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35화 (36/67)
  • [35화]

    “우리 헤어지자.”

    녀석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영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했다.

    아니야.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저 오래간만에 점프를 해서 살짝 기운이 빠진 것뿐이야.

    그래, 그런 거라고. 난 전혀 놀라지 않았어. 애초에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도 나잖아? 어차피 난 이 녀석과 헤어지려고 했으니까 오히려 잘된 거야.

    그러니까 쿨하게 행동하자.

    “오케이. 아랐? 크흠. 알았어.”

    아오, 나 방금 삑사리 난 거야? 젠장!

    태영은 자꾸만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뒤로 돌아섰다.

    그땐 알지 못했다. 쿨병 걸린 자의 최후가 얼마나 추한지를.

    * * *

    퍽!

    “아웃!”

    퍽! 퍽!

    이 소리는 실연당한 모태영이 피구 게임에서 활약하고 있는 소리였다.

    퍽!

    “윽! 졸라 아파! 모태영, 너 미쳤어?”

    친구들의 항의에도 태영은 마치 강속구를 던지는 마운드 위 투수처럼 공을 던졌다.

    “쟤 뭐야? 지가 무슨 선수야?”

    “몰랐어? 모탱 선수였잖아. 그 종목이 뭐더라, 암튼 우승도 하고 그랬댔어.”

    구경꾼들 사이에서 해니가 친구 자랑을 해 대며 흐뭇하게 피구 게임을 지켜보며 응원을 시작했다.

    “공부 빼고 다 잘하는 모탱! 지는 건 모탱! 이긴다 모. 태. 영!”

    치어리딩까지 하며 목에서 피가 나도록 소리를 질러 대는 해니를 보고도 못 본 척 태영은 또다시 날아오는 공을 덥석 잡았다.

    못 잡는 공이 없는 태영의 뒤에 몸을 숨긴 주유권이 호들갑을 떨었다.

    “와, 모탱 미쳤다. 그걸 또 잡네. 으, 난 너랑 같은 편이어서 진짜 다행이다.”

    태영의 뒤에 딱 붙은 주유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습 경기라길래 별생각 없이 왼쪽에 섰을 뿐인데, 운 좋게 태영과 짝이 된 거다. 하늘이 도왔지. 저기 모태영 공에 맞아 아파 죽겠다는 애들을 보며 주유권은 승리감에 도취했다. 심지어 어떤 애들은 날아오는 공이 무서워서 일부러 라인을 밟고 나가는 애들도 있었다.

    그렇게 현재 상대편 진영엔 딱 한 커플만 살아남아 있었다.

    주유권이 의아한 표정으로 태영에게 물었다.

    “근데 너넨 왜 같은 편 안 했어? 물론 그 덕분에 난 살았지만.”

    주유권이 맞은편 진영에 홀로 남은 이반과 그 뒤에 찰싹 붙어 서 있는 안경 쓴 오필희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번엔 태영을 흘끔 봤는데.

    “개무서워.”

    주유권이 흠칫 놀랐다. 태영의 표정은 마치 야구 한일전 9회 말 2아웃 1점 차로 뒤지고 있는 타석에 선 타자 같았다.

    반드시 이기리라, 강한 의지를 내뿜는 저 눈빛. 광기 서린 눈빛.

    “모탱, 이거 연습 경기야. 살살 해. 게다가 쟨 니 남친이잖아.”

    “남친? 나 그딴 거 없어.”

    “물론 경기에서 사적 감정은 없어야 하지만, 악!”

    퍽!

    주유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영은 공을 던졌다. 하지만 공은 이반의 팔을 맞히고 저 멀리 굴러갔다.

    짝피구 규정상 남자는 맞아도 아웃되지 않으므로 경기는 계속되었고, 그 뒤로도 태영은 계속해서 공을 던져 이반의 다리, 배, 가슴, 등을 연속으로 맞혔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이반은 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얼굴로 태영을 쳐다봤다.

    “야, 이거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짝피구 룰도 모른 채 그냥 날아오는 공에 처맞고만 있던 이반은 뒤늦게 안경 쓴 여학생에게 물었다. 그러자 오필희가 안경을 끌어 올리며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안 끝날 것 같은데. 모태영 쟤 이상해. 일부러 너만 맞히잖아. 날 맞혀야 게임 종료인데, 꺅!”

    퍽!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또 공이 날아와 이번엔 이반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이반이 휘청이다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곤 태영을 어이없게 쳐다봤다. 그사이 공은 또 태영의 손에 들어왔다. 머리를 매만지며 아파하는 이반을 걱정스레 쳐다보던 태영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러곤 시시하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공을 그냥 위로 높이 던져 버렸다.

    저 공이라면 아프지 않게 맞고 아웃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필희는 미친 듯이 달려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웃! 게임 종료!”

    그렇게 드디어 살벌했던 피구 연습 경기는 끝이 났다.

    “쟤네 사귀는 사이 아님? 왜 저래? 사랑싸움인가?”

    “아깐 사이좋던데. 못 봤어? 모태영이 유일반 구해 줬잖아. 날아오는 공을 발로 퐉!”

    2학년들이 수군거리며 교실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사이를 지나가던 태영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송바위였다.

    “모태영, 너 혹시 알고 있어? 유일반 그 새끼…….”

    “비켜.”

    송바위가 흠칫 놀랐다. 평소라면 절대 그냥 물러서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방금 태영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까 피구 경기를 할 때 사정없이 공을 던져 대던 태영의 모습을 보아하니 뭔가 속상한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혹시 모태영도 알게 된 걸까? 유일반이 가짜라는 사실을?

    “이 개새끼!”

    감히 누굴 울려.

    송바위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곧장 뒤를 돌아 녀석을 찾기 바빴다. 하지만 찾는 녀석은 안 보이고 주유권만 눈에 들어왔다.

    송바위가 교실로 들어가려는 주유권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주유권! 그 새끼 어딨어?”

    “그 새끼가 누군데?”

    “어딨냐고.”

    송바위가 똑바로 대답 안 하면 죽일 것처럼 노려보자 주유권이 냉큼 대답했다.

    “유일반이야 뻔하지 뭐.”

    “옥상?”

    “응.”

    주유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바위가 옥상에 있는 동아리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송바위의 뒷모습을 향해 메롱 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던 주유권이 송바위 때문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을 확인한 주유권이 냉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올. 역시 내 찐친. 안 그래도 나도 너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 동아리방으로 좀 와.

    “거긴 곧 누가 들이닥칠 예정이라 좀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 음악실은 어떰?”

    ― 음악실이 어딘데?

    주유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음악실이 어디냐니. 본관 5층에 있잖아.”

    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통화가 끊기자 주유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을 쳐다봤다.

    “이 녀석 요새 왜 이러지?”

    * * *

    “유일반 걔 미친 거 아니야? 헤어지자고 할 사람이 누군데!”

    포크를 든 해니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떡볶이를 푹 찍었다. 그 바람에 빨간 국물이 맞은편에 앉은 태영의 얼굴과 눈에 튀었고.

    “앗, 쏘리.”

    해니의 사과에도 태영은 말없이 휴지로 얼굴을 닦았다. 그런데 무슨 일에선지 태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헐, 모탱…… 너 설마 우는 거?”

    “아니거든? 떡볶이 국물이 눈에 들어가서, 흑, 매워서, 매워…….”

    눈물을 줄줄 흘리며 태영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열받아. 내가 헤어지잘 땐 보류라고 하더니.”

    내 입술 너한테만 썼다 어쩌구 절대 못 헤어진다고 하더니!

    “지가 먼저 나 차려고 보류한 거였어. 나쁜 놈!”

    눈물을 벅벅 닦으며 억울해하는 태영을 해니가 안타깝게 쳐다봤다.

    “사랑하고 뭐 그런 거 아니라더니. 아닌 게 아니었구나?”

    “…….”

    “그냥 인정해. 인정하면 편하다니까.”

    “그래, 사랑한다. 나 걔 미치도록 사랑한다! 됐냐?”

    해니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태영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떡볶이를 먹었다.

    “거봐. 이제 좀 편하지?”

    “그러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넌 누가 더 좋아?”

    “그게 무슨 말이야?”

    “기억 잃기 전 다정다감 유일반, 기억 잃은 후 시크한 유일반. 둘 중 누구냐고.”

    “둘 다 같은 사람인데 그게 의미가 있어?”

    “스타일이 정반대잖아. 만약 니가 후자 쪽 시크한 유일반이 좋은데 갑자기 기억 돌아와서 겁내 다정하게 굴면 어쩔 거임?”

    해니의 말에 잠깐 상상해 본 태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일반이 기억이 돌아와서 예전처럼 ‘야, 보류!’가 아니라 ‘태영아.’라고 다정하게 부른다면 왠지 닭살이 돋을 것만 같았다.

    “모탱, 왜 웃어?”

    “난 지금의 유일반이 더 좋은 것 같아. 왠지 전에는 거리감이 느껴졌달까? 뭔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런 존재? 근데 지금은 좀 하찮아. 너 모르지? 유일반 걔 길치다. 공부하는 것도 싫어하고, 인형 뽑기도 더럽게 못해. 뭐랄까, 되게 친근감 있어.”

    “야, 그건 완전 다른 사람인데? 유일반이 공부를 싫어한다고? 타고난 놈이 즐기는 놈 못 이긴다고 유일반이 딱 그 케이스라고 우리 유권이가 그랬는데. 유일반 걔 심심할 때마다 수학 문제 푼댔어.”

    해니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태영의 표정이 알쏭달쏭해졌다.

    “모탱, 게다가 유일반이 길치라니. 그건 뭔 소리야?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유일반이 길치?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나?”

    해니의 물음에 태영은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 * *

    만나기로 한 지 30분이 지난 후에야 음악실에 도착한 유일반을 주유권이 벙찐 얼굴로 쳐다봤다.

    “너 집에 갔다 왔어? 왜 이제 와?”

    “음악실 본관 5층이라며.”

    “내가 그랬어? 아, 쏘리. 근데 음악실은 당연히 별관이지. 본관은 4층까지밖에 없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니가 어떻게 몰라?”

    “암튼 됐고.”

    음악실을 찾아 뛰어다니느라 이마에 땀이 흥건한 이반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주유권을 향해 말했다.

    “모태영 지금 어딨는지 알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니가 전화해 보면 되잖아.”

    “내 전화 안 받으니까 묻잖아.”

    “왜?”

    이 새끼 말 더럽게 많네. 이반은 겨우 화를 참으며 재차 물었다.

    “모태영 어딨냐고.”

    눈치 빠른 주유권이 이반의 성난 얼굴을 확인하곤 재빨리 대답했다.

    “우리 해니랑 떡볶이 먹고 있을걸? 다 먹고 2차로 TEN카페도 간다고 그랬어. 거기 초코라떼랑 티라미수가 겁나 맛있…….”

    “야, 넌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니까 지금 떡볶이 먹고 있다는 거잖아. 맞아?”

    주눅이 든 주유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뭔가를 고민하던 이반이 주유권을 흘끔 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떡볶이집에서 고백하는 건 별로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