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46화 (47/67)

[46화]

“따라와.”

송바위가 태영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태영이 저를 무시하고 그냥 교실로 들어가려고 하자 송바위가 황급히 태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이반 얘기니까 따라오라고.”

“유, 유이반? 뭐야, 너 어떻게 알았어?”

“내가 말했잖아. 그 새끼 가짜라고.”

“그게 그 뜻이었어?”

마침 이동 수업 때문에 옆 교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태영은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서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을 어이없게 쳐다보던 송바위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태영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바위를 뒤따라갔다.

* * *

창문 너머로 뜨거운 햇살이 쏟아졌다.

두 달 전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벚꽃이 흩날리던 봄이었는데, 벌써 여름이라니.

창문 너머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반은 제가 살던 애리조나의 날씨를 떠올렸다.

사막 북부에 위치한 애리조나의 날씨만큼은 아니지만, 이곳 동아리방은 옥상에 위치해서 그런지 아니면 이 수많은 전자 기기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너무 더웠다.

‘내가 좋아하는 건 유일반이야.’

아니다. 열받아서 더운 건가?

이반은 어제 태영이 제게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라 짜증이 확 치밀었다.

그는 이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던졌다. 그러곤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애써 진정하려 노력했다.

사실 지금 그 애의 마음이 제게로 향했으면 하는 바람은 사치였다. 그에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정신 차리자.”

이반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작업에 열중했다.

타닥. 타다닥. 타닥. 탁. 탁.

정적을 채운 건 빠르고 강렬한 키보드 소리. 노트북의 까만 화면 위로 복잡한 수식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발생하는 에러.

“젠장!”

생각했던 결괏값이 나오지 않자 이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걸터앉은 채 로봇에 들어간 부품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왜 입력한 대로 로봇이 움직이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아 나선 것이다.

혹시 부품 안에 들어가는 실이 끊어진 걸까? 그래서 작동을 안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부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이반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에러의 원인을 찾아낸 것이다.

문제는 라이다 센서(레이저를 목표물에 비춰 사물까지의 거리, 방향, 속도, 온도, 물질 분포 및 농도 특성 등을 감지할 수 있는 기술)에 있었다.

“왜 업그레이드가 안 되어 있는 거지?”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부품이라며 몇 달 전 형이 제게 부탁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 분명 독일에 사는 친구를 통해 구해다 줬는데, 왜 부품이 교체가 안 되어 있냔 말인가. 내가 구해다 준 센서는 어디 있는 건데?

다시 동아리방 여기저기를 뒤져 보던 이반은 곧장 책상 위로 달려가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이건 자신의 핸드폰이 아닌 형 일반의 핸드폰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건 자신의 핸드폰이었다. 이반은 가방 속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핸드폰을 꺼내 곧장 전화를 걸었다.

“Störe ich dich gerade?(지금 통화 가능해?)”

언어 쪽으로도 타고난 재능이 있는 이반은 능숙한 독일어로 친구와 통화했다.

이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당장 친구에게 부탁해서 다시 센서를 구한다고 해도 최소 일주일은 넘게 걸릴 터였다. 일주일이면 엄청난 시간이었다. 그동안 손 놓고 아무것도 못 하고 있게 생긴 것이다.

일단 급한 대로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배송 요청을 한 뒤 전화를 끊은 이반은 다시 동아리방 서랍과 캐비닛을 열어 센서를 찾기 시작했다.

분명 어디 있을 텐데…….

대회 당일 어떤 미션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확도를 높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소프트웨어만큼 하드웨어도 매우 중요했다.

학생의 신분으론 구할 수 없는 값비싼 부품들 때문에 로봇 동아리는 외부의 지원 없이는 운영될 수 없는 구조였다. 그 막강한 지원을 명원 그룹에서 맡고 있었던 거다.

이반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운영비 때문에 이제껏 형이 로봇처럼 아버지가 조종하는 대로 살아야만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운영비를 계속 지원받으려면 이번 대회에서 꼭 우승해야 한다는 사실도.

“이건?”

부품 바구니에서 뭔가를 발견한 이반이 멈칫했다.

지난번 사고가 있던 다음 날 어수선한 동아리방에서 주웠던 빨간색 손목 보호대. 주인이 누군지 찾으려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보호대를 유심히 보던 이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쓰레기통 안에 던져 버린 후 동아리방을 나와 버렸다.

어제부터 내내 갇혀 있던 동아리방에서 겨우 탈출한 이반은 기지개를 켰다. 후텁지근한 열기 때문에 숨이 턱 막혔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그나마 살 만했다.

그렇게 난간에 기대 한껏 조여 있던 숨통을 살짝 풀려고 했는데.

“!”

무심코 내려다본 아래, 수돗가 옆 벤치에서 이반의 시선이 멈춰 버렸다.

그곳엔 다름 아닌 태영이 웬 남학생과 함께, 것도 단둘이! 딱 붙은 채 서 있었다.

“돌멩이?”

그 남학생의 정체가 바위인 것을 알아차린 이반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 * *

“야! 송바위!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바위를 따라 수돗가 옆 벤치까지 온 태영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더워 죽겠다고 투덜거렸다.

“그만 가라고!”

급기야 태영은 계속 직진 또 직진하는 바위의 하복 셔츠 자락을 덥석 잡았다. 멈춰 선 바위가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 그럼 나 여기서 말해도 돼?”

“무슨 말?”

“유일반 가짜인 거. 유일반한테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거.”

“야! 작게 좀 말해. 아니다, 너 따라와!”

태영이 황급히 주변 눈치를 살폈다. 행여 누가 들었을까 봐 걱정하며 송바위의 손목을 잡아끌고 저 멀리 후문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후문 담벼락까지 송바위를 끌고 온 태영은 뒤늦게 송바위의 성난 얼굴을 확인했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건데?”

“앗, 미안.”

태영이 서둘러 바위의 손목을 놓아주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깨닫곤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넌 어떻게 안 거야?”

“뭘?”

“쌍둥이 말이야. 바뀐 거. 언제부터 안 거냐고. 아니, 어떻게 알았냐니까. 아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 혹시 다른 애들한텐 얘기 안 했지?”

“지금 그 새끼 걱정 하냐?”

“걱정이 아니라…….”

“아니면 뭔데? 정신 차려. 너 속인 새끼 뭐가 예쁘다고 감싸고도냐? 병신같이.”

“뷰, 뷰우웅신? 야! 너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어?”

“너 하는 짓 보면 예쁜 말이 나올 수가 없거든?”

“아놔.”

비협조적인 송바위의 태도에 태영은 혈압이 상승했다. 이대로 그냥 교실로 돌아가려던 태영은 참고 또 참았다. 송바위에게 부탁할 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야, 송바위. 내가 진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하자.”

“싫어.”

“야!”

결국 태영이 폭발하고 말았다.

“아놔.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 니가 먼저 내가 어울리지 말라는 애들이랑 사고 치고 돌아다녀서 아줌마 속 썩이고 그랬잖아! 그리고 니가 먼저 나 손절했잖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씩씩거리는 태영을 송바위가 짐짓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뭘 봐!”

“그러다 한 대 치겠다?”

“한 대뿐이야? 너 진짜 나한테 처맞고 싶냐? 내 다리 아직 쓸 만하거든?”

다리를 쫙쫙 찢으며 스트레칭 동작을 하는 태영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송바위가 어이없게 쳐다봤다.

“오버하지 마.”

“큼. 암튼 너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지?”

“걱정 마. 유일반 쌍둥이 동생이 지금 유일반인 척 학교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 아직까진 너랑 나밖에 모르니까.”

“그니까 넌 그걸 어떻게 알았냐니까?”

태영이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송바위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태영의 손에 쥐여 줬다.

“그 새끼더러 물건 간수 잘하라 그래.”

송바위가 건네준 지갑을 펼친 태영이 화들짝 놀랐다.

“이, 이게 뭐야? 외국인 등록증?”

유일반이 아니라 유이반이라는 이름이 영문으로 떡하니 적힌 카드를 본 태영은 이걸 왜 니가 가지고 있냐는 눈빛으로 송바위를 쳐다봤다.

“훔친 거 아니야. 주운 거지.”

“누가 뭐래? 어디서 주웠는데?”

“알 거 없어.”

“암튼 고마워. 이건 내가 유일반…… 아니 걔한테 전해 줄게. 그리고 다시 한번 부탁할게. 이거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줘.”

“얘기 안 해.”

“고마…….”

“대신 너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뭐든 들어줄게!”

태영이 다부진 눈빛으로 외쳤다. 그 순간 송바위가 태영에게 줬던 지갑을 도로 뺏어 갔다. 그러곤 지갑을 들고는 말했다.

“이 지갑 돌려줄 핑계로 그 새끼 만날 생각 하고 있다면 집어치워.”

“뭐?”

“이건 내가 돌려줄게. 그니까 넌 지금 이 시간부터 그 새끼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태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송바위 이 녀석은 왜 그토록 유일반을 싫어하는지. 아니 대체 무슨 이유에서 이젠 유일반 쌍둥이까지 경계하는 건지.

“그 전에 나 뭐 하나만 물어볼게. 전부터 느낀 건데 넌 왜 그렇게 유일반을 싫어해?”

“몰라서 물어?”

“어. 모르니까 묻지.”

“유일반 그 새끼 권수아랑 키스하는 거 내가 봤다니까?”

“어쨌든 그 일은 유일반이랑 내가 사귀기 전에 있었던 일이잖아.”

“상관없다는 거야?”

“완전 상관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거고, 근데 지금 유일반은 그 유일반이 아니라…….”

“그건 더 극혐이지. 유일반 그 새끼는 너 가지고 놀았고, 그 새끼 쌍둥이라는 놈은 유일반인 척하면서 널 속였어! 넌 화도 안 나?”

듣다 보니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태영이 무감각한 얼굴로 송바위를 쳐다봤다.

“화를 내도 내가 내. 근데 그 두 사람이 너한테 피해 준 건 없잖아.”

“없긴 왜 없어? 니가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는데! 빡쳐서 미쳐 버리겠는데!”

마치 자기 일처럼 저 대신 화를 내 주는 송바위의 모습에 태영은 순간 감동이 밀려왔다.

“그 눈빛은 뭐냐?”

감격에 겨운 태영의 눈빛을 마주한 송바위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예상대로 태영은 아예 두 손까지 모은 채 송바위를 애틋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바위야 너 혹시 지금 내 걱정 해 주는 거야?”

“꺼…… 꺼져!”

고운 말 알레르기라도 있는 사람처럼 송바위가 발작했다.

* * *

한편, 태영과 송바위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골목 모퉁이 끝에 치맛자락이 살짝 보였다 사라졌다.

벽 뒤에 숨은 누군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교복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노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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