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61화 (62/67)
  • [61화]

    “이거 다 먹으면 나랑 사귀는 거다!”

    태영은 품에 안고 있던 구운 달걀 한 판을 대뜸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하지만 정작 태영의 앞엔 아무도 없었다.

    “너무 많이 샀나? 그 녀석 이거 다 못 먹을 텐데.”

    고백 시뮬레이션을 해 보던 태영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날 유일반에게 충동적으로 사귀자고 고백한 것과는 달랐으면 좋겠는데. 녀석에겐 정말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다.

    널 좋아한다고.

    태영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비상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옥상으로 나갔다. 하지만 무슨 일에선지 동아리방 문이 잠겨 있었다. 요새 맨날 아침 일찍 등교하던 녀석이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늦잠 잤나?”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녀석이 언제 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영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갔다. 자꾸만 좋아한다는 말이 재채기처럼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침착하려고 애썼다.

    “안녕?”

    이게 아닌데. 어색해. 떨려!

    태영은 안면 근육이 제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막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도 같고. 아, 역시 다르구나. 고백은 쉬운 게 아니야. 어려운 거였다. 이로써 명확해진다. 저번에 유일반에게 했던 건 고백이 아니었어. 지금이 찐이다.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이거 먹어!”

    자꾸만 목소리 볼륨도 조절이 안 된다.

    태영은 옥상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달걀 한 판을 내밀며 외쳤다. 그러자 이반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너 무슨 일 있냐?”

    “아니!”

    “조용히 말해도 다 들려.”

    “아…… 응. 그, 그게……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녀석의 얼굴은 쳐다도 못 보겠고, 땅바닥만 보며 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얼굴과 귀가 뜨거워지고 등 뒤에선 식은땀이 폭발하는 게 느껴졌다.

    “조, 좋…… 나 널 좋…….”

    “너 면접 언제야?”

    “어?”

    마침내 좋아한다고 말하려던 그때, 녀석이 갑자기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면접 준비 안 하냐? 이러고 놀 시간 있어? 자신 있나 봐?”

    녀석이 날카로운 얼굴로 쏘아붙이자 태영은 당황스러웠다. 바위나 수아에게라면 모를까 녀석은 제게 한 번도 이런 무서운 표정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이반,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없어.”

    아니야. 있는 게 분명해. 이 녀석 무슨 일 있어. 태영은 그게 뭘까 곰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부품 훔쳐 간 애 꼭 찾아서…….”

    “됐어. 그만해.”

    “…….”

    “이제부터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니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할 얘기 끝났으면 가.”

    녀석이 냉정하게 말하곤 그대로 동아리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 저래?”

    태영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꽉 닫힌 동아리방 문만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녀석에게 향하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1교시 시작종이 태영의 발목을 잡았다.

    * * *

    체육 대회 연습이 한창인 운동장.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던 태영의 옆으로 해니와 수아가 다가왔다. 수아가 태영에게 차가운 생수를 내밀었다.

    “태영아, 쉬엄쉬엄해.”

    “그래. 모탱 너 그러다 쓰러지겠어. 무슨 전국 체전 나가냐?”

    발야구, 짝피구, 줄다리기, 장애물 달리기, 닭싸움, 계주 등 온갖 종목의 땜빵을 채우느라 태영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린 태영은 기진맥진한 채로 발라당 흙바닥에 누워 버렸다. 그런 태영을 해니가 안타깝게 쳐다보며 혀를 내찼다.

    “그러게 왜 교장한테 쓸데없는 소릴 해?”

    “무슨 소리?”

    수아가 궁금해하자 태영이 대답했다.

    “내가 유일반 대신 체육 대회 주장 한다고 했거든. 아니, 그게 언제냐면…… 사고가 있던 다음 날이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녀석도 참 허술해. 속일 거면 교실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외우고 왔어야지. 그냥 아무 대책도 없이 왔다가 교장 쌤이랑 딱 마주쳤잖아.”

    태영은 그날 교장한테 인사도 안 하고 멀뚱히 서 있던 녀석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녀석도 그때 참 난감했을 거야.

    “맞다. 태영아, 고백은 했어?”

    뒤늦게 수아의 목소리를 들은 태영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그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말도 못 꺼냄. 나보고 기자단 면접 준비나 잘하래.”

    차갑다 못해 날 냉동 인간으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말하던 녀석이 떠오른 태영은 시무룩해졌다. 해니가 키득거렸다.

    “맞는 말 했네. 모탱 너 면접 얼마 안 남았잖아. 그래도 유이반 걔가 너 되게 생각해 주나 보다.”

    “아니, 그럼 말 좀 예쁘게 하면 안 돼? 하여튼 걘 진짜 너무 싸가지 없어.”

    “그래서 싫어?”

    “아니 뭐 싫다기보단…… 그게 또 매력이긴 하지.”

    태영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 태영을 못 살겠다는 얼굴로 해니와 수아가 쳐다봤다. 그러다 태영이 아차 싶었는지 수아에게 물었다.

    “수아 넌 어떻게 하기로 했어? 기자단 면접 갈 거야?”

    “아니. 사실 나 그날 영어 스피킹 대회 있어. 그래서 기자단 면접 못 간다고 했어. 스피킹 대회는 전국 대회거든.”

    “헐. 전국 대회라니…… 역시 클라스가 다르군. 준비는 많이 했어?”

    “주말에 미림 언니가 도와주기로 했는데…….”

    “뭐? 너 아직도 그 언니 얘기 부모님한테 안 했어?”

    “응. 아직…….”

    “왜?”

    “난 사실 미림 언니가 좀 불쌍하거든.”

    수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듣던 해니가 발작하듯 날뛰었다.

    “권쑤! 미쳤어? 그년은 널 학대한 사람이야! 불쌍하긴 개뿔!”

    “부모님한테 말하면 일이 커져. 고소네 뭐네. 그 언니 인생 나락으로 갈 게 뻔하다고.”

    해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아를 쳐다봤지만, 태영은 아니었다.

    저도 몇 년 전에 똑같은 고민을 했었고, 저를 폭행한 선배들이 대회 출전도 못 하고 선수 생활 끝날까 봐 그게 걱정돼서 폭행 사실을 숨기고 질질 끌었으니까.

    “근데 수아야, 경험자로서 한마디만 할게.”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영이 진지하게 조언했다.

    “그거 핑계야.”

    “…….”

    “불쌍해서가 아니라 넌 아직도 그 언니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그게 폭력에 길들어진 결과고, 넌 그 언니한테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 거야. 라고 내가 아는 기자님이 그랬어. 그니까 상황을 똑바로 보라고. 그 언닌 벌받아야 되는 사람이고, 그 벌은 너 때문에 받는 게 아니라 본인이 자초한 일이야.”

    “태영아…… 나 방금 너한테 반했어.”

    “뭐래.”

    태영이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자 해니가 태영의 목에 헤드록을 걸었다.

    “우리 모탱 많이 컸는데?”

    “나 원래 너보다 컸거든?”

    태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티격태격하는 해니와 태영을 바라보던 수아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나 오늘은 꼭 가서 부모님한테 다 말할 거야. 경험자 말 들어야지.”

    “당연하지! 나만 믿어. 그 언니 너한테 해코지하면 당장 전화해! 우씨. 우리 수아 때릴 데가 어딨다고. 그 언니 진짜 이 발로 확!”

    태영이 갑자기 일어나 발차기를 선보였다. 그 모습을 귀엽게 쳐다보며 해니와 수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오늘은 그만 집에 갈까?”

    수아가 스터디 카페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해니와 태영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해니는 아예 책상 위에 철푸덕 엎드려 잠을 더 자려고 했고, 태영은 언제 졸았냐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책을 거꾸로 들었다.

    “그냥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나와.”

    수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엎드려 자던 해니와 책을 보던 태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짐을 챙겼다. 아주 개그 콤비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근처 분식집으로 향했다.

    “이거 다 먹고 너흰 이만 집에 가 봐.”

    “왜? 너 공부 다 끝나면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뭘 데려다줘. 나 괜찮다니까?”

    어제 하교하자마자 부모님께 폭행 사실을 털어놓은 수아가 태영은 걱정되었다.

    “갑자기 그 언니가 너 찾아오면 어떡해.”

    “접근 금지 신청해 놨고 부모님이 이미 이런 것도 줬어.”

    수아가 가방에서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꺼냈다. 태영이 신기해하며 충격기를 구경했다.

    “와. 나 이거 실제로 처음 봐. 눌러 봐도 돼?”

    “아니. 그거 누르면 바로 경찰 출동한대. 그렇게 설정해 놨다던데?”

    “헐. 무서워. 너희 부모님 대단하다. 근데 어제 말했더니 뭐래?”

    “왜 이제 말했냐고 속상해하셨지……만 그래도 의대는 가야 한다고 새로운 과외 선생님 붙이셨음.”

    “정말 대단하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며 태영이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해니가 받아쳤다.

    “진짜 대단한 건 모탱이지. 넌 면접 준비 안 하냐? 무슨 배짱이야. 잠이 와?”

    “하고 있거든? 나도 나름의 전략을 짜고 있다고.”

    “무슨 전략?”

    “일단 내 생각엔 면접 보기 전에 대기실에서 기사 작성을 시킬 것 같아.”

    “갑자기 기사 작성을 왜?”

    “왜냐면 원래 작년엔 직접 취재한 기사를 서류 접수 때 받았더라고. 근데 이번엔 안 받았잖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근데 그래서?”

    “왠지 면접 안 보고 기사만 작성하고 가라고 할 것 같아. 그래서 난 면접 준비 안 하고 기사 작성하는 것만 연습해 갈 거야.”

    “헐. 그건 너무 모험 아니야? 그러다 면접만 보면?”

    “아니야. 난 내 감을 믿겠어!”

    태영이 예리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떡볶이를 두세 개씩 푹푹 찍어 먹었다. 그런 태영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해니가 갑자기 두 눈을 반짝거렸다.

    “모탱, 너 꼭 합격해라.”

    “알았다니까.”

    “그리고 권쑤 너도 영어 대회 1등 하고.”

    “노력해 볼게. 하하. 근데 해니 넌 뭐 하고?”

    “난 우리의 더블, 아니 트리플 데이트 계획을 짜 보겠어.”

    “트리플?”

    태영과 수아가 해니를 바라봤다. 그러자 해니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나랑 유권이, 모탱이랑 유일반……이 아니라 그 쌍둥이 동생 유이반, 그리고 곧 돌아온다는 유일반이랑 우리 권쑤! 요렇게 트리플 데이트를 하는 거지.”

    “해니야, 난 거기서 빼 줘야 할 것 같은데.”

    “왜? 에이, 영어 대회 1등 못 해도 껴 줄게. 가자.”

    “그게 아니라…….”

    수아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유일반이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럼 누군데?”

    수아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태영을 가리켰다. 떡볶이를 먹던 태영이 빨간 국물을 입에 묻힌 채 고개를 갸웃했다.

    “유일반이 날 좋아한다고?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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