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내 이름은…….”
마침내 이반이 진짜 자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려던 그때였다.
끼이익.
하필이면 이 중요한 순간, 바로 뒤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먼저 차를 발견한 이반은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고, 뭔가를 보고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진 녀석의 얼굴을 확인한 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뒤에 정차한 차 운전석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리더니 뒷좌석 문을 열었다.
비서들의 보좌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유오채 회장이었다.
유 회장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이반은 태영을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영문도 모른 채 저택 안으로 떠밀려 들어간 태영은 난감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너 당장 따라 들어와!”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움찔하며 겁먹은 태영은 후다닥 대형 화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곧장 문이 열리고 유 회장과 녀석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비서를 옆으로 물리친 유 회장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쫙!
녀석의 몸이 휘청거리다 못해 옆으로 나자빠질 정도로 세게 뺨을 때렸다.
그것도 모자라 유 회장이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쓰러진 녀석의 멱살을 잡아끌고 고함을 쳤다.
“제발 그만 좀 해! 로봇에 미쳐 날뛰던 그 여자랑 닮아 가는 꼴 두고 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야. 앞으로 네 미래는 내가 정한다. 알아들어?”
“…….”
“대답.”
“네…….”
뺨을 맞고도 멱살을 잡히고도 녀석은 아버지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태영은 경악스러웠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아픈 아들한테 저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인지.
저런 아버지라서 비밀로 한 거였나?
태영은 녀석이 너무 딱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들, 나한테 자식은 너 하나야. 전에도 앞으로도. 그러니까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 저버리는 순간 너도 그 여자처럼 빈털터리로 쫓아낼 테니까. 네가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내 말을 거역하는 사람들의 말로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한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태영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녀석이 너무 걱정됐다. 그런데 내내 잠잠하던 녀석의 눈빛이 돌연 매섭게 돌변했다.
“잘 알죠. 어머니가 얼마나 처참하게 돌아가셨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던 유 회장이 멈칫했다. 평소 제 아들 일반과는 다른 차가운 말투. 유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니가 봤다고? 무슨 수로?”
“기사에서 봤다구요.”
유 회장은 어쩐지 쌔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알던 아들이 아닌 것 같았는데, 또 저렇게 웃으니 제 아들이 맞았다.
“아버지.”
공손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아들을 유 회장이 쳐다봤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한 약속은 지켜 주셔야죠.”
“또 그 소리야?”
“약속하셨잖아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프리무스 폐지하지 않기로. 지원금 계속 대 주시기로.”
로봇 동아리의 운영 예산은 일반 학교에서 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기업의 스폰 없이는 운영되기 어려웠다. 이반은 잘 알고 있었다. 형이 프리무스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를.
“그 전에 너부터 나와 한 약속을 지켜야지.”
“제가 안 지킨 게 뭐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다 하며 꼭두각시처럼 살고 있는데.”
“그 녀석 입국했다더구나. 연락 없었지? 만약 찾아와도 모른 척해.”
“왜죠?”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 이게 다 널 위해서잖아. 그 녀석은 어차피 곧 죽을 녀석이야.”
“…….”
“내 유산은 오롯이 다 너한테만 가야 돼. 그 녀석한테 뺏기면 안 된다고.”
“돈이라면 외할머니도 많은데요.”
“그 욕심 많은 노인데 딸 팔아먹더니 이번엔 손자까지 이용해 병원비 뜯어 가는 거 봤잖아. 그 돈이 다 그런 돈이야. 그러니 너도 행여나 그 집안이랑 엮일 생각 하지 마.”
외가 쪽을 조심하라며 재차 강조하던 유 회장은 이제 채찍질은 끝났다는 듯 조금은 부드러워진 말투로 녀석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넌 그 녀석과 다르게 내가 키웠고, 유일한 내 핏줄이야. 알지?”
“……네.”
마찬가지로 날을 세우던 녀석도 이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유 회장이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마당에 홀로 남겨진 녀석의 쓸쓸한 뒷모습을 화분 뒤에서 지켜보던 태영은 하필 이 심각한 상황에서 다리에 쥐가 나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다 개미 같은 목소리로 녀석을 불렀다.
“유일반…… 너 괜찮아?”
“…….”
녀석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태영은 조심스레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 그리고 나 여기 있다가 조용히 나갈 테니까 아버지한테 들키기 전에 넌 얼른 들어가 봐.”
쥐가 난 다리를 어렵사리 이끌고 쩔뚝이며 대문을 향해 달려가는 태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반은 태영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피곤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 * *
“유일반네 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야?”
태영이 등교하자마자 해니를 붙잡고 대뜸 물었다. 해니라면 분명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보통 해니도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응. 그냥 유권이 말로는 되게 되게 부자래.”
“그게 끝?”
“원래 유일반이 가족 얘길 잘 안 하는 스타일.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둘이 벌써 그런 사이야? 막 아버지도 만나고?”
“그런 게 아니라…….”
주말에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꺼내려던 태영은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야, 근데 유일반 요새 안 보인다?”
“대회 얼마 안 남았잖아.”
“어차피 우승은 유일반 아니야?”
예정대로라면 그랬겠지만, 로봇이 망가져 버렸으니 이제 어쩐담.
‘약속하셨잖아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프리무스 폐지하지 않기로. 지원금 계속 대 주시기로.’
태영은 녀석이 아버지와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동아리의 존폐가 걸린 대회였다니. 그래서 그렇게 밤낮 안 가리고 대회 우승에 목숨을 걸었던 거구나.
그만큼 로봇 만드는 걸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가능한 거겠지?
태영은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됐다. 자신도 녀석처럼 뭔가에 열정적이던 때가 언제였던가. 말로만 기자가 꿈이라고 하고, 되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무슨 노력을 했는가.
“나 오늘부터 공부할래!”
“늦지 않았나?”
“왜?”
“다음 주부터 기말고사잖아.”
“뭐? 벌써 그렇게 됐어? 헐……. 최니! 나 문학 필기 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뭐게?”
“수아한테 빌려야겠다. 수아 오늘은 학교 왔나?”
태영이 두리번거리며 수아 자리를 살폈다. 하지만 오늘도 수아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너무 오래 결석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결석 아니야. 아까 등교하자마자 자습실 가던데?”
“그래? 나도 자습실 가 봐야겠다.”
태영이 주섬주섬 교과서와 필기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뒷문으로 주유권이 뛰어 들어왔다.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모탱! 너 완전 떡상했어!”
“뭔 소리야?”
태영은 니 남친 왜 저러냐는 눈빛으로 해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해니가 유권을 진정시키며 그가 내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대박.”
마찬가지로 뭔가를 확인한 해니도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미친 거 아니야? 팔로워 수 이거 뭐야? 갑자기 이렇게 오른다고?”
“지금 너튜브랑 SNS에 영상 올라오고 난리도 아니야.”
“모탱! SNS에 ‘명원시 골딩녀’ 검색해 봐.”
“골딩녀? 그게 뭔데?”
“‘골 때리는 고딩’의 줄임말이래.”
“뭐라는 거야.”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 본 태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거 뭐야? 누가 찍었어?”
“지금 누가 찍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조회 수 백만 넘음. 니 팔로워 수도 2만이야!”
정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는 숫자였다. 태영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지난번 피구 연습 경기를 앞두고 일반에게로 날아오는 공을 발로 걷어차는 제 모습이 담긴 영상을 들여다봤다.
“누가 찍었는지 진짜 기가 막히게 찍었지?”
“니가 찍었지?”
“나? 아닌데.”
“너 맞잖아. 내가 공 찰 때 봤거든? 니가 나 찍고 있는 거.”
“헐. 역시 선출은 달라. 눈썰미 대박.”
주유권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 옆에 있는 해니도 거들었다.
“프리무스 계정 맞팔 한 것보다 이 영상이 더 효과 쩌는데? 모탱, 우리 자기한테 한턱 쏴라. 이렇게 되면 너 기자단 합격하는 데 도움 될 거 아니야. 맞다. 너 서류 접수는 했어?”
“안 그래도 오늘 하려고. 다 준비해 왔지롱. 담임 쌤 추천서도 필요하다고 해서 이따 점심시간에 교무실 가려고. 같이 갈래?”
“응. 사양할게. 니 남친이랑 가.”
“그럴까?”
교실 뒤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보며 태영이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자 주유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모태영, 너 그거 몰라? 오늘부터 유일반 학교 안 나온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담임이 유일반네 집이랑 통화하는 거 들었음. 난 너도 아는 얘긴 줄 알았는데.”
주유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영이 복도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옥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옥상 위 동아리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녀석에게 전화를 걸며 옥상을 서성이던 태영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문소리에 자동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일반…….”
당연히 녀석인 줄 알고 이름을 부르던 태영이 말끝을 흐렸다.
“이 아니라 수아구나…….”
태영은 옥상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수아를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수아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수아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생긴 것 같아. 태영아, 너 어떡해…….”
“나 왜?”
태영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우물쭈물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수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학교에 다 소문났어.”
“무슨 소문?”
“너 학폭 가해자였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