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 새끼 대체 뭐야?”
바위의 손엔 화장실에서 물을 묻혀 온 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동아리방 소파에 누워 잠든 이반을 내려다봤다.
“아오, 씨.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말은 험하게 해도 이반의 이마에 수건을 내려놓는 바위의 손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사실 바위는 오늘 이 녀석을 쥐어패려고 옥상에 올라온 거였다. 대체 무슨 속셈이기에 태영의 옆에 붙어 있는 건지 아주 혼쭐을 내 줄 작정으로 찾아왔건만, 이렇게 병간호를 하게 될 줄이야.
바위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야, 나 간다. 이제 니가 알아서 해.”
오늘은 뭐 이 녀석이 지금 대화할 상태도 아니고 그냥 포기하고 가려는데.
젠장. 발이 안 떨어진다.
아픈 사람을 그냥 두고 가는 게 영 찝찝했던 바위가 뒤로 홱 돌아 신음 소리를 흘리며 억지로 일어나려는 이반을 째려봤다.
“인마! 너 뭐냐? 그니까 병원 데려다준다고 할 때 가만히 있지 왜 괜찮다고 우겨?”
“가방에 내 약 좀…….”
“니가 꺼내.”
하면서 바위는 녀석이 가리킨 가방 안을 뒤적이더니 아예 책상 위에 내용물을 싹 다 쏟아 버렸다.
“미친. 무슨 약이 이렇게 많아?”
약이 대여섯 종류나 됐다. 바위는 당황해 하며 약을 쭉 보고 있었는데.
“파란색 뚜껑.”
“이거?”
“어. 그거랑 냉장고에 물 좀.”
“이 새끼 뭐야, 내가 무슨 니 시중이나 들려고 온 줄 알아?”
구시렁거리며 바위가 냉장고에서 생수 하나랑 파란색 뚜껑의 약통을 이반에게 내밀었다. 물과 함께 약을 먹는 이반을 물끄러미 보던 바위가 넌지시 물었다.
“너 어디 아프냐?”
약을 다 먹은 이반이 생수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알 거 없잖아.”
“싸가지 없는 새끼. 너 유일반 아닌 거 나 다 알고 있거든?”
“나도 알아. 니가 다 아는 거.”
“그럼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 내가 확 전교생한테 다 불어 버릴 수도 있는데.”
“너 그런 애 아니라던데?”
“누가?”
“누구긴 누구야. 모태영이지. 걔가 너 그런 애 아니라고 했는데…… 뭐, 지켜보면 알겠지.”
이반이 생각이 많은 얼굴로 바위를 빤히 쳐다보더니 대뜸 물었다.
“너 여기 왜 왔어? 혹시 니가 훔쳐 갔냐?”
“훔친 거 아니고 주운 거거든? 찾아 줘도 지랄이야.”
바위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이반이 찾던 센서가 아니라 지갑이었다.
“너 유일반 아니라고 광고하고 싶었나 봐? 외국인 등록증…… 하. 너 뭐 검은 머리 외국인 그런 거야?”
“나한테 궁금한 게 그런 거야?”
“아니.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지. 너 속셈이 뭐야? 왜 모태영한테 들러붙어서 사람 귀찮게 해?”
바위가 지갑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반이 피식 웃었다.
“모태영이 그래? 내가 귀찮대?”
“그런 건 아니지만…… 암튼 걔 어릴 적부터 운동만 하던 애야. 그거 포기하고 대학 가겠다고 인문계 온 건데, 지금 너랑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 없다고. 걔 대학 떨어지면 니가 걔 인생 책임질 거냐고.”
“모태영 원래 나 만나기 전부터 공부 못했던데. 내가 왜 책임을 져?”
“그, 그건 그렇지만…… 이 새끼 말 겁나 잘하네. 암튼 그럼 책임질 생각도 없으면서 왜 애 마음을 들쑤셔 놓냐?”
“반대지 아마? 모태영이 내 마음 들쑤셔 놨지. 난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근데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소릴 듣고 있는 거지? 니가 모태영 아버지라도 되냐?”
“…….”
그러게나 말이다. 난 모태영한테 뭐지? 이반의 물음에 바위는 한 대 맞은 듯,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사이 이반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충고 하나만 할게. 잘 들어.”
“?”
“고백하지 말고 그냥 친구로 지내. 너 어차피 까여.”
“뭐?”
“나도 까인 마당에 넌 백퍼 까이지.”
“너 까였어? 왜?”
“우리 형 돌아오면 제대로 사귀어 보고 둘 중 하나 고른단다. 모태영이. 이 말인즉, 넌 선택지에도 없다는 거야.”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짓는 바위의 어깨를 이반이 두드리며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고마웠다.”
병원에 안 가겠다는 저를 번쩍 들고 소파에 눕혀 간호해 준 바위에게 이반은 인사했다.
어쩌면 정말 태영이 말한 대로 좋은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반은 그동안 돌멩이라 부르며 녀석을 나쁜 새끼로 오해한 게 사뭇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앞으로 저보다 더 오래 태영의 옆에 있어 줄 사람은 송바위겠구나, 하는 생각에 좀 쓸쓸해졌다.
* * *
“오빠! 내 전화 왜 안 받아!”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온 태영은 태혁의 방으로 돌진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자 바지를 갈아입던 태혁이 화들짝 놀라며 고함을 질렀다.
“미친! 이 시끼 너 노크하고 다시 들어와!”
“아, 왜. 그냥 빨리 입어. 볼 것도 없구만.”
“이 망할 놈이!”
서둘러 바지를 잠그며 태혁이 혈압이 상승하는 표정으로 태영을 노려봤다.
“너 뭐야. 뭔데?”
“후배라고 했지?”
“넌 기자가 된다는 새끼가 언어 전달력이 왜 그 모양이냐? 그렇게 물으면 내가 너한테 또 ‘동생아, 어떤 후배를 말하는 거니?’라고 반문해야 되잖아. 그럼 이게 대화의 효율이…….”
“아오! 지난달 아버지 기일에 엄마랑 산소 갔다 와서 밥 먹으러 갔을 때 수아랑 오빠 후배 만났었잖아. 그 예쁘장하게 생긴 언니 있잖아. 단발머리. 과 수석으로 입학했다며.”
“강미림은 왜?”
“그 언니 이름이 강미림이야? 암튼 그 언니 아직도 수아 과외하나?”
“걔네 집 형편이 어려워서 아마 계속할걸? 요즘 시대에 입주 과외 자리 구하기가 좀 어려워?”
“입주 과외? 수아네 집에 같이 살면서 과외하는 거야? 그럼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겠네?”
“그렇다고 봐야지. 왜?”
“나 그 언니 번호 좀.”
“왜?”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너도 과외받고 싶냐? 너 이번 기말도 망했지?”
“나 시민 기자단 서류 심사 합격함! 다음 주 면접 봄!”
“말 돌리지 마라?”
“아우씨, 가르쳐 줄 거야 말 거야? 나한텐 되게 되게 중요한 일이란 말야!”
“맨입으론 안 되지. 편의점 가서 컵라면이나 좀 사 와 보든가.”
태영이 씩씩거리며 태혁을 노려보다가 안 되겠는지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곤 집을 나가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 * *
다음 날. 명원고 정문.
등굣길에 태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걷는 것을 발견한 이반이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 가방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무슨 일에선지 태영이 놀라지도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영혼 없는 말투로 인사했다.
“안녕?”
“너 무슨 일 있냐?”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태영을 빤히 쳐다보던 이반이 앞장서 가며 말했다.
“매점 가자. 빵 사 줄게.”
“나 아침 먹고 왔는데. 그리고 나 체육 대회 발야구 연습하러 가야 되는데.”
“너 연습 안 해도 잘 차잖아.”
“나 배 안 고픈데.”
“그럴 리가.”
“진짜야. 나 배 안 고파. 그럼 난 얼른 체육복 갈아입으러…….”
교실 쪽으로 도망가려는 태영의 가방을 이반이 다시 덥석 잡았다. 그러곤 후문 쪽 정원으로 향했다. 이반은 태영을 벤치에 앉히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반이 허리를 숙여 태영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말해 봐. 괜찮으니까.”
“그게…… 사실은 내가 어제 강미림 언니, 그러니까 수아 과외 쌤한테 전화를 했는데…….”
태영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말을 하려다 말고, 또 하려다 말고, 망설이자 이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어려우면 안 해도 돼.”
“아니야, 할게! 너한텐 해야 돼. 너도 알아야 되는 일이거든.”
“…….”
“사고 있던 날 밤에 수아가 자습서를 학교에 두고 왔다면서 나갔었대.”
“누가 그래? 그 과외 선생이?”
“응. 미림 언니가 그날 똑똑히 기억한대. 밤늦게 수아가 비에 쫄딱 맞은 채로 집에 와서 부모님들도 놀라셔 가지고 앞으로 밤에 나가지 말라고 엄청 혼냈다더라. 그니까 그날 수아가 유일반 만나러 동아리방에 갔었던 것 같아. 그리고 이거…….”
태영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그날 밤 학교 정문 쪽이 찍힌 블랙박스 영상이야.”
“이런 건 어디서 났어?”
“떡볶이집 사장님. 난 학생이라 안 보여 줄 것 같아서 울 오빠한테 부탁해서 받은 거야.”
생각지도 못한 자료에 놀랐는지 이반은 영상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 순간 태영이 영상을 스톱 시켰다. 정지 화면에는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확대하니까 픽셀이 다 깨져서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운동화 색깔이…….”
하필 노란색이었다. 그리고 메고 있는 가방도 수아 것과 흡사했다.
“얘 권수아지?”
“…….”
“재생 계속해도 돼?”
“응.”
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리고 말했다.
“아, 그리고 여기 보면 수아가 아니, 노란색 운동화가 학교에 들어가고 20분 뒤쯤에 유일반이 나와서 택시를 타다가 쓰러졌어.”
“그래서 구급차에 실려 왔나 보네. 이다음부턴 내가 아는 얘기야. 그날 응급실에 내가 갔었거든.”
“아…….”
태영이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노란색 운동화가 수아가 맞다면, 수아는 왜 내게 거짓말을 한 걸까?
‘무슨 소리야? 난 거기 들어가 본 적도 없어.’
동아리방에 들어가 본 적도 없다고 우기던 수아가 떠오른 태영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심각해진 태영의 얼굴을 흘끔 보던 이반이 괜히 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내가 넌 빠지라고 했잖아. 이제 그만해. 나머진 내가 처리할 테니까.”
“처리? 어떻게?”
“내가 권수아랑 얘기해 볼게.”
“그러다 니가 유일반 아닌 거 들키면? 지금도 수아가 너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던데…….”
“이미 눈치챘을 거야. 걔 형이랑 친했다면서. 근데 그날 일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거 보면 분명 뭐가 있어.”
“그러게…….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수아가 거짓말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듯 보이는 태영을 이반이 걱정스레 쳐다봤다.
“모태영,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해. 일종의 자기방어지. 나중에 너 기자 되면 사람들 말 전부 다 믿을 건 아니지?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 것도 기자의 몫일걸?”
“고마워.”
“고마우라고 한 소리 아닌데? 정신 차리라고 한 소리지.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기자 될 수 있겠냐?”
“마음 약한 기자가 되지 뭐. 난 건욱 기자님이 나한테 했던 것처럼 약자 편에 서서 얘기 들어 주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식 많이 많이 전해 주는 그런 기자가 되고 싶어.”
“기자로 유명해지긴 글렀네. 유명해지려면 자극적인 이슈에 더 예민해야지.”
“그런 건 꼭 내가 안 해도 되잖아.”
“그래. 꼭 되라. 마음 약하고 안 유명한 기자.”
이반은 일부러 태영이 웃으라고 놀리듯 말했다. 그게 통했는지 태영이 ‘지금 놀리냐? 혼난다!’ 하며 주먹을 쥐며 장난을 쳤다. 그러다 대뜸 태영이 녀석을 향해 물었다.
“근데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 넌 꿈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