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느덧 해가 저물고 어둑해졌다. 천막 위 전구들이 켜졌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테이블이 차기 시작했다.
“잘 먹었습니다!”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태영과 이반은 골목을 내려갔다. 태영이 가는 길에 편의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민하자 그를 흘끔 보던 이반이 뭔지 알겠다는 듯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곤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 와 태영에게 건넸다.
“어? 어떻게 알았어? 나 죠스바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긴, 볼 때마다 매점 앞에서 너 그거 먹고 있던데. 입술 퍼레져 가지고. 대체 왜 그러나 했더니 그 아이스크림 먹어서 그런 거였던데?”
“으, 짱 시원해.”
괜히 멋쩍었던 태영은 말을 돌리며 아이스크림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그런 태영을 이반이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열쇠고리 주인은 찾아봤어?”
“아…… 그거.”
태영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근데 있잖아…… 그냥 안 찾으면 안 되나? 어차피 유일반 깨어나면 누가 그런 건지도 다 알게 되는 거잖아. 그럼 굳이 니가 찾지 않아도…….”
“찾아야 돼.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왜?”
“그놈이 로봇에 들어가는 중요 부품 중 하나를 훔쳐 갔거든.”
“뭘 훔쳐? 부품? 헐. 그래서 로봇이 작동 안 되는 거야?”
“아니. 되긴 하는데, 지금 정확도로는 대회에서 우승 못 해. 독일에 있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센서 구하는 중이긴 한데, 배송만 일주일이 넘게 걸려. 일주일이면 나한텐 꽤 긴 시간이거든.”
“대회 우승…….”
태영은 문득 아까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동아리방에서 쪽잠을 자던 녀석의 모습과 현재 꽤 피곤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이 겹쳐졌다.
태영은 녀석을 애처롭게 쳐다보다가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범인 내가 잡아 줄게! 그 부품인지 센선지 그것도 내가 찾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찾을 건데?”
“어떻게? 그건 이제부터 생각을…….”
녀석이 실소를 터뜨렸다. 왜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태영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이반이 곧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넌 이제 내 일에서 빠져.”
“왜?”
“기자단 면접 언제야? 준비 안 해?”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곧 기자단 면접이 있다는 사실을.
“면접 언제냐니까?”
“다음 주 토요일! 체육 대회 다음 날!”
“시간 얼마 안 남았네.”
“괜찮아.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뭐. 나 아침마다 뉴스 엄청 열심히 보거든. 그리고 요샌 기사 형식으로 일기도 쓰고 있어.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의 마음으로다가.”
“오늘 일기장에 작성할 기사는 뭔데?”
“음…….”
태영이 흘끔 녀석의 눈치를 보며 작게 웅얼거렸다.
“사막에 꽃이 핀 이유를 기상 이변 현상에 빗대어…….”
“내가 아주 좋은 기삿감을 줬네?”
“응. 니 덕분에 나 막 유식해지는 것 같아. 저번엔 니가 말했던 희곡도 찾아봤어.”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응. 그거 다 읽어 봤는데 너무 슬펐어. 결국 인간이 로봇을 만든 이유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대신 시키려던 거였잖아. 근데 결국 로봇이 진화해서 인간들을 다 몰살하고 그 바람에 로봇은 생산해 줄 인간이 없으니 미래가 없어지게 되고.”
“진짜 열심히 읽었나 보네?”
“당연하지. 나 문과 갈 걸 그랬나 봐. 물리보다 문학에 더 흥미가 생기는 거 있지?”
“넌 문과 갔으면 물리가 더 재밌다고 할 거 같은데.”
“소름. 날 너무 잘 알아.”
태영이 짓궂게 말하자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골목에 들어섰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막대만 쪽쪽 빨던 태영이 쭈뼛거리다가 대뜸 말했다.
“고마워!”
“갑자기?”
“전부터 계속 말하려고 했는데 자꾸 시기를 놓쳐서.”
“뭐가 고마운데?”
“그냥 전부 다. 나 이번에 기자단 서류 심사 합격한 것도 다 니 덕분이잖아. 니가 가짜 폭로 글 해결해 준 덕분에 용감한 시민상도 받고, 그 덕분에 인플루언서도 됐잖아. 너 만나고부터 내 일은 다 잘되고 있는 것 같아. 사막에 꽃이 피듯.”
“응용하는 거야? 기특하네. 고마운 거 알면 열심히 준비해서 꼭 합격해.”
“당연하지! 아, 우리 집은 여기서 좀만 더 가면 돼.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너 바쁘고 할 것도 많잖아. 시간 낭비 하는 게 제일 싫다며. 그니까 얼른 가.”
“이상하게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은 안 아까워. 시간 낭비 아니라고.”
말을 하고 나니 쑥스러웠는지 녀석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태영은 괜히 뱃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 들더니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좁은 골목길을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과 함께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 * *
장마가 시작됐다. 교실 창문 너머로 무섭게 내리는 빗줄기를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던 태영은 어젯밤 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가던 녀석의 뒷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사막에 핀 꽃보다 널 만난 게 나한텐 더 기적이었어.’
꺅. 뭐야. 무슨 말을 그렇게 시적으로 해?
그 녀석이 문학 100점을 괜히 맞은 게 아니라니까. 아무리 다정한 유일반도 그렇게 예쁘게 말 못 하는데. 그 녀석 생긴 건 되게 차갑게 생겨서 은근 섬세하다니까. 괜찮다는데도 집 앞까지 막 데려다주고 말이야. 저번에 유일반은 그냥 가란다고 진짜 그냥 갔는데.
미쳤어. 내가 지금 누구랑 누굴 비교하는 거야.
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메모장에 마구 낙서해 댔다.
“사막에 핀 꽃?”
해니가 태영이 낙서한 내용을 읊었다. 화들짝 놀란 태영이 황급히 메모를 가렸다.
“야, 최니! 왜 훔쳐봐?”
“수업 시간 내내 뭘 그렇게 끄적대나 했더니 시 쓰냐? 사막에 핀 꽃은 뭔데?”
사막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태영의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넌 몰라도 돼.”
“오올. 뭐야. 뭔데? 우리 오래간만에 개인 면담 좀 해야겠는데? 점심시간에 떡볶이 고?”
“고! 아, 아니다. 나 유이…… 아니 유일반이랑 급식 먹어야 되는데.”
“유권이랑 둘이 먹으라고 하면 되지. 우린 떡볶이 먹으러 가자.”
“그럴까?”
밀가루 안 먹는 녀석 때문에 요새 통 떡볶이를 먹으러 가지 못했던 태영은 새빨간 떡볶이를 떠올리자 군침이 절로 삼켜졌다.
* * *
“너무 맛있어!”
떡볶이 수혈을 마친 태영이 배를 두드리며 행복해했다. 무슨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순식간에 떡볶이를 해치운 태영을 향해 해니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역시. 운동부 출신은 달라. 먹는 게 남달라.”
“운동부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모태혁 때문이라니까. 빨리 안 먹으면 그 인간한테 다 뺏기거든.”
“난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좀 먹어 줄래?”
“담부턴 그렇게 할게. 대신 후식은 내가 쏠게.”
그렇게 두 사람은 후식으로 뭘 먹으면 좋을지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가게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사장님이 달려 나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손님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 가게 위에 달린 CCTV 볼 수 있을까요? 내가 잠깐 주차한 사이에 누가 차를 긁고 갔지 뭐예요.”
“세상에 누가 말도 없이 그러고 그냥 갔대요? 잠깐만요. 그러지 말고 가게 앞에 세워 둔 제 차 블랙박스로 확인해 줄게요.”
그렇게 사장님과 손님은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태영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
“왜 그래? 저 아저씨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여기 사장님 차에서 학교 정문 쪽 보이지 않나?”
“그럴 것 같은데?”
“블랙박스 보관을 얼마나 하지?”
“모르지.”
태영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블랙박스 보관 기간을 검색했다.
“메모리 카드 용량에 따라 다르대. 길게는 6개월 짧게는 일주일…….”
“갑자기 블랙박스 영상은 왜?”
“해니야.”
“응?”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잘 듣고 절대 주유권한텐 말하지 마.”
“그냥 안 들을까? 나 솔직히 유권이한테 말 안 할 자신 없음.”
“그럴 줄 알고 나도 그냥 말 안 하려고. 후식이나 먹으러 가자.”
“자, 잠깐!”
해니가 태영을 붙잡았다.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말 안 할게. 유권이한텐 절대로 말 안 할게. 그니까 뭔데? 빨리빨리.”
해니가 재촉하자 태영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누가 동아리방에서 부품 하나를 훔쳐 갔어.”
“뭐? 그 대회 나갈 로봇에 들어가는 부품을 훔쳐 갔다고? 왜?”
“모르지. 근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부품 훔쳐 간 놈이 열쇠고리를 떨어뜨리고 갔어.”
“물리가 준 열쇠고리? 헐. 야! 너 그래서 1반이랑 2반 여자애들 열쇠고리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다닌 거였어?”
“응.”
“그래서 지금 그 열쇠고리 없는 애가 누군데?”
“…….”
태영이 말끝을 흐리자 해니는 며칠 전 태영이 열쇠고리 운운하며 수아를 다그쳤던 일이 떠올랐다.
“수아구나?”
“돌겠어. 그 열쇠고리 지금 수아만 없어.”
“진짜 제대로 다 확인해 봤어?”
“혹시 몰라서 이따 교실 가서 다시 빠뜨린 애들은 없는지 확인해 보려고.”
“근데 블랙박스는 왜?”
“난 수아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어. 부품 없어진 날이 언제냐면 그날이야. 나랑 유일반이랑 사귀기로 한 날, 쑤쑤 님이랑 미팅하기로 한 날. 니가 나 원피스 빌려준 날 있잖아.”
“아! 그날? 야, 근데 그날 수아 결석했잖아. 학교 안 왔잖아. 우리 너네 집에서 모이기로 했을 때도 과외 있다고 못 왔잖아.”
“아, 맞다!”
태영은 해니의 말에 두 눈이 커다래졌다.
“최니, 넌 천재야.”
“그걸 이제 알았음?”
해니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물을 마시자 태영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수아 과외받은 건 확실하겠지? 그럼 그것만 확인하면 되는 거네.”
“어떻게 확인하게?”
“확인해 줄 사람이 떠올랐어!”
태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곧장 핸드폰을 꺼내 오빠 모태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한편, 동아리방이 있는 옥상 문이 누군가의 발에 의해 과격하게 열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옥상으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송바위였다.
“야, 쌍둥이!”
바위가 건들건들한 걸음걸이로 동아리방 앞으로 다가가 문을 발로 펑펑 찼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와! 당장 안 나와? 확 문 부숴 버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송바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이반이 나왔다.
“너 이 새끼 내가 가만 안 둬. 형제가 쌍으로 애를 가지고 놀면 재밌냐? 재밌냐……고…….”
바위가 말끝을 흐렸다. 창백한 안색으로 문을 잡고 겨우 서 있던 이반이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제 쪽으로 쓰러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
아니, 쓰러졌다.
얼떨결에 이반을 덥석 품에 안아 버린 바위는 난감한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거렸다. 이 몹쓸 녀석을 당장 패대기쳐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녀석의 몸이 불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