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34화 (35/67)
  • [34화]

    지갑을 뺏은 누군가는 바로 송바위였다. 다들 녀석이 누군지 말 안 해도 아는 눈치였다.

    “소, 송바위, 오래간만이다? 근데 내 지갑은 왜…….”

    놈의 말을 무시한 채 송바위가 지갑 안을 들여다봤다. 유일반의 사진이 박힌 학생증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니 이름이 유일반이냐? 뒤지고 싶어?”

    “아니, 그, 그게 말이야. 유일반이 준 거야!”

    놈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바위가 맹수 같은 눈빛으로 놈을 쳐다봤다. 그러자 뻔뻔하게 지갑이 자신의 것이라며 거짓말하던 놈이 그 기세에 눌려 눈빛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른 무리는 의리도 없이 벌써 슬금슬금 도망가고 있었는데.

    “악!”

    무리 중 한 놈의 뒷덜미를 송바위가 낚아챘다. 그러곤 놈을 향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태영한테 DM 보낸다고?”

    “어?”

    “모태영 번호는 왜 궁금한데?”

    “그게…… 그냥 안부?”

    “지랄하고 있네. 걔한테 할 말 있으면 지금 나한테 해. 하라고.”

    “아니야. 할 말 없어. 진짜 없어. 다 까먹었어.”

    송바위의 위압적인 피지컬에 다들 겁먹은 모양이다. 원진남고 무리는 서로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그런 그들을 같잖게 보며 송바위가 경고했다.

    “너네 잘 들어. 모태영 아니었어도 축구부 해체됐을 거야. 왜? 니 실력이 좆같으니까. 그니까 이제 화풀이는 너희 자신한테 해. 그날 일 겨우 잊고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치는 애 건드리지 말고. 알았어? 씨발, 뭐 해? 꺼져!”

    송바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진남고 무리가 황급히 PC방에서 도망쳤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지갑에서 훔치려던 현금까지 바닥에 다 내팽개치고 가 버렸다.

    잔뜩 귀찮은 얼굴로 바닥에 흩뿌려진 돈을 주워 지갑에 도로 넣던 송바위는 아까 놈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새끼 움직이면 모태영 운동부 학폭 사건 명원고에 소문낸다니까 처맞기만 하더라.’

    기분이 더러웠다. 지가 무슨 자격으로 태영이를 위해 맞기까지 하냐고. 양다리 주제에.

    “유일반…….”

    학생증 속 유일반의 얼굴을 노려보던 송바위는 이내 지갑을 닫으려다 뭔가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학생증 뒤에 카드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괜한 호기심에 그 카드를 빼냈고, 카드의 정체를 확인한 송바위는 놀라 얼굴이 굳어졌다.

    그 카드는 ‘외국인 등록증’이었다.

    분명 유일반의 사진인데, 이름이 달랐다.

    “유……이반?”

    어째서 유일반에게 외국인 등록증이 있는 걸까? 것도 ‘유이반’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말이다.

    송바위는 도무지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번 급식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기억 안 나는 거야? 아님, 안 나는 척하는 건가?’

    ‘뭘.’

    ‘우리 초면 아닌데.’

    ‘…….’

    ‘근데 넌 왜 날 지금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지?’

    그랬다. 분명 그때 녀석은 나를 처음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송바위는 뭔가 알아차리고 말았다.

    “개새끼!”

    이 새끼는 양다리 걸친 유일반보다 더 나쁜 새끼였다.

    낮게 욕을 읊조리던 송바위가 주먹을 꽉 쥔 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학교였다.

    * * *

    명원고 운동장이 시끌벅적했다. 7교시는 체육 대회 연습으로 인해 2학년 전체가 집합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 연습할 종목 중 태영이 출전하는 건 짝피구 하나였다.

    “모탱!”

    1반이 모여 있는 스탠드에서 주유권과 한창 떠들던 해니가 태영이 혼자 구령대 밑에서 멍때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달려왔다.

    “모탱! 모탱!”

    해니가 호들갑을 떨며 이름을 불러 대도 태영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어? 유일반이다!”

    “어디?”

    유일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태영을 해니가 섭섭하게 쳐다봤다.

    “모탱, 나 서운해. 내가 그렇게 부를 땐 대답도 안 하더니. 유일반이 그렇게 보고 싶냐? 아까 옥상 가더니 화해했나 봐? 뻥 차 버리네 마네 하더니 웃기시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해니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태영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헤어지자고 했어.”

    “뭐? 왜? 유일반이랑 오해 푼 거 아니었어? 아까 그 영상 보니까 쑤쑤 님 미팅 앞두고 갑자기 사라진 건 원진남고 애들 때문인 것 같던데. 아니래?”

    “그건 맞아. 맞는데…… 사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다른 이유가 또 있어.”

    “뭔데? 뭐냐구우!”

    해니가 태영의 팔을 잡아당기며 마구 보챘다. 그러자 고민하던 태영이 시름이 가득한 얼굴로 뒤늦게 입을 열었다.

    “유일반이랑 수아가 사귀었던 것 같아.”

    “뭐? 누가 누구랑 사귀어?”

    “목소리 좀 줄여.”

    태영이 해니의 입을 틀어막으며 구령대 안으로 더 기어들어 갔다.

    “쏘리쏘리. 볼륨 줄일 테니까 계속해 봐. 둘이 사귀었다고?”

    “아니. 사귄 것 같다고. 아니면 둘이 사귀는 중에 나랑 만난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뭔 소리야? 유일반이 양다리라는 거야?”

    “몰라, 나도 모르겠어.”

    태영이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자 해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유일반은 뭐래?”

    “걘 기억 못 해. 나랑 사귀기 전의 일은 전혀 기억 못 한다고.”

    “잉?”

    “그게 사실은…….”

    “설마 기억 상실증?”

    “!”

    “맞네. 너희 오빠가 아니라 유일반이네. 유일반 기억이 날아갔네. 맞지?”

    “헐. 너 왜 똑똑해?”

    “니가 다 흘리고 다니니까 그렇지. 주워 먹는 건 내가 또 전문이잖아.”

    이 심각한 와중에도 해니가 배시시 웃으며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었다. 태영이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뭐 너한테 털어놓으니까 이제 좀 살 것 같긴 하네.”

    “그니까 진작 말했어야지. 자, 그럼 여기서 질문이요!”

    “오케이. 질문하시고.”

    “유일반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시점은?”

    “나랑 사귄 다음 날.”

    “대박. 어쩐지 그때부터 좀 이상하더라. 유일반이 딴사람 같더라고. 막 웃지도 않고. 맨날 지각하고. 급식실에서도 구석에 처박혀 앉고. 아아. 그럼 다음 질문!”

    “잠깐, 어째 최해니가 신나 보이는 건 내 착각이겠지?”

    “나 신난 거 맞는데?”

    “아오! 나 지금 진지하거든?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엄청난 고뇌와…….”

    “오올, 사랑? 너 유일반 사랑해?”

    “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사랑까진 아니야.”

    “그럼 뭔데?”

    곰곰 생각에 잠겨 있던 태영이 복잡해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아아 몰라 몰라. 암튼 나 그만할 거야. 헤어질 거야. 아직까진 그럴 수 있어.”

    “근데 꼭 그래야 돼? 수아랑 사귀었든 말든 어차피 지금 유일반 여친은 너잖아. 유일반은 수아랑 사귄 기억도 없다며.”

    “그러다 기억이 돌아오면? 유일반이 수아한테 다시 가 버리면?”

    “그럼 먼저 수아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무슨 사이였냐고.”

    “물어봤잖아. 근데 수아는 유일반 싫대.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상대래. 최니, 니가 봤을 땐 어때? 진짤까?”

    “글쎄. 수아가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애라. 솔직히 난 수아랑 그렇게 친한 건 아니잖아. 너 때문에 같이 다니는 거지. 수아는 니가 더 잘 알지 않아? 넌 어떤데?”

    “……아닌 것 같아.”

    “그럼 수아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거야? 왜?”

    “나도 모르겠어. 근데 송바위가 봤대.”

    “뭘?”

    “둘이 키스하는 거.”

    “헐. 넌 송바위 말을 믿어?”

    해니의 물음에 태영은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난 수아보다 송바위를 더 잘 알아. 걔가 막 없는 말을 지어낼 성격은 절대 아니야.”

    “하긴 너희 둘 되게 친했었댔지. 근데 모탱, 내 생각엔 니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 유일반이 누구랑 사귀었든 말든 현재가 더 중요한 거고, 지금 유일반 옆에 있는 건 너잖아.”

    해니가 진지하게 조언했다. 하지만 태영은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유일반 옆에 있을 수 있었던 건 다 기억 때문이야. 유일반이 기억을 잃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날 옆에 둔 거라고. 만약 날아갔던 기억이 다 돌아오면…… 난 필요 없을걸? 그 녀석 분명 수아한테 가 버릴걸?”

    “왜 자꾸 유일반이 수아한테 간다고 생각해? 그게 걱정이면 기억 돌아오기 전에 유일반이 널 좋아하게 만들면 되잖아.”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태영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하지만 곧 수아를 떠올리자 자존감이 확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예쁘고 똑똑하고 말마따나 엄친딸의 정석인 수아를 내가 어떻게 이기냐고. 그건 절대 불가능이야.

    “아니야. 나 여기서 그만할래.”

    “뭔 소리야? 너 유일반 사랑한다며!”

    “사랑 아니라니까. 아직까진 막 엄청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그냥 뭐 잘생겨서 몇 번 가슴이 뛰었을 뿐이지 좋아하고, 사랑? 막 그런 건 아니야. 거기까진 아니야. 절대 아니야.”

    마치 자기 암시라도 걸듯 중얼거리는 태영을 보며 해니가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고 있네. 야, 너 유일반이랑 헤어진 다음에 울고불고 난리 치지 말고 그냥 지금…….”

    “모태영! 최해니!”

    갑자기 체육 부장이 구령대로 달려오더니 두 사람을 불렀다. 서둘러 대화를 종료하고 구령대 밖으로 나온 태영은 해니에게 입 다물라며 눈치를 줬다.

    “너희 둘 피구 아니야?”

    “난 아닌데? 모탱, 너 피구 나가?”

    “응. 나 피구임. 간다.”

    태영이 축 처진 어깨로 피구 라인이 그려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모태영!”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운동장 중앙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같이 가.”

    원진남고 애들한테 맞아 몸 어디가 불편한 모양인지 녀석은 심장 부근에 손을 얹은 채 인상을 팍 쓰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태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왜 나왔어? 몸도 안 좋으면서.”

    “너 보려고.”

    “!”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 태영은 말문이 막힌 채,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태영을 흘끔 보던 녀석은 멋쩍은 듯 이마를 긁적이며 괜히 구구절절 둘러댔다.

    “그 표정은 뭐냐? 오해하지 마. 니가 어디 가서 내 비밀 얘기하고 다닐까 봐 감시하러 나온 거니까.”

    녀석의 말에 태영이 흠칫 놀랐다. 이 녀석 뭐지? 어떻게 알았지? 내가 해니한테 지 비밀 다 까발렸다는 사실을.

    정곡을 찔린 태영이 발끈했다.

    “나 그런 애 아니거든? 한번 약속한 건 끝까지 지키려고 노, 노력하는 편이거든?”

    “누가 뭐래? 가자. 피구하러.”

    “피구는 무슨 피구야. 넌 좀 쉬어. 아까 보니까 온몸에 멍이…….”

    “몰라. 내가 피구 주장이래.”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녀석이 앞장섰다. 그 뒤를 따라가던 태영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나 오랜 세월 선수로 생활했던 직감이 맞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태영은 달랐다. 공이 녀석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태영은 녀석의 앞쪽으로 달려가 높이 점프했다.

    퍽!

    공중에서 멋지게 공을 발로 차 낸 태영은 바닥으로 안전하게 착지했고, 시끄럽던 운동장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태영의 점프를 본 2학년 학생들은 다들 제 눈을 의심하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우와!”

    “모태영 존나 멋있다!”

    뒤늦게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운동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향해 있자 태영은 수줍게 얼굴을 붉혔고 그러다 제 앞에 망부석처럼 굳어 서 있는 녀석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녀석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태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불쑥 말했다.

    “우리 헤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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