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TEN카페.
초코라떼를 빨대로 휘젓던 태영은 그동안의 기억을 떠올렸다.
해니의 말대로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최니, 저번에 유일반이 떡볶이 좋아한댔지?”
“응. 유권이한테 들었어. 우리 자기는 쌀떡, 유일반은 밀떡!”
밀떡을 좋아한다고? 분명 밀가루 알레르기 있다고 지난번에 떡볶이집에서 떡은 쳐다도 안 봤는데.
게다가 유일반이 기억을 잃기 전 그날! 내가 사죄의 의미로 사다 준 빵을 그 자리에서 아주 맛있게 먹는 거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태영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해니를 쳐다봤다.
“기억 상실증 걸렸다고 없던 알레르기가 막 생기고 그러진 않겠지?”
“당연하지. 너 어제 드라마도 안 봤어? 막 기억 상실증 걸린 남주가 땅콩 알레르기 있는 것도 모르고 땅콩 먹다가 죽을 뻔한 거 여주가 살려 줬잖아.”
“지금 드라마 얘기 하는 거 아니거든?”
“비슷하니까 예를 든 거지. 그래서 너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유일반이랑 헤어질 거야?”
“헤어지자는데 그럼 어떡해?”
게다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 꺼낸 건 나였는데. 이제 와서 나도 뭐 그 녀석처럼 보류라며 물고 늘어질 수도 없고.
“너 괜찮겠어?”
“당연하지. 내가 아까 말했잖아. 막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그런 애가 차였다고 대성통곡을 한 거야?”
“그건 떡볶이 국물이 튀어서 그런 거라니까.”
“웃기시네. 그러지 말고 다시 잘해 봐.”
“뭘 잘해 봐. 이미 끝났는데.”
“친구로라도 지내자고 해. 혹시 알아? 옆에서 계속 보다 보면 유일반도 생각이 바뀔지도.”
“여자랑은 친구 안 한대.”
“그건 또 뭔 소리야? 유일반 여사친 겁나 많거든? 걔 인싸잖아.”
“뭐?”
“따지고 보면 수아도 여사친 중 한 명이야. 둘이 스터디도 같이 하고 과외도 같이 받을걸?”
“둘이 그렇게 친했어? 수아는 아니라고 했는데. 오히려 싫어한댔잖아. 자긴 만년 2등인데 어떻게 1등인 유일반을 좋아할 수 있냐면서.”
“뭐 그 말도 일리가 있지. 근데 암튼 유일반은 남친보다 여사친이 더 많을걸? 아, 너도 봤잖아. 저번에 너한테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한 날. 넌 고백받는 줄 알고 겁나 들떠서 갔다가 여자애들이랑 발야구 했잖아.”
수아가 키득거렸다. 태영이 흘겨봤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웃으라는 거지.”
“하나도 안 웃기거든? 내가 그때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태영은 갑자기 그때의 수치심이 밀려왔다.
“모탱, 잊어. 유일반도 다 잊었으니까.”
“어?”
“지금의 유일반은 그때의 널 기억 못 하는 상태잖아. 그니까 쪽팔릴 것도 없지.”
“대박. 진짜네? 나 안 쪽팔려도 되네? 근데 너 오늘 왜 계속 똑똑해?”
“내가 더 똑똑한 소리 하나 해 볼까?”
“뭔데?”
“너 기자단 접수 이번 주까지야.”
태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틀어막았다. 녀석 때문에 잊고 있었다. 내겐 아직까진 아주 작지만 소중한 꿈이 있었다는 걸.
“모탱, 너 애초에 유일반이랑 엮인 게 다 그놈의 기자단 접수 때문이잖아. SNS 주소 제출해야 한다고. 근데 지금 팔로워 수가 몇이더라…….”
해니가 핸드폰을 꺼내 태영의 SNS를 확인하곤 혀를 내찼다.
“이 팔로워 숫자론 서류 심사에서부터 광탈임.”
현실을 직시한 태영은 시무룩해졌다. 지금 실연당했다고 울고 짜고 그럴 시간이 없었다. 또다시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떡하지? SNS 주소 말고 다른 걸 제출해 볼까? 예를 들면 가상으로 리포팅하는 영상?”
“그걸 어따 올릴 건데?”
“당연히 SNS지. 아, 그렇게 되면 어차피 SNS 주소 제출해야 되는구나. 우씨, 망할. 뭘 어째야 하는 거야? 뭐가 더 중요한 거냐구우.”
“당연히 팔로워 수지. 리포팅 영상 너만 올리겠어? 다른 애들도 올릴 거 아니야. 니가 만약 면접관이면 팔로워 300명인 리포팅 영상이랑 팔로워 1만 명인 리포팅 영상 중 어디에 더 눈길이 갈 것 같아? 좋아요 수랑 댓글 수도 차이 날 텐데.”
해니가 맞는 말만 골라 하자 태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최니. 나 지금이라도 정시 준비를…….”
“니가?”
“으, 미치겠다. 공부는 진짜 자신 없는데. 걍 두 눈 딱 감고 유일반한테 맞팔 해 달라고 할까?”
“거봐.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니까.”
“차인 마당에 맞팔 해 달라고 하면 웃기지 않나?”
“안 해 준다 그럼 확 학교에 소문낸다고 해.”
“뭘?”
“기억 상실증인 거.”
“미쳤어? 그거 소문나면 큰일 나. 아직 걔네 부모님도 모른단 말이야. 너 진짜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특히…….”
지이잉. 지이잉.
하필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해니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뜬 발신인을 흘끔 쳐다보던 태영이 마저 말을 이었다.
“특히 주유권한테는 절대 말하기 없기다. 응?”
“알았어.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말하면 안 돼! 최니!”
“알았다니까.”
해니가 이 중대 사실을 곧장 주유권한테 말할까 덜컥 겁이 났던 태영은 전전긍긍했다. 그런 태영에게 안심하라며 윙크를 날린 해니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최니 쟤 말할 것 같은데. 설마, 안 하겠지?”
해니가 나간 출입구 쪽을 목을 쭉 빼고 두리번거리던 태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초코라떼를 단번에 원샷 했다.
소파에 축 늘어진 태영은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SNS에 들어갔다.
작년에 청소년 기자단에 합격한 선배들의 SNS에서 그동안 활동한 사진과 영상을 살펴본 태영의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하나같이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팔로워 수도 1만 명이 넘는 건 기본이었다.
“안 돼. 나도 뭐라도 해야지.”
태영은 서둘러 너튜브에서 이건욱 기자를 검색했다. 그러곤 그의 영상을 보며 더듬더듬 리포팅을 따라 해 보기 시작했다.
“아아. 속보입니다. 서울 호텔 객실에서 화재가 발생해 투숙객 등 수백 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 으, 숨차. 잠깐, 다시 다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사고, 사고의 원인은…….”
“뭐 하냐?”
“악, 깜짝이야!”
태영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기자 흉내를 내던 사이 누군가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태영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유일반? 니가 왜 여깄어? 해니는?”
태영이 두리번거리며 해니를 찾자 녀석이 태연하게 말했다.
“집에 갔어.”
“집에 가다니 무슨 소리야. 최니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갈 리가 없는데…….”
아직 해니와 수다 떨 내용이 많았던 태영은 잔뜩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반은 제가 온 것을 영 달가워하지 않는 태영의 반응에 멋쩍은 듯 이마를 긁적였다. 그사이 태영은 해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고, 이반은 서둘러 태영의 핸드폰을 뺏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핸드폰 내놔.”
“최해니 내가 보냈어. 주유권이랑 세트로.”
“왜?”
“고백하려고.”
“뭔 고백?”
“남자가 여자한테 하는 고백이 뭐가 있겠어.”
“그 남자가 누구고, 그 여자가 누군데?”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는데.”
“너 나한테 고백하게? 아까 헤어지자고 한 주제에?”
“응.”
“이런 미친…….”
욕이 절로 나왔다. 태영은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반은 태연한 얼굴로 태영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랑 사귀자.”
“하.”
태영은 기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그럼 울까? 불과 두 시간 전에 헤어지자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왜 이래? 혹시 내가 너 기억 상실증 걸린 거 다른 애들한테 다 불어 버릴까 봐 그래?”
“이미 불었던데? 최해니가 다 알던데? 덕분에 주유권도 알게 됐고.”
이런 빌어먹을 명원고 확성기 최해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특히 주유권한텐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대답 안 해?”
“뭐, 뭘…….”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태영은 녀석의 비밀을 해니에게 말해 버린 것이 미안해서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 모습에 녀석은 마음 약한 태영이 귀엽다는 듯 남몰래 피식 웃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나랑 사귀어 주든가.”
“미안하긴 한데 사귀는 건……. 저기,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사귀자고 할 땐 보류라며. 그렇게 보류시켜 놓고 운동장에서 뻥 차더니, 이제 와서 다시 사귀자고? 너 나 놀리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깐 헤어져야 했어.”
그래야 니가 형한테 사귀자고 한 거 무효로 만들 수 있으니까.
“지금부터가 진짜야.”
“돌아 버리겠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태영은 머리에 지진이 날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네? 쉽게 설명해 줘?”
태영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망설임도 없이 이반이 대답했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
“너도 나 좋아한다던데?”
“누, 누가!”
“최해니가.”
으, 망할 최해니! 제 속을 들켜 버린 태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자 이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최해니가 그러더라. 기억 잃기 전 유일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다고.”
“그건 그런 뜻이 아니라, 예전의 너한테선 좀 거리감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그것도 들었어. 하찮아서 좋다며.”
최해니 이 계집애 도대체 어디까지 말한 거야? 속이 다 까발려진 태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구체적인 증언이라 아니라고 잡아떼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모태영.”
녀석이 제 이름을 불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
“기억 잃기 전 유일반은 너 안 좋아해. 권수아 좋아해.”
천천히 입을 뗀 이반은 태영을 의미심장한 얼굴로 쳐다봤다.
“근데 난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