게 누군지…….”
“안 궁금해.”
“어?”
“부품 따위 이제 필요 없어. 그거 없어도 된다고.”
“언젠 꼭 있어야 된다며.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그거 필요하다며. 내가 범인 찾았으니까 부품도 꼭 가져다줄게!”
“아니. 가져오지 마.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까 넌 아무것도 하지 마. 이제 내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기자단 면접 준비나 잘하라고.”
“…….”
저를 성가셔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녀석을 마주한 태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건 진심이다. 진심으로 내가 너무 짜증 나고 싫고 귀찮은 얼굴이다.
“야, 유이반! 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난 너 생각해서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래, 미안하다. 귀찮게 굴어서!”
태영이 결국 화를 못 참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이건 어차피 너 주려고 산 거니까 그냥 가져! 갖기 싫음 버리든지 말든지!”
태영이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을 향해 던지고 가 버렸다.
그렇게 바닥에 내팽개쳐진 우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 * *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녀석 때문에 잔뜩 열받은 태영이 아이스초코라떼를 원샷 했다. 그 모습을 맞은편에 앉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커플템 파란 모자를 쓴 주유권과 해니였다.
“살면서 라떼 원샷 하는 사람은 첨 봄.”
“나두.”
“근데 모탱, 우린 이제 가도 되지?”
“안 돼!”
해니가 주유권을 데리고 일어나려고 하자 태영이 두 사람을 붙잡았다. 어쩔 수 없이 해니가 도로 앉으며 한숨을 픽 내쉬었다.
“아, 왜? 그나저나 넌 면접 준비 안 해? 내일 체육 대회 끝나고 바로 다음 날이 면접이잖아.”
“아오, 그 녀석도 그렇고 다들 나한테 왜 이러냐구우. 면접 준비는 내가 진짜 다 알아서 하고 있거든?”
“그럼 계속 알아서 하시고요. 친구님, 우린 이만 가도 될까요? 영화 예매 시간 다 돼서요.”
“잠깐, 이건 알아서 못 하겠어. 나 이제 어떡해? 주유권 니가 말해 봐. 니가 같은 남자로서 얘기 좀 해 보라고.”
“뭘?”
주유권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해니가 태영의 말을 대신 번역해 줬다.
“유이반이 아까 귀찮다고 꺼지라고 했는데 이거 차인 거냐고 묻는 거야.”
“백퍼 차인 거지.”
주유권이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태영이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뭐 얼마나 귀찮게 했다고 차인 건데? 아니지. 나 걔 좋아한다고 한 적 없어. 그럼 차인 거 아니지 않아? 맞아. 그러네. 나 고백 안 했어.”
“네. 이상, 정신 승리 중인 모태영 잘 봤구요.”
태영이 저를 놀리듯 말하는 해니를 째려봤다. 그러자 해니가 이내 짓궂은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유이반 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한테 좋아한다고 했다며.”
“응. 근데 그 뒤론 나더러 자길 좋아하지 말랬어.”
“왜?”
“떠날 사람이래. 여행 갈 거래. 멀리…….”
“답 나왔네.”
“무슨 답?”
“정 떼려는 거지 뭐.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잖아. 연인들이 흔히 하는 그런 거.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뭐 그런 거.”
“아니, 왜 헤어져? 난 기다릴 수 있어. 걔 여행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그럼 그걸 유이반한테 말해. 기다린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하면 어떡해?”
“그게 뭐 마음대로 되나. 암튼 모탱, 정신 차려. 그나저나 너 아까 무슨 오필희 얘기 한다고 우리 부른 거 아니었어?”
“아! 맞다. 내가 왜 그걸 까먹고 있었지?”
태영이 이 커플을 소환한 건 연애 상담 때문이 아니었다. 수아는 영어 대회 준비로 바쁘니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대신 두 사람에게 따로 부탁할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인데?”
“오필희가 범인이었어. 근데 부품 훔쳐 가 놓고 안 준대. 유일반한테 지가 직접 주겠대. 게다가 지금까지 수아 물건도 걔가 다 훔친 거였더라고. 니 말대로 수아 열쇠고리도 걔가 가져간 것 같아.”
“소름.”
“더 소름인 건 오필희가 우리 학교 SNS 계정 관리자였어.”
“썅! 그년 미친 거 아니야? 야, 유권아 당장 영화 예매 취소해.”
역시 의리의 최해니. 해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랑꾼 주유권은 바로 핸드폰으로 영화 예매를 취소했다.
“계속 얘기해 봐.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도로 뺏어 와야지!”
“그니까 어떻게?”
“내가 오필희가 범행 사실 실토하게 만들 테니까 너흰 숨어서 녹음해.”
“오, 대박.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있어.”
그 녀석한테 배웠다. 태영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해니와 주유권 앞에서 으스댔다.
“너희 녹음기는 있지?”
“핸드폰으로 하면 되지. 아예 빼도 박도 못하게 동영상 촬영 할까?”
“그럼 더 좋지.”
“근데 너 실토하게 만들 수는 있어? 오필희 걔 재수 없게도 말 더럽게 잘하잖아. 논리정연하게. 그 논리 이길 수 있어?”
“내 꿈이 기자거든?”
“벌써 논리가 없네.”
“야, 최니!”
“알았어. 암튼 내일 잘해. 무조건 증거 잡아서 오필희 박살 내자!”
오필희가 무슨 짓을 해서 밉기보다 원래 싫어했는데 잘 걸렸다는 듯 해니가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태영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녀석은 제게 아무것도 하지 말랬지만 할 거다.
어떻게든 증거도 잡고 부품도 되찾아 올 거야!
* * *
“모태영!”
“태영아!”
“2반 모태영!”
― 2학년 2반 모태영은 지금 즉시 강당으로. 2학년 2반 모태영…….
이 소리는 운동장 여기저기서 육성으로 그리고 마이크로 태영을 찾는 소리였다.
태영은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우씨.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오필희 그년 잡아야 하는데!
“으아아악!”
태영이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렸다. 문제는 지금 태영은 강당에서 2인 3각 달리기 중이라는 거였다.
“사, 살려 줘으아악!”
태영과 파트너인 주유권이 괴성을 지르며 태영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미친 속도를 보이며 압도적인 우승을 거두었다.
“꺅!”
이과 아이들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주유권은 기진맥진했다. 그렇게 달리고도 아직 기운이 남아도는지 태영이 발에 묶인 끈을 풀고 다음 박 터뜨리기 준비를 위해 운동장으로 나가려던 그때.
“모탱!”
해니가 태영을 데리고 강당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은밀히 말했다.
“오필희 그년 지금 응원석에서 아주 우아하게 책 읽고 있던데 어떻게 할까? 언제 불러낼 거야? 너 왜 이렇게 바빠?”
“으, 몰라. 지금 죽을 것 같아. 대체 체육 대회는 언제 끝나는 거야? 나 몇 종목 남았지?”
“너 짝피구랑 발야구는 아직 시작도 안 한 거 알고 있음?”
“망할.”
“그러게 땜빵을 몇 개나 들어간 거야.”
“근데 지금 유이반은 어딨어?”
“당연히 동아리방에 있겠지.”
“점심시간에도 나 바쁠 수 있으니까 걔 꼭 급식실로 데려가서 밥 먹여. 알았지?”
“걔가 무슨 애냐?”
“애지. 걔 안 챙겨 주면 밥 안 먹어.”
“아주 엄마네 엄마.”
“부탁한다. 그럼 난 박 터뜨리러 운동장 간다…….”
태영이 운동장으로 나가려던 그때였다.
“마이크 테스트. 아아.”
갑자기 단상 앞에 나타난 사회자가 마이크를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요란한 복장을 보니 레크리에이션 강사인 듯했다.
“자, 지금부터 미니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강사의 말에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달려와 단상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게임은 간단히 하늘 위 가위바위보부터 시작했다. 오필희는 언제 참교육 시전할 거냐고 묻던 해니도 주유권을 데리고 상품권 준다는 사회자의 말에 게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어어? 저게 뭐야?”
“저거 유일반 아니야?”
“대박. 저게 무슨 영상이야?”
신나게 게임을 즐기던 아이들이 갑자기 웅성웅성하며 단상 뒤에서 내려오는 롤스크린을 바라봤다.
롤스크린에 쏘아 올린 영상의 주인공은 유일반…… 아니, 그 녀석 유이반이었다.
장소는 동아리방이었고, 주인공은 유이반 혼자가 아니었다.
“유일반이랑 같이 있는 거 오필희 아님?”
그 순간 스피커 볼륨이 확 높아지며 영상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운동장으로 나가려던 태영은 걸음을 멈추고 영상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