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38화 (39/67)
  • [38화]

    책상 위에 널브러진 노트북과 로봇 설계도가 그려진 스케치들, 그리고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에 적힌 프로그램 언어.

    키보드 위에 놓인 이반의 커다란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모친이 살아 있을 적 어깨너머로 배웠을 뿐이고, 실제로 작업을 해 보는 건 형이 기억을 잃은 뒤 처음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이반은 알고 있었다. 형에게 이번 대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고 자신에게도 큰 의미가 있음을. 어떻게든 형이 깨어나기 전에 최대한 비슷하게라도 복구해 놔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하아.”

    며칠 밤을 새운 이반의 얼굴이 핼쑥했다.

    띠링.

    그때였다.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태영이었다.

    [어디쯤이야? 난 벌써 명원대병원 앞에 도착했는데.]

    뒤늦게 태영과의 약속이 떠오른 이반은 서둘러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고, 급기야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

    하필 지금 이때 통증이 세게 찾아왔다. 제발 형이 깨어나기 전까지만 버텼으면 하던 심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수명을 다해 가는 느낌이었다.

    쓰러진 채 꼼짝을 못 하고 겨우 숨만 쉬고 있던 이반의 이마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했다.

    시야에 진통제가 든 가방이 눈에 들어왔지만, 고통에 지배당한 몸은 손가락 한 개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그 애를 만나야 하니까.

    이반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극한의 고통을 견뎌 냈다. 그렇게 겨우 손을 뻗어 가방을 열었는데.

    “!”

    없다. 진통제가 든 약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거 찾아요?”

    언제 들어왔는지 제 뒤엔 추옥랑 여사가 서 있었다. 이반이 그토록 찾던 약통을 들고 말이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다 알아챈 눈치였다.

    “알고 있었어요? 언제부터?”

    “도련님이 사모님 배 속에 있기 전부터 이 집에서 일했어요. 도련님은 내 자식들보다 더 귀하게 키웠고.”

    “처음부터 알았다?”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추 여사는 능숙한 손길로 비틀거리는 이반을 도와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물과 약을 내밀었다.

    “재밌었겠네요? 형인 척 쇼하는 나를 지켜보는 게.”

    “처음이 아니라 뭐 익숙해요. 모르는 척 쇼하는 거. 자, 어서 약 먹어요. 주치의한테 듣기론 수술하기 전에 몸조리 잘해야 한다던데.”

    모르는 게 없는 추 여사를 이반이 노려봤다.

    “내 뒷조사 했어요?”

    “정확히는 일반 도련님 생사 확인을 하다 알게 됐죠.”

    종종 두 사람이 바꿔 생활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오래 바뀐 채 지낸다는 건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싶은 마음에 추 여사는 백방으로 뛰어다녀 겨우 일반의 위치를 파악했다.

    “도련님 깨어나면 바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요. 회장님께 보고하기 전에.”

    약을 먹었는데도 통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이반이 물었다.

    “왜 도와주는 겁니까?”

    “회장님께서 아셔 봤자 도련님한테 득 될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부탁인데 학교도 더 이상 나가지 말아요. 체험 학습으로 처리하면 되니까.”

    “싫다면?”

    “도련님 커리어에 흠집 내는 건 못 참습니다. 회장님께 보고드리는 수밖에요.”

    “…….”

    “이 사실을 회장님께서 아시게 되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더 잘 아실 텐데요?”

    이건 분명한 협박이었다. 서늘한 추 여사의 눈빛에 이반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 방이나 물건에 손대는 것도 그만하시고요. 찾으시는 건 저한테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우리 일반 도련님 깨어나기 전까지만 잘 버티다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세요.”

    “…….”

    “유이반, 여긴 네 자리가 아니야. 알아들었니?”

    그렇게 추 여사는 뼈 있는 한마디를 남긴 채 나가 버렸다.

    홀로 방에 남겨진 이반은 이제야 진통제 기운이 퍼진 모양인지 고통에 파르르 떨리던 몸이 축 늘어지더니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왜 안 오지?”

    병원 앞에서 서성이던 태영은 손에 쥔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녀석에게선 깜깜무소식이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고, 전화도 안 받는다.

    태영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녀석을 만나 해야 할 얘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유일반 그 새끼 가짜야.’

    아까 집 앞에서 송바위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오르자 태영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송바위가 말하는 가짜라는 의미는 기억 상실증을 뜻하는 거라고 판단했던 태영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송바위의 말은 끝까지 다 듣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송바위 걘 어떻게 알았지?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태영은 급식실 앞에서 송바위와 녀석이 신경전을 벌이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 녀석을 의심스럽게 쏘아보던 송바위의 눈빛까지.

    “으, 몰라. 그냥 냅두자. 송바위 걔가 어디 가서 막 떠벌리고 다닐 애도 아니고. 근데 이 녀석은 왜 안 오는 거야? 무슨 일 있나?”

    어제 하굣길에 만났던 녀석의 안색이 좋지 않았던 게 떠오른 태영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가?”

    생각해 보니 기억을 잃은 후 녀석은 자주 아팠던 것 같다. 지난날 옥상에선 심장을 쥐고 괴로워하질 않나, 아무래도 사고 후유증이 큰 모양이다. 그런 몸으로 원진남고 애들한테 맞기까지 했으니.

    “모탱!”

    태영이 녀석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와 실루엣이 태영에게로 다가왔다.

    “뭐야. 오빠가 여기엔 왜 있어?”

    “엄마 심부름. 그러는 넌 왜 여깄냐? 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만. 꼴은 또 그게 뭐야? 혹시 니 방에 있는 거울 깨졌어? 요새 막 자신감이 넘치시네?”

    태영이 입은 짧은 치마를 어이없게 쳐다보며 태혁이 혀를 내찼다. 오빠의 디스에 이제는 아무런 충격도 없다. 태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태혁을 쳐다봤다.

    “인마, 그 눈빛은 뭐냐?”

    “그냥 가던 길 가시라고. 나 약속 있으니까.”

    “뭔 약속을 병원 앞에서 해? 누구 아프냐?”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암튼 얼른 가.”

    태영은 괜히 오빠에게 녀석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보나 마나 놀릴 게 뻔하니까.

    “이거 놔라.”

    태영이 태혁의 등을 병원 문 안쪽으로 밀었다. 힘에 밀려난 태혁이 얼떨결에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태혁은 여전히 유리창에 딱 붙어 태영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저 웬수 같은 인간!”

    태혁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영은 병원 앞을 벗어나 근처 공원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다시 한번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피커 너머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안…….

    대뜸 사과라니. 태영은 평소답지 않은 반응에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유일반, 너 혹시 어디 아파?”

    ― 조금. 그래서 말인데 오늘 못 만날 것 같아.

    “어? 어……. 근데 어디가 아픈데? 약은 있어?”

    ― 내일 보자.

    서둘러 끊긴 전화. 난생처음 듣는 녀석의 기운 없는 목소리.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태영은 곧장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 녀석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 * *

    녀석이 사는 집을 찾는 건 쉬웠다. 저번에 한번 와 봤기도 했고, 이렇게 큰 집을 어떻게 못 찾을 수가 있겠는가.

    “와, 진짜 크다.”

    웅장한 건물 외벽을 올려다보며 태영은 감탄했다. 그러다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있을 녀석을 떠올리니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아프다기에 오는 길에 포장해 온 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서 인터폰을 눌렀다.

    하지만 벨이 여러 번 울렸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다시 한번 버튼을 누르려던 그 순간.

    철컥.

    육중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본능적으로 모퉁이 한구석에 숨으려던 태영은 멈칫했다.

    “유일반? 너 조금 아프다더니…….”

    항상 깔끔하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을 정도로 녀석의 상태는 많이 안 좋아 보였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와 살짝 충혈된 눈. 이게 어디 조금 아픈 사람의 몰골이란 말인가. 중병 환자라고 해도 믿겠네.

    “너 이렇게 아픈데 왜 나왔어?”

    “너 만나려고. 약속했잖아. 오늘 다 얘기하기로……. 안 그래도 지금 전화하려고 했는데…….”

    추 여사 몰래 나오느라 정신이 없어 미처 핸드폰도 챙기지 못한 이반은 비틀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됐어. 지금 니 몸이 더 중요하지. 얼른 다시 들어가. 난 괜찮으니까.”

    “아니야. 오늘 얘기해야 돼.”

    “무슨 얘기?”

    이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냥 사라질 생각이었어. 그래서 처음부터 작정하고 너한테 말하지 않았어. 그땐 이렇게까지 널 좋아하게 될지 몰랐으니까. 근데 그러다 점점 욕심이 났어.”

    형한테 뺏기고 싶지 않다는 욕심. 어차피 형은 너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형이 깨어나면 본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면 그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너 하나만은 가지고 싶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신발, 핸드폰, 지갑……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닐지라도 너 하나만은 내 것이기를.

    “완벽한 유일반보다 공부하는 거 싫어하고 길치에 하찮고 만만한 지금의 내가 더 좋다는 니 말에 용기가 났어.”

    “저기 있잖아.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너 지금 당장 병원부터 가야 할 것 같은데? 식은땀 좀 봐.”

    태영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녀석을 걱정스레 쳐다보며 불안해했다. 하지만 녀석은 온 힘을 다해 태영에게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 사실 유일반 아니야.”

    “?”

    “내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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