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추 여사가 뭔가 고민하는 듯 말을 아끼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부탁했으니까요.”
“…….”
“원래 둘이 같이 입학하려던 학교잖아요.”
대체 추 여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형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추 여사가 이제는 조금 두려워지려고 한다.
이반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추 여사를 쳐다봤다.
“친구까지 동원해서 제 방에 들어간 것도 알고 있어요.”
“이유도 알겠네요?”
“물론이죠. 이걸 찾는 거잖아요.”
추 여사가 카드 지갑 속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도련님이 옮겨 놓은 걸로 알고 있어요. 동아리방이 학교 옥상에 있죠? 그 뒤에 창고가 하나 더 있을 거예요. 거기 열쇠예요.”
“정말 거기에 다 있어요?”
“거기 있는 게 전부예요. 사모님 유품은.”
추 여사가 건넨 열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반은 애써 태연한 척 열쇠를 받았다.
“갑자기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이반이 물었다. 그러자 추 여사가 핏기가 하나도 없는 이반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요. 우리 도련님 깨어날 때까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이반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온 이반은 가방을 들었다.
“학교 가도 됩니까?”
“가고 싶어요?”
“네.”
“그럼 가요. 대신 다음 주에 있을 기말고사 시험지엔 손대지 마세요. 어정쩡한 점수보단 백지가 나으니까. 그래야 덜 의심받겠죠?”
“백지라……. 좋은 방법이네요.”
이반이 피식 웃으며 방을 나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이반을 향해 추 여사가 당부했다.
“아무한테도 들켜선 안 돼요. 우리 도련님한테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거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회장님 귀에 들어가는 건 순식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셋 중 가장 불행해질 사람이 누군지…….”
“압니다.”
그게 저라는 걸 이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영에게만큼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 * *
이반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 추 여사는 어디론가 은밀히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추옥랑.”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망설이던 추 여사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정말 방법이 없어요? 수술해도 살 수 있는 가망이 없는 거냐고요.”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에게서 대답을 들은 추 여사는 고통스러워했다.
곧 전화를 끊은 추 여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액자를 바라봤다.
액자 속엔 일곱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추 여사는 사진을 바라보며 애써 울음을 삼켰다.
* * *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30도가 웃도는 날씨. 덥고 습한 공기가 숨을 콱콱 막히게 했다. 하지만 학교로 향하는 이반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어느새 도착한 학교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매번 축구를 하는 아이들로 시끄럽던 운동장도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이반은 동아리방이 있는 건물 옥상 쪽을 올려다봤다.
기분 탓일까? 노을 진 오렌지 빛 하늘이 오늘따라 아름답게 보였다. 이런 하늘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 씁쓸해졌다.
조금은 무거워진 발걸음. 이반은 추 여사에게서 받은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다시 서둘러 옥상으로 향했다.
“모태영?”
옥상에 도착한 이반은 동아리방 앞에 놓인 책상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태영을 발견했다.
“얜 왜 여기서 이러고 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반은 태영에게 다가갔다.
“야.”
불러도 소용없었다. 새근새근 코까지 골며 자는 태영을 보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긴장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반이 피식 웃으며 태영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
갑자기 태영이 몸을 뒤척이며 두 눈을 스르륵 뜨자, 이반은 뭐 훔쳐 먹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어? 유일반? 언제 왔어?”
태영이 상체를 일으키며 무슨 일에선지 새빨개진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녀석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너야말로 뭔데,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몰래 쳐다보다 들킨 게 부끄러웠던 이반은 저도 모르게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하지만 태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녀석을 만났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
“혹시나 해서 기다렸지. 너 올 것 같아서. 근데 너 괜찮아?”
“뭐가?”
“너희 아버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태영이 손짓으로 머리 위에 뿔을 그렸다.
대충 너희 아버지 화 많이 난 것 같던데, 그런 말인 것 같았다. 그를 알아챈 이반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신경 쓸 거 없어.”
“신경 무지 쓰이던데? 난 너 학교 안 오길래 아버지한테 들킨 줄 알았어. 너희 아버지 되게 무섭더라. 근데 아버지가 알면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장남인 형을 끔찍하게 아끼는 아버지가 지금의 사태를 알게 된다면?
“날 죽이려 들겠지.”
“뭐? 에이, 설마 아들을 죽이기야 하겠어?”
태영이 말도 안 된다며 되물었지만, 녀석은 묵묵부답이었다.
“뭐야 무섭게. 왜 아무 말이 없어?”
“근데 넌 왜 여기서 자?”
“잔 게 아니라 공부하다가 잠깐 쉰 거지.”
“코까지 골면서 자던데?”
“코는 무슨! 나 그런 잠버릇 없거든? 피곤할 때 아주 가끔 아주아주 가끔……. 아, 뭐 아무튼 근데 너야말로 다 늦게 학교는 왜 왔어?”
“너 보려고.”
“…….”
“왠지 니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흐흠, 내가 널 기다리긴 왜 기다려?”
“그러게.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을 줄이야.”
“야!”
짓궂은 얼굴로 이반이 농담을 하자 태영이 버럭 소리치며 예쁘게 흘겨봤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태영은 낮에 수아에게서 받은 문학책을 건넸다.
“아, 이거 수아가 너 주래.”
“이게 뭔데? 필요 없어.”
“그러지 말고 받아. 곧 기말고사잖아. 니가 항상 빌리던 거라던데?”
“필요 없다고.”
녀석은 태영이 건넨 문학책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 태영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문학책을 다시 들어 품에 안았다.
“그나저나 너 기말고사 어떡할 거야? 지금까지 전교 1등 한 번도 놓친 적 없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꼴찌 하면 학교 난리 나겠네.”
“꼴찌는 아니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공부는 하고 있어?”
“안 해도 꼴찌는 절대 못 해.”
“뭘 믿고?”
“니가 있잖아.”
“뭐?”
“니가 명원고 꼴찌라며.”
“아놔. 누가 그래?”
“주유권.”
“참 나. 주유권 걔는 꼴찌에서 두 번째거든? 그리고 나 이번엔 공부 엄청 열심히 할 거거든? 그럼 난 이만 공부하러.”
“가긴 어딜 가.”
태영이 책가방을 챙겨 어깨에 메고 가려고 하자 이반이 냉큼 태영의 책가방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뒤로 질질 끌려간 태영이 당황해 했다.
“어어? 이거 놔. 뭐 하는 거야?”
얼떨결에 녀석의 손에 이끌려 동아리방 옆 창고 앞에 서게 된 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갑자기 말이 없어진 녀석과 자물쇠로 잠긴 허름한 창고 문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이 안에 뭐 있어?”
“응.”
“뭐가 있는데?”
태영의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녀석은 손에 쥔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을 뒤따라가던 태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다 뭐야?”
창문 너머로 주황빛 노을이 새어 들어오는 창고.
이 안에는 수십 대의 작고 큰 로봇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를 경이롭게 바라보던 태영의 눈길을 사로잡은 로봇이 하나 있었다.
이중 가장 크고 오래돼 보이는 로봇.
로봇의 심장엔 네임택이 달려 있었고, 정갈한 글씨체로 ‘프리무스’라고 적혀 있었다.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문학가 카렐 차펙의 희곡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에서 로봇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와.”
나지막한 녀석의 목소리. 태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봤다.
“그 희곡에서 ‘프리무스’는 인간을 사랑하게 된 최초의 로봇으로 등장해.”
프리무스에 그런 뜻이 있었다니. 뭔가 생각과 달리 꽤 로맨틱한 유래라서 태영은 놀랐다. 그때 녀석이 쓸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가 직접 지었대. 이 ‘프리무스’라는 동아리의 이름도…….”
로봇들을 바라보는 녀석의 애틋한 눈빛을 보고 난 후에야 태영은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 녀석에게 어떤 의미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