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나랑 닮았다는 게 이거야?”
이반을 따라 동아리방 옆에 있는 창고로 이동한 태영은 황당한 얼굴로 녀석이 내민 소형 로봇을 응시했다.
“그니까 나랑 닮은 게 사람이 아니고…….”
크기는 대략 30cm 정도.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할 만큼 크고, 코도 없고, 입술도 동그란, 바가지 머리의 캐릭터 로봇.
“이거라고?”
“어. 이게 우리 애착 로봇이었어. 어릴 때 서로 얘 차지하려고 형이랑 엄청 싸웠었거든.”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녀석이 피식 웃었다. 태영은 기분이 참 묘했다.
“애착 로봇이라……. 근데 나랑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건데?”
이반이 로봇과 태영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면 몰라? 똑같이 생겼잖아. 내가 작년에 너 처음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리 삼반이가 물에 빠진 줄 알고.”
“삼반이?”
“응. 얘 이름 유삼반. 내 동생.”
“뭐래.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뭐야.”
태영은 어째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진짜야. 넌 그 사람이랑 진짜 닮았어. 그래서 자꾸 니가 눈에 밟히는 것뿐. 딱 거기까지야. 정말 너한테 딴마음 같은 거 없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유일반 걔도 참 웃기는 녀석일세. 아니, 사람이라며! 사람이랑 닮았다며!
내가 닮은 게 로봇일 줄이야.
태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삼반이라는 로봇을 흘겨보고 있었는데.
녀석은 마치 아기를 다루듯 로봇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더니 박스 안에 도로 소중히 넣었다.
삼반이를 바라보는 녀석의 애틋한 눈빛을 본 태영은 이 로봇이 녀석에게 어떤 의미인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녀석에게 삼반이는 엄마의 사랑이고 형과의 추억 아닐까?
생각해 보니 그냥 로봇도 아니고 녀석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로봇과 닮은 건 기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나 또한 녀석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괜히 가슴이 설렜다.
“나와.”
“어? 응.”
태영이 뒤늦게 녀석을 따라 창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패스!’ ‘이겨라!’ ‘꺅!’ 따위의 체육 대회 연습이 한창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간에 기댄 채 운동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녀석을 옆에서 흘끔 쳐다보던 태영이 넌지시 물었다.
“근데 넌 학교 안 가도 돼?”
“학교 왔잖아.”
“이 학교 말고, 유이반이 다니는 학교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여긴 유일반 학교잖아. 너도 다니는 학교가 있을 거 아니야.”
“난 학교 안 다녀. 그만뒀어.”
“헐. 왜?”
태영의 물음에 잠시 말이 없어진 이반이 뒤늦게 대답했다.
“여행 가려고.”
“여행? 무슨 여행을 가는데 학교까지 그만둬?”
“멀리 갈 예정이었거든. 아주 멀리. 근데 여기, 너한테 발목 잡혔네.”
“…….”
“니가 가지 말라면 안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다.”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태영이 녀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은 또 말을 아끼며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뭔가 복잡한 얼굴로 다시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뜨겁던 태양이 붉은 기운을 내며 점차 사라지자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며 연습하던 학생들도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이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안 되겠다. 너 나 좋아하지 마.”
“뭐, 뭐래. 너 좋아한다고 한 적 없거든?”
“있을걸?”
그런가? 있나? 있었나? 태영이 두 눈을 또르르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녀석이 대뜸 말했다.
“좋아하지 마. 난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니까.”
생각도 해 본 적 없다. 진짜 유일반이 돌아오면 이 녀석은 어떻게 되는지.
태영은 뒤늦게 깨달았다. 유일반이 돌아오면 이 녀석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어디로 떠날 건데? 원래 있던 곳? 너 어디 살았는데? 언제 가는데?”
갑자기 태영이 조바심 나는 얼굴로 질문을 쏟아 내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짓궂게 대답했다.
“말하면 따라올 것 같은데.”
“따라가긴 내가 왜 따라가.”
속내를 들켜 버린 게 민망했던 태영이 어물쩍 말을 돌렸다.
“근데 너 밥 먹었어?”
“아니.”
“그럼 꼭대기 갈래?”
“니가 사는 거야?”
“더치페이지.”
“니가 더 많이 먹는데 돈은 왜 똑같이 내냐?”
“그럼 너도 많이 먹든가. 에잇, 가기 싫음 말아.”
“기다려. 노트북 좀 챙겨서 나올게.”
사실 태영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던 녀석은 제 마음을 들킬까 봐 오히려 더 퉁명스럽게 굴며 동아리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곤 서둘러 노트북을 챙겨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
갑자기 걸음을 멈춘 이반이 고개를 돌려 아래를 응시했다. 로봇 밑에서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긴 이반은 로봇의 몸통을 들어 올려 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뭐지?”
* * *
한편, 옥상에서 이반을 기다리던 태영은 심각했다.
“떠난다고?”
혼자 중얼거리던 태영은 아까 녀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니까.’
대체 어디로 떠난다는 거야? 이따 밥 먹으면서 다시 자세히 물어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태영은 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그때, 노트북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온 이반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를 본 태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너 혹시 이게 뭔지 알아?”
녀석이 내민 건 작은 열쇠고리였다. 별 모양의 장식이 달린.
그걸 보자마자 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열쇠고리 물리 선생님이 학기 초에 신혼여행 다녀오면서 사 온 기념품이야.”
“니 거야?”
“아니. 내 건 필통에 있지. 그거 1반이랑 2반 애들 하나씩 다 가지고 있어. 우리 반이랑 니네 반만 물리 화경호 쌤한테 배우잖아. 근데 그거 어디서 났어?”
“로봇 밑에 깔려 있었어. 형 건가?”
“아닐걸? 그 별 모양은 여자애들한테만 줬거든. 남자애들은 달 모양…….”
말끝을 흐리던 태영이 뭔가 알아차린 표정으로 손바닥을 딱 마주쳤다.
“알았다! 그거 사고 난 날 범인이 흘리고 간 거 아니야? 그럼 범인은 1반과 2반 사이에 있는 거네? 여학생이고.”
“답은 나왔네.”
“누구?”
“2반 여학생 권수아.”
“아니라니까. 수아는 진짜 아니야.”
“그럼 니가 찾아봐.”
“뭘?”
“이 열쇠고리 주인이 누군지. 그날 밤 동아리방에 들어와서 로봇을 망가뜨린 사람이 누군지. 권수아가 아닌 증거를 가져와 보라고.”
태영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그래! 내가 찾을게. 꼭 찾아 줄게!”
* * *
아침 일찍 등교한 태영은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악, 깜짝이야!”
항상 교실에 제일 먼저 등교하던 오필희가 태영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뭐야. 모태영 니가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냥. 눈이 좀 일찍 떠져서. 하하.”
피곤해서 부스스한 태영이 얼른 졸린 눈을 지운 후 매의 눈초리로 오필희의 가방을 살폈다.
있다! 오필희의 가방에 네임택과 함께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태영은 잽싸게 메모장에 체크했다. 그 뒤로 반 친구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가방, 필통, 핸드폰 등등에 달린 열쇠고리를 발견할 때마다 태영의 손은 바빠졌다.
“모탱! 너 뭐야? 어디 아픔?”
항상 저보다 늦게 등교하던 태영이 교실에 먼저 와 있자 해니가 놀라워하며 가방을 책상 위에 툭 내던졌다. 그러곤 태영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 너 왜 안 하던 짓을 해?”
“해니 넌 분명 아니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게 좋으니까 물을게.”
“뭘?”
“물리가 준 열쇠고리 어딨어?”
“그거? 우리 유권이 줬지.”
“주유권한테 왜?”
“왜긴 왜야. 그거 달고 시험 보면 점수 오른대서 다들 갖고 댕기는 거잖아.”
맞다. 그랬다. 그래서 다들 열쇠고리를 가지고 있었던 거다.
“그럼 지금 주유권이 니 거 가지고 있는 거지?”
“응. 덕분에 우리 유권이 성적 올랐잖아. 왜? 뺏어다 줄까? 내 거랑 유권이 거까지 너 줄게. 그럼 2학기 중간 너 3배로 잘 볼 수 있다구.”
“됐거든? 난 내 힘으로 정정당당하게…….”
“정정당당 웃기시네.”
해니가 태영의 필통에서 볼펜 한 자루를 꺼내 툭 책상 위에 올려놨다.
“아주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웠냐? 어떻게 볼펜을 뚫어서 열쇠고리를 달아 놔? 너 집에서 이런 것만 하니까 공부를 못…….”
“야!”
“매점 가실까요? 일찍 오시느라 진지 못 잡수셨을 텐데.”
“응. 가자. 배고파.”
태영과 해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그러다 마침 등교하는 수아를 복도에서 마주쳤다.
태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사이 해니가 평소처럼 수아를 향해 물었다.
“권쑤! 매점 고?”
“아니야. 난 아침 먹고 왔어. 너희 둘이 다녀와.”
마다하는 수아를 태영이 걱정스레 쳐다봤다.
“수아야, 아침 먹은 거 맞아? 요새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나 같은 건 힘낼 자격도 없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흰 몰라. 모르는 게 나아. 그럼 난 간다.”
“잠깐!”
서둘러 교실로 들어가려는 수아를 태영이 붙잡았다. 그러곤 하복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웬 멍이 이렇게 크게……. 다쳤어?”
“모, 몰라……. 이게 뭐지?”
정말 몰랐던 건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아가 평소답지 않게 당황해 하며 팔을 매만졌다.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태영을 해니가 막아서며 곧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권쑤 힘내라고 우리가 열쇠고리 모아서 줘야겠네. 모탱, 그치?”
“어? 어……. 근데 수아야, 너도 열쇠고리 가지고 있지?”
“몰라.”
“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듯한 표정으로 수아가 대답했다. 태영은 그 순간 정말 불행하게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수아야, 너 혹시 열쇠고리 잃어버렸어?”
“…….”
태영이 차가운 얼굴로 수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