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오래전 엄마가 창설한 동아리를 지키기 위해 밤이고 낮이고 로봇 연구에 몰두하는 전교 1등 아들이라……. 뭔가 서사까지 주인공 재질이라는 생각을 하며 태영은 다시금 오래된 로봇들을 둘러봤다.
“그럼 여기 있는 물건들 다 너희 엄마가 쓰던 거야?”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로봇은 점차 소형화가 되어 갔다. 우리가 쓰는 핸드폰이 몇 년 사이 더 얇고 가벼워진 것처럼 말이다.
근데 이런 중요한 물건들이 왜 학교 옥상, 것도 다 쓰러져 가는 창고에 있는 걸까?
이 정도 퀄리티면 저번에 소풍으로 갔던 로봇 박물관에 있어도 될 만한 수준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태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로봇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녀석이 대답했다.
“집에서 버린 거 옮겨 놓은 거야.”
“세상에, 이걸 왜 버려? 어머니 유품이라며. 너한텐 중요한 거 아니야? 대체 누가 버렸는데?”
“누구겠어?”
“헐. 너희 아버지가 버린 거야? 미친 거 아니야?”
뭐 그런 아버지가 다 있어? 태영이 눈으로 욕을 하고 말았다. 그러다 착잡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을 발견하곤 입을 틀어막으며 사과했다.
“미안.”
“뭐가?”
“그래도 너희 아버진데 뭐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상관없어. 난 그 사람 내 아버지라고 생각 안 하니까.”
녀석의 차가운 한마디에 태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태영은 괜히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근데 대박. 이걸 다 어떻게 옮긴 거야? 꽤 무거웠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대단하다 진짜.”
이 정도면 혼자의 힘으로 옮겼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정도로 종류도 많았고 무게도 꽤 나갔다. 대체 어떻게 옮긴 걸까? 태영만 그런 의문을 품은 게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이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엄마의 유품을 처음 마주한 이반은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태영보다 더 놀란 상태였다.
엄마의 유품이 그 집 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종류의 유품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을 거라는 상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이반은 로봇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옆에서 흘끔 쳐다보던 태영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희 엄마 되게 멋진 분이셨을 것 같아.”
“?”
“지금도 로봇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인 것 같은 편견이 있잖아. 아마 너희 엄마 세대에는 더 심했을 텐데, 그런 편견을 극복해 내고 이런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게 되게 대단한 것 같아. 넌 너희 엄마 닮았나 봐.”
“닮았다고? 내가? 너 우리 엄마 본 적 있어?”
“외적인 거 말고 내적인 부분이 닮은 것 같다고.”
“?”
“너도 로봇 만드는 거 좋아하잖아.”
형과 달리 딱히 이런 로봇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이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난 모르겠는데?”
“그걸 왜 몰라? 너 있잖아, 로봇 바라볼 때의 니 눈빛 모르지? 장난 아니야. 저번에 내가 동아리방에서 니 로봇 찍다가 걸린 그날 생각 안 나? 나더러 다시 찍으라고 흔들렸다고 막 정색하고…….”
주절주절 한참을 떠들던 태영은 녀석이 아무 대답이 없자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곤 아차 싶었다.
방금 제가 말한 로봇에 애정이 넘치던 유일반은 기억을 잃기 전의 유일반이었으니.
잠깐, 이상하네. 그러고 보니 녀석이 기억을 잃고 나서부턴 로봇을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진 것 같아. 뭐랄까. 전처럼 애정이 넘친다기보다 애증이 가득해 보였어.
지금 머리가 고장 난 녀석에게 로봇은 어떤 의미일까?
갑자기 궁금해진 태영은 녀석을 흘끔 쳐다봤다.
그런데 웬일인지 녀석이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날 왜 그런 눈으로 봐? 아, 너 기억 안 나는 얘기 해서 화났구나?”
아무런 대답도 없이 녀석이 계속 저를 빤히 쳐다보자 태영은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그런데 그때 대뜸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나 사실 기억 잃은 적 없어.”
“잉? 그게 무슨 소리야?”
태영이 황당한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며 따져 물었다.
“무슨 소리냐니까! 너 그럼 지금까지 연기했다는 거야? 기억 잃은 척?”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 앞에서 내가 아닌 척 연기한 적은 없어. 거짓말은 몇 번 한 것도 같지만.”
“으, 뭐래. 알아듣기 쉽게 말해. 지금 나 머리 나쁘다고 놀리는 거야?”
“놀리는 거 아니고 고백하는 거야.”
“…….”
“너한텐 내가 진짜 누군지 말하고 싶어졌거든.”
“하. 그러셔요?”
놀리는 게 확실했다. 태영은 이 녀석이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이러나 싶어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그래서 니가 누군데? 아, 역시 그거구나? 유일반의 또 다른 인격체! 다중이!”
“나 진지하거든?”
“전혀 그렇게 안 보이거든? 너 아무래도 검사받아야 할 것 같아. 우리 엄마 간호산데 같이 병원 가 볼래?”
“어디 병원인데?”
“명원대.”
“잘됐네. 같이 가자. 진짜 유일반은 거기 있거든.”
“뭐?”
지이잉. 지이잉.
그런데 그때였다.
하필 녀석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적막을 진동음이 채우고 있었다.
태영은 녀석이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단 얼굴로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고, 녀석은 이 중요한 순간에 전화 때문에 짜증 나 죽겠다는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끄려고 했는데.
액정에 찍힌 발신인을 확인하곤 표정이 굳어졌다.
“미안. 전화 좀 받을게. 나머지 얘기는 이따 하자.”
“어? 어. 얼른 받아.”
태영은 보고야 말았다. 녀석의 핸드폰 액정에 [아버지]라고 새겨진 문구를.
그 순간 주말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식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던 회장님의 성난 얼굴이.
전화 늦게 받았다는 이유로 녀석이 집에 가서 이번엔 반대쪽 뺨이라도 맞을까 봐 겁이 났던 태영은 황급히 창고를 나가 자리까지 피해 줬다.
“네. 아버지.”
세상 무서울 거 하나 없어 보였던 녀석도 아버지는 무서운지 각 잡힌 자세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태영은 그를 흘끔 보며 살며시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해가 지고 매미 소리와 함께 더운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옥상 난간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영은 순간 아까 녀석이 했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너한텐 내가 진짜 누군지 말하고 싶어졌거든.’
대체 그게 무슨 말일까?
태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창고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불현듯 주말에 녀석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나 사실 유일반 아니야.’
‘?’
‘내 이름은…….’
녀석이 아버지에게 뺨을 맞기 전 내게 했던 말.
“세상에, 까먹고 있었어.”
회장님의 등장이 워낙 강렬해서 완전 잊고 있었다. 맞아. 그때도 녀석은 자신이 유일반이 아니라고 했다.
“뭐지?”
하필 그 순간 태영의 시야에 잘 정돈된 옥상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해. 너무 이상하다.
분명 녀석이 기억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옥상은 망가진 책상들이 마구잡이로 늘어져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구석에 잘 쌓아 올려진 책상과 의자 그리고 바닥에 버려진 교과서들도 차곡차곡 끈에 묶여 한쪽에 정리되어 있었다.
아니, 기억을 잃었는데 갑자기 없던 결벽증은 왜 생기는 거야?
게다가 빵 한 개를 5초에 끝내고, 시험 끝날 때마다 떡볶이 먹으러 가던 사람이 갑자기 기억 하나 잃었다고 없던 밀가루 알레르기가 생긴 것도 말이 안 돼!
기억을 잃기 전과 후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태영의 까만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든 이질감에 정신이 혼미하기까지 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설마…….”
태영이 후다닥 동아리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역시나 너무나도 깨끗한 내부. 엎어져 있는 로봇 빼고는 창틀에 먼지 한 톨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태영의 시선이 빠르게 사물함 쪽으로 향했다. 문짝엔 유일반의 학교생활이 담긴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단상에 올라가 입학생 대표로 선서하는 모습이든지.
작년 축제 때 인형 뽑기왕에 등극하고 좋아하는 모습이라든지.
수십 장의 사진들을 하나씩 유심히 살펴보던 태영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게 뭐야?”
두 눈을 크게 뜨고 사진들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특히 유일반이 하복이나 반팔 티를 입고 찍은 사진들. 그 사진들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오른쪽…….”
아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유일반의 오른쪽 손목엔 별 모양의 흉터가 있다는 사실을.
뭐에 한 대 맞은 듯 ‘오른쪽’만 계속 읊조리며 밖으로 나온 태영은 무언가에 머리를 쿵 박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녀석이 눈앞에 서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갑자기 멍해진 태영을 발견한 녀석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태영은 그저 말없이 녀석의 오른쪽 팔목을 응시했다.
없다.
흉터가 없어졌다.
아니, 원래부터 없었나?
“너 흉터가…….”
태영은 말끝을 흐렸다. 오른쪽이 아니라 녀석의 왼쪽 팔목에서 똑같은 별 모양의 흉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분명 오른쪽에 있었는데…….”
“아니야. 처음부터 쭉 왼쪽이었어.”
녀석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태영의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에 정신이 아찔했다.
태영은 지난날 유일반에게 수영장에서 구해 준 일은 고마웠다고 하니 녀석이 전혀 모르는 얼굴로 웃기만 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래. 그때의 나에게 전해 줄게.’
그러곤 그렇게 말했지. 마치 그때 수영장에서 날 구해 준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것처럼.
그날 오른쪽 손목에 난 흉터를 매만지며 활짝 웃던 유일반의 얼굴을 떠올리며 태영은 제 앞에 서 있는 녀석의 얼굴을 응시했다.
“!”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녀석의 눈매가 좀 더 길고, 눈동자가 더 까맣고 깊다고 해야 할까? 정확히 표현할 순 없었지만,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다른 사람이잖아!
“너 누구야?”
혼란스러워하는 태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들켰네.”
“뭐?”
“유이반.”
“?”
“내 이름은 유이반. 유일반은 내 쌍둥이 형.”
“말도 안 돼…….”
이반은 놀라도 너무 놀라는 태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라? 기억 상실증 걸렸다는 얘기보단 쌍둥이란 얘기가 훨씬 더 현실성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