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어째서 넌데?”
이반이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태영이 대꾸했다.
“물리가 수업 시간에 맨날 나만 부르거든. ‘모태영 너 나가!’, ‘모태영 이리 나와!’ 그 인간 맨날 나만 갈군단 말야.”
“설마 형이 그런 뜻으로 말한 걸까? 선생한테 맨날 혼만 나는 여자애를 왜 좋아하냐? 것도 명원고 1등이. 난 반대를 말한 거야.”
“반대 뭐!”
“선생한테 이름이 불린다는 건 총애를 받는 인재라는 거지. 봐, 그럼 넌 아니겠지?”
“그래, 난 아니다! 어쩔래?”
“어쩌긴 꿈 깨야지. 보니까 물리 1등이 유일반, 2등이 권수아던데?”
“안다고. 나도 다 안다니까.”
“뭐냐. 너 왜 아쉬워하냐?”
“내가 언제? 나도 다 알고 있었다니까. 유일반이 나 같은 애를 좋아할 리가 없지. 역시 수아 질투심 유발하려고 나랑 사귄 거 맞구만. 물론 나도 유일반 되게 좋아했던 건 아니야. 나도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고!”
태영은 억울한 마음에 더 너스레를 떨었다. 그게 귀여웠는지 이반이 피식 웃으며 쳐다봤다.
“그놈의 너튜브 촬영?”
“어. 유일반이 같이 미팅 나가 준다고 했거든. 그래도 너희 형 되게 착해. 나 같은 애 부탁도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고.”
“이래서 사람 이미지가 참 중요해. 형이 이래도 저래도 너한텐 좋은 사람이기만 하나 봐?”
“응. 왜? 너한텐 아니야? 유일반이 남한테도 이렇게 잘해 주는데, 동생인 너한텐 더 잘했을 것 같은데.”
“잘했지. 그러니까 내가 여행도 못 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이게 내가 형한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거거든.”
녀석은 쓸쓸한 눈빛으로 망가진 로봇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태영은 그땐 알지 못했다. 그 눈빛의 의미를. 그리고 녀석이 말한 마지막의 의미를.
* * *
한편, 자습실에서 공부하던 수아가 갑자기 가방 속을 마구 뒤졌다.
뭔가 없어진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이내 찾는 것을 포기하고 공부에 집중하려 책을 폈지만, 도무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세수라도 할 생각으로 황급히 자습실을 나온 수아가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툭.
갑자기 누군가 화장실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수아가 넘어지고 말았다.
“수아야, 괜찮아? 미안. 내가 앞을 제대로 봤어야 했는데.”
수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곤 자신과 부딪힌 오필희에게 괜찮다고 눈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수아가 멈칫했다.
오필희가 바닥에 떨어뜨린 사진들 때문이었다. 수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사진을 응시했다.
“이게 뭐야?”
오필희가 사진들을 주우며 말했다.
“나 사진부잖아. 선생님이 졸업 앨범에 실을 사진 몇 장 뽑아 오라고 해서……. 수아야?”
오필희가 줍던 사진들 중 한 장을 뺏어 가만히 들여다보던 수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아야 왜 그래?”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거야?”
“그건 작년 체육 대회…….”
수아는 사진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작년 체육 대회 계주에서 MVP를 차지한 태영이었다. 계주 결승점에 골인한 뒤 환호하는 태영의 뒤로 유일반이 활짝 웃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사진 잘 나왔지? 근데 난 유일반이 수아 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 사진 보니까 딱 알겠더라. 유일반 걔 작년부터 쭉 모태영 좋아하고 있었나 봐.”
오필희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수아는 알 수 있었다.
유일반이 좋아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태영이었다는 사실을.
* * *
“여기 혹시 너희 가족이 하는 가게냐?”
태영이 하교 후에 이반을 데려온 곳은 또 꼭대기 바비큐였다.
주황색 천막 아래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제집보다 더 아늑하고 편안했다. 참 이상한 곳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반은 태영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캬.”
오자마자 사이다 한 병을 원샷 때리더니 무슨 아저씨 같은 추임새를 내며 잔을 내려놓는다. 어제에 이어 오늘 또 와서인지 사장님은 주문도 안 했는데 대접밥과 바비큐를 내왔다.
“가족 맞지?”
“가족이나 다름없지. 내가 말했잖아. 여기 내 최애 바비큐집이라고. 어릴 적부터 송바위랑…….”
“나랑 있을 땐 그 새끼 얘기 하지 말라니까.”
“왜? 나 바위랑 화해했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사실 그동안 우리 둘이 서로 오해가 있어서 안 보는 중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바위가 날 여전히 친구로 아껴 주고 있었던 거야. 너도 잘 지내 봐. 걔 진짜 의리 있는 친구야.”
“친구 좋아하네.”
이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송바위의 진짜 속내가 뭔지 뻔히 다 보였지만 태영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근데 여기 너무 더운데 안에 들어가서 먹으면 안 되냐?”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아 천막 안이 아주 찜통 같았다. 그나마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더운 바람만 나올 뿐이었다.
태영이 녀석을 흘끔 쳐다봤다. 무슨 일인지 녀석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얼굴도 시뻘건 게 좀 이상했다. 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왜?”
“전부터 계속 궁금했던 건데, 넌 왜 이렇게 자주 아파? 유일반은 지금까지 아파서 조퇴한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아주, 별걸 다 아네? 뭐 유일반 팬티 색깔까지 맞히겠어?”
“거기까진 아니고. 교장 쌤 훈화 말씀 할 때 맨날 유일반 얘기 하거든. ‘우리 명원고 자랑스러운 1등 유일반 학생은 말입니다.’ 하면서 아주 너희 형 칭찬을 30분도 넘게 하는데 그땐 좀 유일반 짜증 나더라. 뭔 놈의 인간이 이렇게 흠이 없어? 아니 공부도 잘하는데 체력도 왕이야. 못하는 게 없어. 그래도 넌 진짜 인간적이야. 넌 못하는 거 많잖아.”
“하.”
교장 선생의 성대모사를 하는 태영을 보며 웃던 이반이 정색했다.
“지금 나 돌려 깐 거지?”
“아니. 앞에서 깐 건데.”
“그래, 말을 말자. 말아. 밥이나 먹어.”
이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영이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대접밥을 그릇째 들고 우걱우걱 먹던 태영은 어제와 달리 통 먹지를 못하는 녀석을 흘끔 쳐다봤다.
“넌 왜 안 먹어? 오늘 하루 종일 암것도 안 먹었으면서. 더워서 그래? 들어갈까?”
“아냐. 됐어. 이제 해 지네. 괜찮아지겠지…….”
말끝을 흐리며 녀석은 어느새 눈앞까지 떨어진 주황빛 해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 태영은 넌지시 물었다.
“너 무슨 고민 있어?”
“있지. 많지.”
“뭔데? 내가 들어 줄게.”
“니가 해결해 줄 수도 있는 고민도 있긴 한데.”
“진짜? 또 뭐 훔치는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럼 말해 봐. 내가 당장 해결해 줄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니 신이 난 태영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녀석이 즉각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말해 줘.”
“뭐, 뭐야. 언젠 좋아하지 말라며!”
“응. 좋아하지 마.”
“뭐래.”
태영이 지금 놀리는 거냐며 녀석을 흘겨봤다. 그러자 녀석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솔직히 지금 굉장히 바쁘거든? 아까까지만 해도 머리 깨질 것 같았는데,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마음이 편해. 머리도 안 아파. 그리고 나 더운 건 괜찮은데 습한 건 딱 질색이야. 지금 습해서 끈적거리고 불쾌지수 만빵 짜증 나 뒤지겠는데, 너랑 있으니까 참을 만해. 난 이만큼 널 좋아하는데 근데 넌 나 좋아하지 마.”
“무슨 말이야 그게?”
“나도 몰라.”
“아…….”
“아?”
“너 얼굴 빨개. 더워서 그런 거지?”
“더워서겠냐?”
녀석은 부끄러워선지 괜히 더 퉁명스럽게 말하며 목을 긁적였다. 그러곤 태영의 시선을 피했다.
저물어 가는 붉은 해 때문인지 녀석의 얼굴이 더 빨갛게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태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내 맘이거든?”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유치하게 말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콜라 한 병과 얼음 컵을 들고 다가왔다.
“자, 이건 서비스!”
“우와. 감사합니다!”
“태영이 많이 먹어라. 오, 이 친군 어제도 느꼈지만 무슨 아이돌이야? 잘생겼네.”
“얘가 명원고 아이돌이긴 하죠. 푸하하.”
주책맞게 떠드는 태영을 녀석이 어이없게 쳐다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돌 친구! 오늘은 안 맵지?”
“네?”
“우리 바비큐 소스는 딱 한 가지 맛인데 장사 20년 만에 처음으로 순한 맛으로 만들었다고. 우리 태영이가 전화로 어찌나 부탁을 하던지. 친구 밥 먹여야 된다고…….”
“싸장님!”
“알았어. 말 안 할게.”
이미 다 말해 놓고. 태영은 난처한 기색으로 벌떡 일어나 사장님의 등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두 사람이 사라지자 녀석은 방금 제가 뭘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곧 태영이 뻘쭘해하는 얼굴로 나왔다.
“아이고, 내 밥 다 식었네. 빨리 먹어야지. 너도 어서 먹어.”
부끄러워선지 딱딱해진 말투. 그를 본 이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 일부러 왔어? 나 때문에? 나 밥 먹이려고?”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나도 여기 좋아하고, 너도 여기 음식은 그나마 잘 먹는 것 같아서……. 근데 어제 좀 맵다고 해서…… 맵기만 조절하면 훨씬 잘 먹을 것 같아서 사장님한테 약간의 건의를……. 뭐, 뭘 봐?”
이번엔 태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좋아하지 말라니까.”
“난 너 좋아한다고 한 적 없는데?”
“난 방금 들은 것 같은데?”
“…….”
태영이 손을 만지작거리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녀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막에서 꽃이 만개한 걸 본 적 있어.”
“사막?”
“응.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그 사막에 폭우가 며칠 쏟아지고 딱 두 달 만에 꽃이 피더라. 기적 같은 풍경이었지.”
“와. 진짜 예뻤겠다. 그나저나 꽃도 대단하다. 땅속에서 비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렇게 꽃이 바로 피고 말이야.”
“때마침 적절한 시기에 적절히 내린 비도 한몫했지.”
녀석은 그날 봤던,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던 꽃밭을 떠올리며 태영을 애틋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어떤 것도 꽃피우지 못하고 죽어 가던 내 삶에 비를 내려 준 너.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오늘 이반은 태영에게 이 말이 꼭 하고 싶었다.
“사막에 핀 꽃보다 널 만난 게 나한텐 더 기적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