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뭐어? 현실성? 야!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쌍둥이라고!”
태영은 분노했다. 지금껏 저를 속인 유일반 아니, 쌍둥이 동생 유이반이라는 놈에게.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침착했다.
“형이랑 사귄 지 하루밖에 안 됐다는 여자애한테 무슨 말을 해? 형이 지금 코마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어서 쌍둥이 동생인 내가 대타로 학교에 왔다고?”
“그래. 그렇게라도 말을 했어야……. 잠깐, 유일반이 지금 코마 상태라고? 왜?”
태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이반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그날 밤에 사고가 있었다고 했잖아.”
“그날 밤이면…… 로봇 망가진 날?”
“누가 로봇도 형도 망가뜨리고 도망갔어. 처음엔 그 새끼 잡으려고 유일반인 척 학교에 왔는데…….”
널 만나면서 학교에 오는 이유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반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학교에 오니까 형 대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거지. 학생회 대표, 학급 대표, 체육 대회 준비까지. 게다가 세계 대회도 코앞이야. 근데 로봇은 망가졌어. 미치는 거지.”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네……라고 할 줄 알았냐? 야! 아무리 그래도 나한텐 말을 했어야지. 니가 유일반이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지. 난 그것도 모르고…… 너, 널…….”
“나도 너 좋아해.”
“난 너 좋아한다고 한 적 없거든?”
“있을걸.”
있었나?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태영은 녀석에게 말렸다는 것을 깨닫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아오, 귀 아파. 왜 소릴 질러?”
“아니라고. 난 니가 아니라 유일반을 좋아하는 거야. 난 너 몰라. 유이반이라는 이름은 오늘 처음 들었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넌 모르는 사람이랑 키스하냐?”
“그, 그것도 니가 유일반인 줄 알고 한 거잖아. 게다가 그건 키스가 아니라 도와주려고 어쩔 수 없이…….”
녀석이 뚱한 얼굴로 태영을 노려봤다.
“뭐, 뭘 봐? 그나저나 넌 왜 이렇게 태연해? 너희 형, 그러니까 유일반 지금 코마 상태라며.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영영 못 깨어나면…….”
“그럴 일은 없어.”
“왜 그렇게 장담해?”
“우리 닥터가 아주 유능하거든. 3개월밖에 못 산다는 사람도 3년 넘게 살게 만들어. 그 인간 아주 무서운 인간이야.”
“그래? 그럼 다행인데…… 병문안이라도 가야 할까? 내 목소리 들으면 깨어날 수도 있잖아.”
“고작 하루 사귄 여자애 목소리에 깨어날 거였음, 유일반이랑 키스까지 했다는 권수아 목소리를 녹음해 갔겠지.”
“뭐?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와, 열받아. 이렇게 다른데 왜 몰랐을까? 넌 진짜 나쁜 놈이야!”
아까까지만 해도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 하던 태영이 평소와 다름없이 생동감 있게 반응하자 이반은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제 좀 살아났네.”
“?”
“유일반 걱정은 하지 마. 내가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내가 여자 친구고, 난 유일반을 좋아하는데…….”
“착각하지 마. 넌 날 좋아하는 거야. 형은 계속 니 옆에 없었어. 니 옆에 있었던 건 나야.”
“아니야. 그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러니까 난 니가 유일반인 줄 알고 좋아한 거라니까. 그니까 내가 좋아하는 건 유일반이잖아. 잉? 이게 무슨 소리지?”
“너도 말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천천히 생각해 봐.”
“…….”
“니가 좋아한 유일반은 유일반이 아니고 나야. 그니까 넌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오케이?”
“오케이는 개뿔!”
태영이 갑자기 머리 아파 죽겠다는 듯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더니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반을 쳐다봤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라고?”
“응.”
이반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영은 아니었다.
“니가 유일반이 아니고 쌍둥이 동생이라고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난 널 좋아하지 않았을 거야.”
“어째서?”
“내가 유일반이랑 고작 하루를 만났든 30분을 만났든 어쨌든 사귀기로 약속한 사이니까. 그런 내가 널 좋아하면 나야말로 양다리잖아.”
“…….”
생각지도 못한 태영의 말에 이반의 표정이 굳어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상처받은 건가? 말이 너무 심했나?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으, 몰라! 나 모르겠어. 생각할 시간을 좀 줘. 나 먼저 간다!”
결국 그렇게 태영은 도망치고 말았다.
멀어져 가는 태영의 뒷모습을 이반이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명목도 없었고, 그럴싸한 명분도 없었다. 태영의 말이 전부 다 맞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처음부터 솔직하게 다 말할걸.
나는 유일반이 아니라고.
하지만 조금은 억울했다. 난 저 애 앞에서 노력하지 않았다.
너에게 형처럼 보이고 싶어서, 형처럼 행동하고, 형처럼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 더 그랬다. 니가 먼저 내가 누군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 애는 벌써 저 멀리 교문 밖을 벗어나고 있었다.
옥상 밑을 내려다보던 이반은 지금 태영을 붙잡지 않으면 더 늦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갑자기 뻐근하던 심장에 엄청난 통증이 찾아왔다.
“윽!”
급기야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이반은 주저앉고 말았다. 하루 종일 빛을 받아 뜨거운 시멘트 바닥 위를 짚은 손은 점점 더 힘을 잃었고.
그때였다.
후두둑. 후두둑.
타는 듯 빨갛게 익은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우비였다.
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비를 맞는 이반의 커다란 뒷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 * *
태영의 오빠 태혁은 지금 무지하게 심각했다. 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태영의 방을 들여다봤다.
“저 시끼, 무섭게 왜 저러지?”
10년 넘게 인테리어 용도로만 쓰이던 책상에 앉아 모태영이 또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 동생의 작은 뒷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도 태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기자 된다더니 요새 꽤 열심이네?”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어선지, 무슨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건지, 요새 태영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책상 앞을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열심히 무언가를 필기하고 있는 태영의 뒷모습을 태혁이 신기하게 쳐다보며 슬며시 다가갔다.
“모탱, 모르는 거 있으면 이 오빠한테 물어봐. 혼자 끙끙대지 말고.”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태영이 고개를 휙 돌렸다. 며칠 사이 야윈 동생의 얼굴을 보고 태혁은 식겁했다.
“인마, 너 어디 아프냐?”
“응!”
태영이 울먹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태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나 머리가 너무 아파. 깨질 것 같아.”
“뭐?”
“그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둘이 언제부터 바뀐 거냐구우. 아니야. 그날 나랑 사귀기로 하고 다음 날부터 바뀐 건 맞아. 근데 그럼 난 누굴 좋아한 거지?”
“뭐래. 오늘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얘기냐?”
태혁이 인상을 확 찡그리며 태영이 열심히 필기하던 노트를 흘끔 쳐다봤다.
1일, 기억 상실증, 싸가지, 박력, 키스, 좋아졌는데, 쌍둥이라고, 누굴좋아하는거임?
따위의 낙서가 마구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낙서인지 알 리 없는 태혁은 어이가 없었다.
“너 드라마 작가로 진로 바꿨냐? 기자 안 해?”
저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태혁을 째려보던 태영이 얼른 노트를 숨겼다.
“웬일로 니가 공부를 다 하나 했다. 또 쓸데없는 짓 하고 있었구만. 인마, 너 내일모레 기말고사라며. 얼른 책 꺼내 이 새꺄.”
태혁이 혀를 내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공부하는 걸 싫어하는지.
“공부할 거거든? 할 건데, 내가 진짜 답답해서 그래. 이걸 먼저 풀어야 공부가 될 것 같단 말이야.”
“뭔데? 대체 뭘 푸는데?”
태영은 이 인간한테 말을 해? 말아? 고민하다가 너무 답답해 죽겠는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빠, 잘 들어 봐. 내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장난치지 말고 진짜 진지하게 대답해야 돼.”
“암요. 인생까지 걸렸다는데 장난치면 안 되죠.”
비꼬는 말투에 빈정이 확 상한 태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를 본 태혁이 얼른 저자세가 됐다. 겉으론 아닌 척해도 동생이 왜 이러는지 꽤 궁금했기 때문이다.
“들을 준비 됨. 말해.”
“내 친구 얘긴데.”
“흠.”
“진짜야. 진짜 내 친구 얘긴데. 걔가 어떤 남자애를 좋아하게 됐거든.”
“근데?”
“근데 난 걔가 걔라서 좋아한 건데 걔가 걔가 아니래.”
“뭐?”
“걔가 자긴 걔가 아니고, 걔 쌍둥이 동생이라고 했다니까!”
“그래서? 오, 이거 겁나 재밌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야, 너 진로 바꿔라. 이 드라마 재밌네.”
시청자 모드로 완벽하게 전환된 태혁이 끼고 있던 팔짱까지 풀고 태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 딴엔 엄청난 고민인데 오빠란 작자는 아주 신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꼴을 보자니 태영은 열이 뻗쳤지만, 꾹 참고 말을 이었다.
“그럼 난, 아니 그 친구는 누굴 좋아하는 걸까? 걔? 아님 걔 쌍둥이 동생?”
“그건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몰라. 모른대. 그래서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대. 애초에 둘이 닮지 않았으면 내가 유이반 아니 걔가 좋아졌을까? 오빠, 근데 둘이 진짜 똑같이 생겼어. 그게 가능해?”
“쌍둥이라며. 그니까 똑같이 생겼겠지.”
“성격은 완전 다른데?”
“다른 인격이니까 다르지. 아니면 둘이 떨어져서 살았대?”
“떨어져 살았으면 달라?”
“환경적 요인도 중요하거든.”
유일반과 달리 까칠하고 예민하고 막말하고 근데 또 박력 넘치고 화끈하고 싫다면서 제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던 녀석이 떠오른 태영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책상 위 몽몽이가 눈에 들어왔다.
제가 갖고 싶다니까 지갑에 있는 돈 다 털어 가며 인형을 뽑아 주던 녀석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모탱, 둘 중 누굴 좋아하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응!”
“내가 방법 하나 알려 줄게.”
“뭔데?”
자칭 타칭 연애 고수인 태혁을 이쪽 방면으론 꽤나 신뢰하고 있던 태영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자 마침내 태혁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적어.”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