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다음 날 아침.
오늘도 1교시는 물리였다. 덕분에 조례가 끝나자마자 반 아이들의 손이 바빠졌다. 기말고사에서 틀린 문제를 무려 다섯 번씩이나 써 오라는 물리 선생의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2반에서 가장 손이 바쁜 사람은 문제를 제일 많이 틀린 모태영이었다.
“모탱!”
“아, 왜. 나 바빠.”
“으이구. 그러게 미리 좀 하지. 야, 어차피 지금부터 써 봤자 늦었어. 포기해.”
“아니야. 아직 안 늦었어.”
태영이 볼펜을 꽉 잡고 시험 문제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험은 무시 못 한다더니 무슨 신들린 사람처럼 미친 속도로 필기하는 태영을 해니가 벙찐 얼굴로 쳐다봤다.
“최니, 넌 다 썼음?”
말하면서 쓰는 여유 보소. 고난도 스킬을 선보이는 태영을 향해 해니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러곤 제 노트를 보여 주며 자랑을 시작했다.
“난 우리 유권이가 다 써 줬지롱.”
태영은 해니가 내민 노트를 흘끔 쳐다보더니 다시 필기에 집중했다. 하나도 안 부럽다. 안 부럽다. 속으로 되뇌면서 말이다.
“너도 니 남친한테 좀 도와 달라고 하지. 어차피 유일반은 물리 만점이라 숙제 없을 거 아니야. 아, 어제 어떻게 됐어? 화해했어?”
화해는커녕…….
태영은 어제 녀석에게 ‘내가 좋아하는 건 유일반이야.’라고 말했다가 동아리방에서 쫓겨난 일을 회상했다. 날 쫓아내며 녀석이 뭐라고 했더라?
‘다시 생각해. 니가 좋아하는 건 유일반이 아니야.’
뭐야. 내가 맞다는데 왜 지가 아니래?
태영은 씩씩거리며 마침내 마지막 문제를 다 적어 갈 때쯤.
“그나저나 모탱, 우리가 유일반 위로 파티 같은 거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위로?”
“이따 시험 점수 나온다잖아. 오늘이 아마 난생처음으로 유일반이 1등 놓치는 날일걸?”
“그게 무슨 말이야?”
펜질을 멈춘 태영이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해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해니가 대답했다.
“수아 걔 물리에서 하나, 문학에서 하나, 그렇게 고작 두 개 틀렸대.”
“헐. 전 과목에서 두 개? 대박이다. 근데 수아가 웬일로 문학에서 하날 틀렸대? 맨날 100점이었잖아.”
“이번 문학 개어려웠대. 수아가 하나 틀렸음 유일반은 그 이상 틀렸겠지. 유일반이 제일 약한 과목이 문학이잖아.”
“그렇다면 이번 1등은…….”
수아로 결정된 분위기였다. 하지만 태영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지금의 유일반은 유일반이 아니니까.
그 녀석 내가 공부하는 꼴을 못 봤는데 꼴찌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나저나 성적 나오면 큰일 났네. 이러다 그 녀석이 유일반 아닌 거 다 들통나는 거 아니야?
천하의 유일반이 꼴찌가 웬 말이냐고.
이 사실을 병원에 누워 있는 유일반이 알면 정말 황당하겠네. 나중에 돌아오면 놀라 자빠지겠어. 아니, 돌아올 수는 있는 걸까?
천만다행으로 유일반이 멀쩡히 돌아오면 유일반 행세를 하고 있던 그 녀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겠지?
녀석이 있던 곳은 어딜까? 그 녀석은 대체 누굴까?
그 녀석이 어디서 어떻게 뭘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태영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태영이 녀석을 향한 궁금증을 키워 가던 그때였다.
쾅.
갑자기 교실 문이 열렸다.
“대박 뉴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호들갑을 떨며 교실 안으로 들어온 주유권에게로 향했다.
관종 주유권은 그게 또 짜릿했는지, 신났는지 아주 큰 소리로 외쳤다.
“이번 기말고사 유일반 올백이래! 게다가 올백은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랜다!”
매번 문학에서 한 개 이상 틀려 올백을 놓쳤던 유일반이 전 과목 만점이라는 소식에 반 아이들이 ‘역시 유일반이네.’, ‘드디어 유일반이 올백을 맞았군.’ 그러려니 하는 가운데 태영만 혼자 믿기지 않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교과서 들여다보는 꼴을 내가 본 적이 없는데 웬 올백?
뭐야. 얼굴만 판박이가 아니라 뇌 주름 개수까지 똑같은 거야?
근데 그놈의 성격은 왜 그렇게 다른데?
태영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유일반이 부드럽고 달달한 설레임 같은 성격이라면 그 녀석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딱딱한 죠스바였다. 그 정도로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근데 왜 머리 좋은 건 닮은 거냐고. 갑자기 확 거리감 느껴지게. 그나마 유일반과 달리 그 녀석이 저처럼 공부하는 거 싫어해서 되게 친근감 있고 좋았는데…….
“모탱, 우리 매점 갈 건데 너 뭐 사다 줄까?”
“난 암거나.”
“그래 그럼 너 좋아하는 죠스바 사다 줄게.”
“땡큐. 아, 돈 줄게!”
태영이 책상 안에서 지갑을 급히 꺼냈다. 그러다 메모장 하나를 떨어뜨렸는데.
“이게 뭐야?”
태영이 떨어뜨린 메모장을 해니가 주웠다. 그러곤 펼쳐진 메모지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뭘 이렇게 많이 적은 거야? 종이가 너덜너덜하잖아.”
“아, 암것도 아니야.”
태영이 황급히 해니에게서 메모장을 뺏어 뒤로 숨겼다. 하지만 그 바람에 너덜너덜하던 종이가 결국 찢어졌고, 찢긴 종이 한 장이 나풀대며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
종이 한 장 가득 빼곡하게 적힌 숫자 2를 내려다보는 해니와 유권 커플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영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 * *
“말도 안 돼…….”
해니랑 주유권이 매점으로 향하자마자 다시 메모장을 들여다본 태영은 현타가 밀려왔다.
오빠 말대로 딱 이틀 적었을 뿐이었다.
1은 유일반, 2는 유이반이라는 나만의 룰을 만들어 메모를 했는데 결과는…….
“으으, 미쳤어.”
다음 페이지도, 그리고 또 다음 페이지도, 수십 장의 페이지에 숫자 2가 수두룩했다.
문제의 메모장을 어이없게 쳐다보던 태영은 환장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모태혁 그 인간의 이론대로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1이 아니라 2라는 거잖아.
유일반이 아니라, 유일반 쌍둥이 동생을 내가?
아니야. 아니라고. 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유일반을 좋아한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좋아했던 건 유일반인데…….
도대체 왜,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다는 유일반보다 그 녀석이 급식도 안 먹고 동아리방에 처박혀 있는 게 더 걱정되는 걸까?
시험 점수 못 받아서 유일반 아닌 거 들통나면 그 녀석이 곤란해지는 건 아닌지, 그게 더 걱정됐던 이유는 뭘까?
아오, 몰라. 그나저나 괜히 걱정했잖아. 전 과목 만점이라니. 올백이라니. 또 1등이라니.
유일반 어머니는 대체 태교로 무얼 듣고 무얼 드셨는지 쌍둥이가 둘 다 우월한 미모에 넘사벽 지능까지, 무슨 슈퍼 유전자야?
“야야, 권수아 왔다.”
갑자기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수아가 왔다는 소리에 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자습실에 갔던 수아가 1교시를 앞두고 교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자 오필희를 중심으로 스터디 멤버들이 우르르 수아에게로 몰려갔다.
“수아야 너 괜찮아?”
“뭐가?”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며 수아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필희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머, 아직 모르나 보네. 기말 점수 나왔대.”
“근데?”
“이번에도 유일반이…….”
“알아.”
“그래? 알고 있었어? 난 니가 모르고 있다가 실망할까 봐 미리 말해 주려고 했는데 다행이다. 힘내. 2학기 땐 더 열심히 해 보자.”
저것들이 사람 놀리나? 말투가 왜 저래? 보다 못한 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수아에게로 향했다.
“필희야, 좀 비켜 줄래?”
“어?”
“나 수아랑 매점 좀 가려고.”
“아, 응.”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오필희가 스터디 애들이랑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태영의 험담.
“재수 없어. 지가 뭔데 비키래?”
“니가 참아. 쟤 학폭 가해자래. 너도 맞으면 어떡해.”
아오, 저것들이!
마치 들으라는 듯 크게 수군거리는 오필희 패거리를 태영이 째려봤다.
“야! 나 누구 때린 적 없거든? 니가 봤어? 봤냐구!”
“태영아, 그만해. 그만하고 매점이나 가자.”
태영이 버럭 소릴 지르자 수아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중재에 나섰다.
겨우 태영을 끌고 복도로 나온 수아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뭐 하러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반응해? 그러면 너만 손해야.”
태영은 지난번 학교장 추천서를 받아 내지 못해 혼자 상심하고 있을 때 우연히 복도에서 듣게 된 얘기들이 떠올랐다.
‘모태영 걔 중학교 때 완전 양아치였대.’
‘송바위랑 절친이었다잖아. 그럼 말 다 했지 뭐.’
‘태영이 그런 애 아니야. 착하고 좋은 애야. 너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어? 계속 그딴 소리 하면 나 너희랑 스터디 안 해.’
오필희 패거리에게 뭐라고 하며 제 편을 들어 주던 수아. 태영은 수아를 믿기로 했다.
수아가 남몰래 제가 필요한 학교장 추천서를 뺏어 갔어도.
유일반과 키스까지 할 정도의 사이였으면서 유일반을 싫어한다고 거짓말을 했더라도.
“이유가 있을 거야. 그치?”
“어?”
“아니야, 아무것도……. 매점 가자.”
태영이 말을 아끼며 매점을 향해 앞장섰다. 그런 태영을 수아가 붙잡았다.
“왜?”
“아까 오필희가 하려는 말이 뭐였어?”
“무슨 말?”
“이번에도 유일반이…….”
“?”
“나 사실 몰라. 아는 척한 거였어. 근데 뉘앙스가 꼭 유일반이 이번에도 또 1등을 했다, 뭐 그런 얘기 같던데……. 왜? 나 이번에 두 개밖에 안 틀렸는데. 게다가 이번 문학 시험은 너무 어려워서…….”
“저기, 수아야.”
“사실대로 얘기해 줘. 어차피 나 교무실 가서 확인할 거니까. 그 전에 니가 미리 얘기해 주라.”
“올백이래.”
태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수아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문학도? 유일반이 문학을 만점 받았다고? 말도 안 돼…….”
태영은 수아가 왜 이렇게까지 놀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본인이 1등을 놓친 데 대한 의구심이 아니었다. 마치 수아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예상치도 못한 수아의 반응에 태영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지금 유일반이 그 유일반이 아니라고 말하면 수아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려던 찰나.
“태영아, 미안한데 매점은 혼자 가야 할 것 같아. 난 교무실 좀 가 봐야겠어.”
그렇게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수아는 교무실 쪽으로 냅다 달려갔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수아 쟤 진짜 유일반 좋아하는 거 맞아? 좋아하는 남자애가 키스까지 한 남자애가 올백 맞았는데 저렇게 반응한다고?
대체 뭐야?
태영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런 태영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