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적다니 뭘? 뭘 적어?”
“걘지 걔 쌍둥인지 둘 중 아무나 떠오를 때마다 이름을 적으라고. 길게도 말고 딱 이틀만 해 봐. 그리고 봐 봐. 누구 이름이 더 많이 적혀 있는지.”
태혁의 말을 들은 태영의 표정이 사뭇 비장해졌다.
* * *
“망했다.”
이틀 전 기말고사를 끝낸 태영은 모든 과목의 채점을 마친 후 책상 위에 푹 늘어졌다. 그런 태영을 옆에서 지켜보던 해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탱, 니가 언젠 안 망한 날이 있었어?”
“억울해. 이번엔 진짜 공부 열심히 하려고 했단 말야! 아오, 이게 다 그 녀석 때문이야!”
“그 녀석? 누구? 유일반? 너네 또 싸웠냐?”
“몰라.”
시험 기간 내내 머릿속은 온통 유일반 아니, 그러니까 유일반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그 녀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덕분에 이번에도 꼴찌는 떼어 놓은 당상.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처음 치른 시험에서 또 꼴찌라니. 태영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쿵.
그렇게 태영은 머리를 박으며 자책하다 돌연 그 녀석을 향해 원망의 화살을 겨누기 시작했다.
아니지. 난 아무 잘못 없어. 이건 다 그 녀석 때문이야.
‘내 이름은 유이반. 유일반은 내 쌍둥이 형.’
시험을 앞둔 며칠 전, 녀석이 옥상에서 했던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태영은 너무 기가 막혀서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넋이 나가 버린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녀석은 뻔뻔하게 유일반인 척 굴며 학교를 나왔다는 것이다.
유일반의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고, 시험을 봤고,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동아리방에서 대회 준비를 했다.
이 명원고에선 녀석이 유일반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냥 평소보다 유독 말이 짧아지고, 인사성은 개나 줘 버리고, 급식실 구석탱이에서 아싸처럼 혼밥을 즐겨 하게 된 이유를 그저 대회 준비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러려니, 무슨 사정이 있겠지, 유일반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지?”
“속여? 누가? 누굴?”
태영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도 모른 채 20점짜리 물리 시험지를 구겨 버렸다.
“모탱!”
“어?”
옆에서 저를 부르는 해니의 목소리를 뒤늦게 들은 태영이 대답했다.
“왜왜?”
“속였다며. 누가 뭘 속였는데?”
“내가 그랬어? 아니야. 암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무슨 일 있지? 혹시 유일반이랑 헤어졌어? 차였어? 아님 찬 거야?”
“둘 다 아니야.”
그 녀석은 유일반이 아니니까. 유일반은 지금 없으니까 내가 차일 일도, 내가 찰 일도 없는 거다. 나와 유일반의 관계는 우리가 사귄 지 1일째 되던 날, 그날 멈춘 거야.
“둘 다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 설명하자면 길어. 암튼 이제 걔 볼 일 없어.”
내가 사귀기로 한 건 유일반이지 유일반의 동생은 아니잖아.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유일반이 빨리 쾌유해서 학교로 돌아오는 것뿐!
이제부터 그 녀석이 학교에서 뭘 하든 말든 절대 상관하지 말자.
교무실 찾다가 교장실을 가든 말든, 급식을 혼자 먹든 말든, 전교생이 유일반 싸가지 없어졌다고 수군거리든 말든.
난 이제부터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모탱, 너 진짜 너무해. 걔 지금 기억 상실증이라며. 사람 힘들 때 차는 거 아니랬는데…….”
갑자기 해니의 비난 섞인 눈초리가 날아들자 태영은 뜨끔했다. 하지만 너무 억울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속인 건 그 녀석인데 왜 나만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하는 거냐고.
“생각해 보니까 그 녀석 미안하다고도 안 했어.”
“그럴 정신이 어딨겠어. 기억도 다 날아갔는데 이런 와중에 세계 대회 미션까지 떴으니.”
“뭐? 미션? 언제?”
“기말고사 바로 전날.”
망했다. 미션이 나왔다는 건 정말 대회가 코앞이라는 건데.
게다가 그 미션이라는 거,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영재들도 소화하기 힘든 영역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작년에 유일반이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을 때 명원시는 물론 대한민국이 다 떠들썩했던 거고.
진짜 유일반도 없는 지금 그 녀석이 그 어려운 미션을 대신 수행할 수 있을까? 그럴 능력이 있는 걸까?
이러다 우승 놓치고, 어머니가 창설했다는 동아리 프리무스도 없어지게 되면 그 녀석 성격에 혼자 자책하고 땅굴 파고 들어가서 안 나오려고 할 게 뻔한데, 어쩌면 좋지? 큰일 났네. 내가 뭐라도 도와야……. 아니지!
아오! 내가 또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제발 신경 좀 끄자.
“유일반 걔 지금 장난 아니래.”
태영의 속도 모르고 해니가 계속 유일반 얘기를 늘어놓았다.
“우리 유권이 말로는 유일반 지금 거의 반시체라던데? 기말고사 보랴, 대회 준비하랴, 지금도 동아리방에 처박혀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러고 있대.”
아까 급식실에서도 보이질 않더니 그 이유 때문인 건가?
태영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스쳤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옆에서 지켜보던 해니가 혀를 내찼다.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매점에서 빵이나 하나 사 들고 동아리방에 가 봐.”
“내가 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전혀 관심 없는 척하며 태영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곤 괜히 교과서를 펴고 들여다봤다.
교과서를 거꾸로 든 사실도 모르고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태영을 해니가 안타깝게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옥상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서 있던 태영은 갈등했다.
“몰라. 이것만 놓고 그냥 가자.”
매점에서 사 온 소시지 다발을 문 앞에 내려놓고 그냥 가려던 태영의 발걸음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갈까 말까 망설이던 태영은 결국 소시지를 도로 품에 안고 옥상으로 나갔다.
다신 이곳에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오고야 말았다.
태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동아리방 앞에 섰다. 웬일로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녀석이 너무 바쁜 나머지 문 닫는 것도 까먹은 모양이다.
대체 점심도 안 먹고 녀석이 어쩌고 있나 궁금했던 태영이 슬그머니 안을 들여다봤다.
노트북 앞에서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녀석의 옆모습이 보였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살 때문일까? 녀석의 자태가 눈이 부셨다.
타닥. 타다닥. 탁. 탁.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는 녀석의 기다란 손가락과 핏줄 솟은 두꺼운 팔뚝,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리는지 살짝 찌푸려진 눈썹,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으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
저도 모르게 입까지 벌리고 녀석의 숨 막히는 자태를 감상하던 태영이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녀석과 두 눈이 딱 마주친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품에 안고 있던 소시지를 다 쏟고 만 태영의 얼굴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하필 소시지는 데구루루 굴러 동아리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녀석의 발밑에 하나, 둘, 셋…… 차례대로 도착하고 있었다.
녀석이 허리를 숙여 소시지를 줍더니 태영을 바라봤다.
“주려면 곱게 주든가.”
“너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거든?”
“아니라고? 누가 봐도 나 주려고 다발로 사 온 건데?”
“아니라고!”
태영이 허둥지둥 바닥에 굴러다니는 소시지를 줍기 시작했다. 그러곤 녀석이 들고 있던 소시지도 마저 뺏어 버렸다.
“나 먹으려고 산 거야.”
“그래, 너 많이 먹어라. 난 아직 한 끼도 못 먹었는데.”
며칠 사이 얼굴이 반쪽이 된 녀석을 마주한 태영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니까 왜 급식 먹으러 안 왔어?”
“점심시간인지 몰랐어.”
“대체 뭐 하다가?”
태영은 아까부터 내심 궁금했다. 대체 녀석이 노트북으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이게 뭐야?”
까만 바탕에 하얀 폰트. 난생처음 보는 수식들이 화면 가득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핸드폰 줘 봐.”
“내 핸드폰? 왜?”
“이게 뭔지 알려 주려고.”
녀석의 말에 태영이 냉큼 제 핸드폰을 넘겼다. 그러자 녀석이 핸드폰을 몇 번 만지더니 도로 내밀었다. 핸드폰을 받아 액정을 들여다본 태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소화기 찾아 주는 어플이네?”
“어플 이름은 요기소화기.”
“진짜?”
태영은 어플 메인에 떡하니 박힌 ‘요기소화기’를 보더니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내가 저번에 소풍 갔을 때 지어 준 이름이잖아. 설마 이 어플 니가 만든 거야?”
“어.”
“헐…… 이걸 어떻게 만들었어?”
“설명하면 알아들을 자신은 있고?”
“없지. 우와, 대박…….”
감탄사를 연발하며 태영은 어플 탐방에 나섰다.
이 어플은 소화기 위치뿐만 아니라 현재 위치에서부터 비상구까지의 거리, 플래시, 경보음까지 다방면으로 두루 갖춘 화재 시 필수 어플이었다.
만약 로봇 박물관 근처에서 불이 났을 때 이 어플이 있었다면 내가 소화기를 찾으러 그렇게 뛰어다니지 않았을 거고,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불을 껐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도 비상구를 찾느라 덜 우왕좌왕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태영은 새삼 녀석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이런 어플도 뚝딱 만드는 거 보니, 너도 이쪽 전공이야?”
“이쪽? 어느 쪽?”
“유일반처럼 로봇도 개발하고 뭐 그런 쪽.”
“말했잖아. 난 이런 로봇엔 관심 없다고.”
녀석이 쓰러져 있는 로봇을 턱끝으로 가리키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영은 이제야 깨달았다.
‘난 딱히 로봇엔 관심 없거든.’
‘지겹다고. 그놈의 로봇.’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땐 그저 녀석이 망가진 로봇을 수리하느라 아주 로봇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나 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왜 몰랐을까? 이렇게나 다른데.”
자책하는 태영을 향해 녀석이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다른데?”
“로봇을 바라보는 눈빛 말이야. 유일반은 애정이 넘쳤어. 근데 넌 애증이 가득해.”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녀석은 태영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넌 어느 쪽이 더 좋은데?”
“…….”
“애정이야, 애증이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태영이 대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유일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