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33화 (34/67)
  • [33화]

    옥상으로 뛰어 올라온 태영은 주저함 없이 달려가 동아리방 문을 활짝 열었다.

    “!”

    그런데 웬걸 녀석이 상체를 탈의한 채 서 있는 게 아닌가. 태영은 너무 놀라 손잡이를 잡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가서 기다려.”

    녀석은 태연한 얼굴로 체육복을 입으며 말했다. 그제야 현실을 자각한 태영은 황급히 문을 닫았다. 그러곤 빨개진 얼굴로 옥상을 한 바퀴 돌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떡하지? 어뜩해…….”

    태영은 울상을 지었다. 아까 녀석의 벗은 몸에 칭칭 감긴 붕대와 상처를 봤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원진남고 애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저렇게 된 거겠지? 난 그것도 모르고 수아한테 간 줄 알고 그 난리를 쳤으니…….

    “뭐 하냐?”

    어느새 옥상으로 나온 녀석이 난간에 기대며 태영을 쳐다봤다. 태영이 걸음을 멈추고 쪼르르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해!”

    “뭐가? 옷 갈아입는데 불쑥 들어온 거?”

    “그것도 미안하고, 그리고…….”

    “됐어.”

    녀석이 무심하게 말하며 몸을 돌려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녀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는진 모르겠는데 그런 표정 짓지 마. 너 때문에 다친 거 아니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만 아니었어도 너 원진남고 애들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진 않았을 텐데…….”

    “두들겨 맞다니! 아니거든? 거의 비긴 거거든?”

    녀석이 발끈했다. 태영은 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안타깝게도 너 걔들한테 두들겨 맞는 영상 다 퍼졌어.”

    “영상이 있어? 어디?”

    “주유권한테.”

    “잘됐다. 그거 증거 영상으로 쓰면 되겠네. 걔들 내가 싹 다 고소할 거야.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일부러 맞아 준 거야. 야, 보류. 맞아 준 거라고.”

    “어…… 그, 그래.”

    여전히 기가 팍 죽은 태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반이 헛웃음을 지었다. 태영의 교복에 붙은 라면 면발을 발견한 것이다.

    “근데 너 지금 나한테 사과하러 온 거 맞지? 라면 먹었다고 광고하러 온 게 아니라.”

    “어? 나 라면 먹은 거 어떻게 알았어?”

    “그거나 떼.”

    이반이 턱끝으로 태영의 교복을 가리켰다. 고개를 숙인 태영이 면발을 발견하곤 후다닥 손으로 털어 냈다.

    “미안.”

    “뭐야. 아까랑 태도가 너무 다른 거 아니야?”

    “그거야 아깐 니가 잠수 탄 이유를 몰랐으니까. 암튼 오해해서 미안해. 그러게 아프면 아프다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

    “핸드폰 고장 나서 수리 맡겼어. 그거 찾아오느라 오늘 늦은 거고.”

    녀석이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보여 줬다. 태영은 순간 그제 그리고 어제 녀석에게 문자로 마구 퍼부은 게 생각났다. 태영이 녀석의 핸드폰을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아…… 그럼 문자 온 거 아직 확인 안 했으려나?”

    “무슨 문자?”

    어? 이 녀석 아직 문자 확인 안 했나 보다! 혹시 핸드폰 고장 나서 문자도 다 날아갔으려나? 오, 천만다행이다. 태영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너 내가 저주할 거야.”

    “!”

    태영이 흠칫 놀라며 녀석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놀라? 이거 혹시 니가 보낸 거야? 아까 핸드폰 켜니까 협박 문자만 막 날아오던데. ‘유일반 망해라.’, ‘니 기억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야!’ 같은 거.”

    녀석이 태영의 흉내를 내며 친절히 문자를 읽어 줬다. 태영은 쪽팔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알았어. 그만. 그만 좀 읽어. 그건 그냥 홧김에 보낸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 진심 아니야.”

    “아니야?”

    “그래, 아니야. 사실…… 니가 일부러 나 버리고 간 줄 알았어.”

    “아까 말했잖아. 사정이 있었다고.”

    “많이 다쳤던 거야?”

    “그냥 가벼운 뇌진탕.”

    “뇌진탕? 어? 그럼 기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머리에 충격받으면 원래대로 기억 돌아오던데…….”

    “또 그 소리냐? 넌 내가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좋겠지?”

    “어.”

    태영의 대답을 들은 이반은 질투가 났다. 태영이 원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형, 유일반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사실 내가 너한테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그걸 알아내려면 니 기억이 돌아와야 돼.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니가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궁금한 게 뭔데?”

    “니가 나랑 왜 사귄다고 했는지 알고 싶어.”

    “그게 왜 알고 싶은데?”

    태영은 비 오는 날 저녁 우산 밑에서 송바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새끼는 권수아 좋아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둘이 키스하는 거 내가 봤거든.’

    ‘……뭐? 언제?’

    ‘너 유일반이랑 사귄다고 학교 게시판 난리 났던 날. 그날 점심시간 강당 뒤에서.’

    송바위가 없는 말을 지어낼 녀석도 아니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일반은 수아를 좋아하면서 사귀자는 내 고백을 받아 준 건데. 대체 왜?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태영은 심란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봤다.

    “진짜 기억 안 나? 내가 너한테 사귀자고 했을 때 넌 고민도 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어. 도대체 왤까?”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때 너한테 사귀자고 한 건 널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용했던 것 같아.”

    “이용?”

    “너튜브에 출연하고 싶어서 사귀자고 했던 것 같다고. 그렇다면 너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나랑 사귀기로 한 거 아닐까? 날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잠깐, 그러니까 그때 너는 유일반을 딱히 막 엄청 좋아해서가 아니라, 너튜브에 같이 출연하고 싶어서 사귀자고 했다?”

    “어. 그래 맞아. 맞는 것 같아. 울 학교에 너 싫어하는 여자애 없잖아.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야. 그니까 너도 너무 부담 갖지 마.”

    형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태영의 말에 이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하지만 태영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그니까 이제 그만하자.”

    “?”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리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뭐?”

    “나 어디서 너 기억 잃었다는 말 절대 안 할게. 그러니까 우리 이쯤에서 그만…….”

    “뭘 그만해?”

    “내가 이 얘긴 안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너 기억 돌아오면 다 알게 될 거 그냥 말할게.”

    태영은 고민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너 수아랑 사귀는 사이였던 것 같아.”

    “뭐? 누가 그래?”

    “송바위가 그랬어. 넌 내가 아니라 수아를 좋아한다고.”

    “송바위?”

    녀석이 헛웃음을 지으며 태영을 바라봤다.

    “지금 그 새끼 말만 믿고 유일반이 아니, 내가 양다리 걸쳤다는 거야? 증거 있어?”

    “송바위가 봤대.”

    “뭘?”

    “수아랑 너 키스하는 거.”

    “돌겠네.”

    이반은 억울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키스는 내가 아니라 형이 한 거잖아!

    “난 안 했어.”

    이반은 우겼다. 아니, 우긴 게 아니지. 이게 팩트니까.

    “난 걔 얼굴도 기억 안 나.”

    “이제 차차 다 기억날 거야. 좀만 기다리면 원래대로 다 떠오를 거라고.”

    “아니라고. 그 새끼가 잘못 본 거야. 난 아니야.”

    아닌 거 맞잖아. 난 안 했다고. 이반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런 그를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아니야. 우린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아. 뭐 보류 상태라 우리가 사귄 건 고작 하루뿐이었지만. 이것도 사귄 건가 뭐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린 이제 그냥 친구로…….”

    “난 여자랑 친구 안 해.”

    딱 잘라 거절 의사를 밝힌 녀석을 태영이 섭섭하게 쳐다봤다.

    “그럼 어떡해? 친구로도 안 지낸다고 하면…….”

    “보류하면 되지.”

    “뭐? 또 보류?”

    “어.”

    “어째서? 왜 또 보류냐고!”

    기막힌 얼굴로 태영이 따졌다. 그러자 녀석이 태영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들어.”

    “…….”

    “난 너 말고 다른 여자랑 키스해 본 적 없어.”

    “야! 내가 언제 너랑 키스했어?”

    “수영장 기억 안 나? 우리 집에서 기억 안 나?”

    “그건 키스가 아니라…….”

    “아무튼 내 입술 너한테만 썼어.”

    “…….”

    “그니까 헤어지는 건 보류야.”

    녀석이 딱 잘라 말하곤 뒤를 돌았다. 동아리방으로 들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태영의 마음이 착잡했다.

    * * *

    그 시각 송바위는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를 째고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역시 괜히 말한 것 같다. 바위는 권수아랑 유일반이 키스하는 걸 봤다는 사실을 태영에게 말한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제 말에 충격받은 태영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동시에 요즘 유일반 그 새끼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는지 질질 끌려다니는 태영을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쥐고 있던 마우스를 확 던져 버린 송바위는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원진남고 교복을 입은 무리가 PC방에 우르르 들어와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저놈들과 얽히면 괜히 골치 아파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던 송바위는 그냥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편, 뒤쪽에 자리를 잡은 원진남고 무리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모태영 번호 아는 사람 있냐?”

    “걔 SNS는 있던데 DM 보내.”

    “야, 내 작품도 같이 보내. 유일반 처맞는 영상 말이야. 그거 내가 찍은 거임.”

    “킥킥. 그 새끼 움직이면 모태영 운동부 학폭 사건 명원고에 소문낸다니까 처맞기만 하더라. 지 지갑 털린 줄도 모르고 병신 새끼. 야, 오늘은 내가 쏜다!”

    무리 중 한 명이 훔친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돈 자랑을 했다.

    “욜, 유일반 개새끼 돈 존나 많아. 카드도 있…… 헉! 너, 넌…….”

    지갑을 뒤지던 원진남고 무리가 누군가에게 지갑을 빼앗겼다. 놈들은 고개를 들어 자신들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고 기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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