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48화 (49/67)

[48화]

“태영아, 왜? 수행 평가?”

수아가 신은 노란색 운동화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태영이 뒤늦게 대답했다.

“어? 응. 오늘 지구 과학 수행 평가 본다고 해서…….”

“아까 교무실 갔다 들은 건데 수행 평가 다음 주에 본대. 오늘은 준비물 없어도 될걸.”

“그래? 고마워. 근데 수아 너 실내화는 어쩌고?”

태영이 손가락으로 수아의 발을 가리켰다. 그러자 수아는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괜히 더 쓸데없이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동안 결석을 하도 많이 했더니 1층 사물함에 있는 물건들이 죄다 없어졌어. 누가 훔쳐 간 건지, 아님 내가 자리를 헷갈린 건지 텅 비어 있더라니까. 1등 놓친 것도 서러운데 요즘 왜 이러나 몰라. 실내화도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평소 같았으면 수아가 그냥 쿨하게 ‘몰라. 없어졌어.’라고 대답하고 끝냈을 텐데.

태영은 뭔가 수아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누가 훔쳐 갔다고? 니 물건을?”

“그런 것 같아. 문학책도 없어졌어.”

“어? 그건 동아리방에 있을 텐데. 기말고사 전날 니가 유일반 빌려줬었잖아.”

그 녀석이 필요 없다며 수아가 기껏 빌려준 문학책을 내팽개쳤던 게 떠오른 태영이 아차 싶었다.

“내가 잘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 이따 올라가서 가져올…….”

“아니야 내가 갈게.”

“응?”

“유일반한테 따로 긴히 할 얘기도 있고. 이따 점심시간에 내가 옥상에 직접 가 본다고. 그래도 되지?”

“당연하지. 근데 그런 걸 왜 나한테 허락받아?”

“지금은 니가 유일반 여친이잖아.”

지금은? 그 말은 앞으론 아니게 될 거라는 건가? 앞으로 유일반 여친은 내가 아니라 수아 너라는 거야?

태영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이 길어지면 결국 지금의 유일반은 유일반이 아니라는 말까지 해야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근데 태영아, 요즘 유일반 무슨 일 있어?”

“왜?”

“다른 사람 같아서.”

“!”

태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써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노력해 봤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태영을 수아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쳐다봤다.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날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라서. 아무리 너랑 사귄다고 해도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 온 관계가 있는데, 요즘 유일반 걔 나한테 진짜 너무하는 것 같아. 혹시 니가 시켰어?”

“시키다니 뭘?”

“저번에 너 내가 유일반 좋아한다고 오해했잖아. 혹시 그 일 때문에 유일반한테 나랑 말도 섞지 말라고 니가 시킨 건 아닌가 해서.”

그냥 시켰다고 하는 게 나으려나? 안 그럼 갑자기 유일반이 이상해진 이유에 대해 납득시킬 만한 핑계가 없잖아. 잠시 고민하던 태영이 아무 말이나 막 내뱉었다.

“아마 요즘 대회 준비 때문에 좀 예민해서…….”

“대회 한두 번 나가는 것도 아니고.”

“…….”

“유일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맞나 보네. 됐어. 말 안 해도 돼. 안 궁금하니까.”

수아가 실망한 표정으로 태영을 쳐다보더니 돌연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말했다.

“나 수업 준비 해야 돼. 너도 빨리 자리로 돌아가.”

갑자기 커다란 벽이 수아와 저 사이에 놓이는 게 느껴진 태영은 앞이 컴컴했다.

* * *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내 가득 울려 퍼졌다. 동시에 동아리방에서 옥상 밖으로 튕기듯 빠져나온 이반은 분주했다.

태영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책상 위에 세팅하고 수저와 포크를 준비하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10분이나 흘렀다.

“왜 안 와?”

곧장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하다 조금 늦나 싶어서 난간에 기댄 채 기다리던 이반은 옥상 문이 열리자 한껏 표정이 밝아졌다가 곧 어두워졌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태영이 아닌 권수아였기 때문이다.

“니가 여긴 또 왜 왔어? 내가 저번에 경고했을 텐데. 다신 나 찾아오지 말라고.”

자신을 형인 줄 알고 매일같이 전화하고 틈만 나면 찾아오는 권수아를 이반이 노려봤다.

“넌 니 친구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어쨌든 유일반, 아니 나는 지금 모태영 남자 친구야.”

“그 전에 우린 친구였어. 니가 태영이랑 사귀면 나와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야?”

“넌 친구랑 키스도 하냐?”

“너…….”

“왜?”

“나쁜 새끼!”

무슨 일에선지 키스라는 단어를 들은 수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말이다.

이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권수아를 쳐다봤다.

“내가 나쁜 새끼면 넌 나쁜 년이지. 모태영 속이고 있잖아.”

“속인 적 없어.”

“너 유일반 좋아하잖아.”

“……아, 아니야! 난 너 안 좋아해!”

“상관없어. 니가 누굴 좋아하든. 근데 모태영은 건드리지 마.”

“너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그건 니가 더 잘 알 텐데?”

이반이 갑자기 동아리방에 들어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문학책을 들고 나와 수아의 품에 던지듯 안겼다. 문학책 사이에서 삐져나온 서류 한 장을 이반이 턱끝으로 가리켰다.

“!”

수아가 황급히 문학책을 몸 뒤로 숨겼다.

“너 이미 나한테 들켰어.”

“…….”

“그거 청소년 기자단 지원 서류던데. 너 모태영한테 무슨 자격지심 있냐? 너 의대 갈 거라며. 근데 웬 기자단?”

이반이 헛웃음을 치며 수아를 노려봤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짓은 하지 마.”

“그런 짓이라니.”

“너한텐 쉬울지 몰라도 모태영한텐 어렵게 생긴 꿈이자 미래야. 시작부터 진흙탕 만들지 말라고. 그 앤 아직까지 널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니가 뭘 알아? 나도 원래 꿈이 기자였어. 의대는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거라고!”

“그건 니 사정이고.”

“착한 척하지 마. 너야말로 태영이 이용하고 있잖아. 나한테 관심 끌려고 사귀는 척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사귀는 척이라…….”

원하는 건 뭐든 가져야 하는 형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만만해 보이는 그 애를 이용해 좋아하는 권수아를 자극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이반은 이제야 뭔가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형이 그 애랑 왜 사귀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 버린 것이다.

“내가 졌어. 졌다고. 그니까 제발 그만 좀 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수아를 별다른 타격감 없이 응시하던 이반은 급기야 하품까지 하며 옥상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수아는 기가 막혔다. 이렇게 제가 속상해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해 주던 유일반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사람이 앞에서 말을 하는데 지금 어딜 쳐다보는 거야?

옥상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반의 눈빛이 돌연 사납게 변했다.

“씨.”

작게 욕을 읊조리는 이반의 모습에 수아가 흠칫 놀랐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보니 운동장에 태영이 있었다.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태영은 송바위와 함께 있었다.

태영과 송바위가 나란히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발견한 이반이 미간을 확 구겼다.

“저게 진짜.”

“?”

갑자기 신경질을 내며 인상을 찌푸리는 이반을 수아는 어이없게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 이반은 저를 의심하는 수아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반은 그대로 인사도 없이 비상구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홀로 옥상에 남은 수아는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쟨 유일반이 아니야. 분명해. 유일반이 아니야…….”

어딘가 한 대 맞은 듯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수아는 잠시 후 옥상 밑을 내려다봤다. 송바위와 태영의 뒤를 미친 듯이 따라 달려가는 이반의 모습이 보였다.

* * *

“갑자기 무슨 일인데?”

급식실에서 줄 서 있다가 송바위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온 태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야! 송바위!”

태영이 제 팔목을 잡은 송바위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너 왜 이러냐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그 새끼들 잡았으니까.”

“그 새끼들? 누구?”

“너 학폭 가해자라고 허위 댓글 단 새끼들.”

아, 까먹고 있었다.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태영은 그동안 유일반의 쌍둥이 동생 유이반의 등장과 기말고사다 뭐다, 정신이 없어 자신이 사이버상에서 학폭 가해자로 몰린 일 따윈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아직도 쉬는 시간에나 이동 수업 때문에 복도를 지나갈 때면 동급생은 물론 선후배들도 수군거리며 태영을 손가락질했다. 그때마다 억울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기도 했고, 내가 아니라고 변명한들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넌 어떻게 알았어? 너도 내 영상 봤어? 악플 본 거야?”

“우리 또래 애들 중에 그 영상 안 본 애도 있냐? 내가 너 이래서 쑤쑨지 뭔지 송설원이 하는 너튜브도 촬영하지 말라고 한 거야. 유명해져 봤자 별 거지 같은 새끼들이 너에 대해 함부로 떠들잖아!”

“근데 악플러들은 어떻게 잡았는데?”

며칠 전부터 밤낮으로 아이디 추적해서 잡아냈다고, 까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송바위가 괜히 말을 돌렸다.

“알 거 없고. 따라와. 내가 어디 못 가게 가둬 놨으니까.”

“가…… 가둬? 야! 너 그런 짓 좀 하지 말라니까.”

중학교 때도 송바위는 태영을 위해 비슷한 사고를 쳐서 징계까지 먹고 대회 출전도 막힌 전적이 있었다. 태영은 또 그런 일이 발생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

“때린 건 아니지?”

“때릴 예정이긴 하지. 너한테 제대로 사과 안 하면. 어떡할래? 가서 사과받을래? 아님 그냥 내 멋대로 처벌해 줄까?”

“가. 가자, 가! 사과받으러 가자고.”

태영은 송바위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자신이 사과를 받고 끝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 송바위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모태영!”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에 태영과 송바위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녀석이 심장을 부여잡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로 달려온 녀석은 태영을 확 잡아당겨 제 뒤에 숨겼다. 그러곤 송바위를 노려봤다.

가쁜 호흡. 땀이 흥건한 녀석의 옆모습을 흘끔 올려다보던 태영은 똑똑히 보았다. 녀석의 눈빛이 정확히 송바위의 손목에 향해 있는 것을.

녀석은 송바위가 손목에 찬 빨간색 보호대를 보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너지? 내 로봇 망가뜨린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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