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54화 (55/67)
  • [54화]

    “대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태영의 물음에 수아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

    “그래. 그날 밤. 넌 알잖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니.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래, 열쇠고리 잃어버렸어. 근데 그게 뭐?”

    “너 그 열쇠고리 동아리방에서 잃어버린 건 알아?”

    “무슨 소리야? 난 거기 들어가 본 적도 없어.”

    “동아리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너 유일반이랑 친한 거 아니었어?”

    “아무리 친해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애였어. 옥상에도 자주 못 올라오게 했다고. 근데 넌 요새 맨날 가지?”

    그거야 지금의 유일반은 유일반이 아니니까.

    “태영아, 이제 그만해. 나 너한테 이런 오해 받기 싫어. 나 진짜 유일반 안 좋아해. 그러니까 제발 좀 그만하라고. 나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알았니? 먼저 들어간다.”

    “자, 잠깐!”

    태영이 수아를 따라가려고 하자 해니가 잽싸게 태영을 붙잡았다.

    “모탱, 하지 마. 그냥 둬.”

    “그래도 얘기를 끝까지 해 봐야지. 이렇게 말을 하다 말면 해결이 안 되잖아.”

    “말을 계속해도 해결 안 될걸?”

    “왜?”

    “넌 유일반이 기억 상실인 걸 숨기고 있고, 수아 쟨 지 마음을 모르고 있고. 이렇게 서로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대화가 되겠어?”

    “수아가 지 마음을 모른다는 게 무슨 말이야?”

    “보면 모르냐? 수아 쟤 유일반 좋아하는데 지도 지 맘 모르고 있는 거야. 쟤도 모쏠이잖아. 그니까 괜히 애 자극해서 각성하게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매점이나 가자.”

    해니가 태영의 목에 팔을 걸더니 질질 끌고 매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태영은 끌려가면서도 수아를 향한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 * *

    해니의 말대로라면 수아는 유일반을 좋아하는데 본인만 모르는 상태.

    수아가 오히려 제가 차지해야 할 1등을 뺏어 가는 유일반을 싫어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래서 동아리방에 몰래 들어가 로봇을 망가뜨려 유일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작정이었다면? 그래서 1등을 뺏어 가려던 계획이었다면…….

    “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급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태영이 급기야 수저를 푹, 밥 위에 꽂아 버렸다.

    녀석에겐 분명 수아가 범인이 아니라고 내가 진짜 범인을 꼭 찾아내고 말겠다고 호언장담했건만.

    왜 하필 지금 수아는 열쇠고리를 잃어버린 거며, 동아리방엔 들어가 본 적도 없다는 말을 한 걸까? 차라리 몇 번 가 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강하게 부정하느냔 말이다. 더 수상하잖아.

    정말 녀석의 말대로 수아가 범인일까?

    “미치겠네.”

    아니야. 아닐 거야. 수아는 그런 애가 아니야.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위인이 아니라고. 겉으론 냉정하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여도 얼마나 정의롭고 따뜻한 아이인데.

    태영은 1학년 학기 초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과학실에서 태영의 실수로 불이 크게 날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게 수아였다. 태영은 그때 수아 덕분에 소화기 사용법을 처음 익혔다. 생각해 보면 그날 소화기 사용법을 숙지하지 못했었더라면 지난날 로봇 박물관에서 섣불리 나서지 못했을 거다.

    아무튼 과학실 일 때문에 학기 초부터 문제아로 찍힌 태영은 반에서 또 따돌림을 당할 뻔했지만, 수아가 감싸 준 덕분에 그리고 1학기 중간에 전학 온 해니가 항상 같이 있어 준 덕분에 평탄한 학교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태영이 그런 애 아니야. 착하고 좋은 애야. 너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어? 계속 그딴 소리 하면 나 너희랑 스터디 안 해.’

    얼마 전 왜 공부도 못하는 모태영과 어울리느냐는 오필희 말에 수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태영은 수아를 향한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친구를 의심하면 안 되는 거야.

    수아는 절대 아니야!

    태영은 다시금 수아를 향한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일단 밥이나 먹자.”

    진짜 범인을 잡으려면 다시 전투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태영은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속에 넣었는데, 이상하다.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요구르트를 안 들고 왔나?

    태영은 배식구 쪽을 살폈다. 하지만 오늘의 메뉴엔 요구르트는 없었다. 그럼 대체 뭐가 빠졌단 말인가.

    “아! 유일반……이 아니라 그 녀석!”

    태영은 아차 싶었다. 녀석을 급식실로 데려오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그 녀석 분명 코딩하느라 밥 먹는 것도 까먹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텐데.

    태영은 대충 꾸역꾸역 밥을 입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해니가 주유권과 함께 식판을 들고 테이블로 오고 있었다.

    “최니! 내 식판 좀 부탁해!”

    “니가 웬일로 밥을 다 남겼냐? 어디 가?”

    “나 옥상!”

    “오올, 요새 사이가 좋네? 헤어지네 마네 할 땐 언제고.”

    “그런 거 아니거든? 암튼 나 간다!”

    태영은 급식실을 뛰쳐나가 매점으로 향했다. 그러곤 빵을 집으려다가 고민 끝에 구운 달걀 한 판을 번쩍 들었다.

    “저번에 떡볶이 먹을 때 보니까 달걀은 먹던데. 이건 밀가루 아니겠지? 맞아. 모태혁 그 인간이 달걀은 단백질이랬어.”

    태영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계산대에 달걀 한 판을 내려놓자 매점 아줌마가 이걸 왜 이렇게 많이 사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태영은 배시시 웃으며 계산을 했다. 그러곤 애지중지 달걀 한 판을 품에 안고 옥상으로 달려갔다.

    쾅, 옥상 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햇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태영은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으으, 더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태영은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도 아무 반응이 없자 태영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 달걀 한 판을 내려놓으며 동아리방을 둘러본 태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체 모를 부품들을 크기별로 줄 세워 놓은 걸로도 모자라 화이트보드에 빼곡히 적힌 코딩 언어. 글씨마저도 컴퓨터로 쓴 것처럼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정말 이 정도면 병이라는 생각을 하며 태영은 녀석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는 거야?”

    녀석이 창가 앞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태영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러곤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자는 녀석을 가만히 쳐다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야.”

    대답이 없다. 또 한 번 조용히 불러 본다.

    “유일…… 아니, 유이반? 야, 유이반.”

    녀석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다 급 소심해진 태영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태영은 멋쩍은 듯 이마를 긁적이며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햇빛을 받아서일까? 녀석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네. 아무리 봐도 유일반보다 얘가 더 잘생긴 것 같아. 자세히 보니까 진짜 다르네. 얼굴이 달라. 이 녀석이 좀 더 뾰족하달까? 코도 좀 더 높은 것 같고…….

    “!”

    태영이 화들짝 놀랐다. 녀석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움직인 것이다. 이내 녀석은 악몽이라도 꾸는 모양인지 들릴 듯 말 듯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으…….”

    태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녀석이 너무 불쌍했다. 사고 이후 지금까지 하루하루 얼마나 고됐을까?

    쌍둥이 형이 사고를 당했고, 그 사실을 가족에게까지 비밀로 한 채 형인 척 로봇대회 준비를 하고, 학교를 다니고, 그 사실을 들킬까 봐 집에서도 하루도 편히 잠든 날이 없었겠지?

    녀석이 너무 가엽게 느껴진 태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녀석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녀석과 두 눈이 마주친 태영은 민망해하며 얼른 손을 뒤로 숨겼다.

    “너 뭐 하냐?”

    “어? 아? 이, 이거! 이거 주려고.”

    “이게 뭔데?”

    태영이 허둥지둥하며 테이블 위에서 달걀 한 판을 들고 와 내밀었다.

    “뭐긴 뭐야 달걀이잖아. 일단 먹어. 이따 학교 끝나고 내가 맛있는 밥 사 줄게.”

    저를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태영이 달걀을 녀석의 품에 안겼다.

    “이걸 다 먹으라고? 그리고 밥도 사 준다고? 왜?”

    “그냥 사 주고 싶어서. 뭐, 싫음 말고.”

    태영이 괜히 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이반은 태영이 왜 저러나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 수상하다? 밥 사 주면서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내가 언제 헛소리를 했는데!”

    “나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유일반 돌아오면 사귀어 보고 결정한다라는 헛소리가 가장 쇼크였지. 아, 그 생각 아직 안 바뀌었지?”

    “…….”

    태영은 수아가 사실은 유일반을 좋아하고 있지만, 본인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해니의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유일반과 수아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는 거다. 끼어들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유일반이 돌아오면 내가 정리하는 게 맞는 거겠지.

    “생각이 바뀌었나 보네?”

    갑자기 고민이 많아진 태영의 얼굴을 응시하던 녀석이 피식 웃었다.

    “뭔데? 나한테 말해 봐.”

    “근데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유일반은 왜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어 준다고 한 걸까? 바위 말로는 수아 질투심 자극하려고 그랬다는데 정말이야? 넌 뭐 아는 거 없어? 니네 형이잖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반이 말했다.

    “사고 전에 형이랑 로봇대회 나가는 문제로 통화한 적이 있어.”

    녀석은 그날의 통화 내용을 떠올리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곧 고백한다고 했어.”

    “누구한테?”

    “누군진 말 안 했지만 넌 아니야.”

    “왜?”

    “같은 이과라고 했고.”

    “나도 이과거든?”

    “끝까지 들어.”

    “우씨.”

    “물리 시간마다 이름이 불리는 여자애라고 했어.”

    태영은 알쏭달쏭했다.

    “이상하네? 그것도 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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