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32화 (33/67)
  • [32화]

    태영은 도저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은 제 식판 위에 있는 닭강정을 태영의 식판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벌써 산더미처럼 닭강정이 밥 위에 쌓여 갔다.

    “뭐 해? 빨리 앉아.”

    태영이 뚱하게 서 있자 녀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요일에 있었던 일 때문이면 이걸로 화 풀어. 나한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까.”

    녀석의 말에 발끈한 태영이 자리에 앉으며 되물었다.

    “무슨 사정?”

    “말 못 할 사정.”

    “뭐? 넌 지금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농담 아니야. 진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끝까지 어떤 사정인지 입을 열지 않는 녀석을 태영은 어이없게 쳐다봤다.

    “넌 내가 우습지?”

    “너 우습게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웃기지 마. 이딴 닭강정 몇 개 던져 주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잖아.”

    “뭘 해결할 생각 같은 건 없었고, 그냥 니가 좋아하는 반찬이라 준 건데.”

    “어? 뭐?”

    “너 닭 좋아하잖아.”

    녀석이 웃는다. 피식 웃는 게 비웃는 것도 같지만 어쩐지 얼굴에 웃음기가 도는 모습이 천진한 어린아이 같아 태영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뭐야. 갑자기 왜 저렇게 예쁘게 웃어? 젠장. 최해니 말이 맞았어. 이 얼굴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냐고. 아니야. 말리지 마. 모태영, 정신 차려. 이 녀석 얼굴에 지면 안 된다고.

    “암튼 난 너 용서 못 해.”

    “알았으니까 일단 밥이나 먹자.”

    녀석이 태영의 손에 수저를 쥐여 줬다. 자존심 상한다. 무슨 내가 밥순인 줄 아나. 밥이면 다 되는 줄 아나!

    꼬르륵.

    하필 그때 태영의 배에서 소리가 울렸고. 태영은 쪽팔려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최해니 따라 매점 가서 배 좀 채워 놓을걸. 이게 뭔 망신이야.

    “나 못 들었어.”

    녀석이 또 피식 웃으며 태연한 척 밥을 먹었다. 태영은 수치심에 입술을 꽉 깨문 채 녀석을 째려봤다.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 급식은 포기다.

    하지만 도저히 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수저.

    일단 밥은 먹을까? 닭강정만이라도 먹을까? 미친 듯이 갈등하던 태영은 정말 온 힘을 다해 수저를 내려놓았다. 오늘만큼은 밥보다 자존심을 선택한 것이다.

    “?”

    태영이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녀석은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니가 밥을 안 먹어? 대충 그런 눈빛이었다. 그게 또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태영이 씩씩거렸다.

    “내가 중요한 날이라고 했잖아. 너한테 나 운동부 시절에 있었던, 정말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까지 다 털어놓으면서 부탁했잖아. 도와 달라고. 근데 어떻게 말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어? 최소한 연락이라도 했었어야지.”

    “알아. 그래서 나도 어떻게든 돌아가려고 했는데…….”

    “변명하지 마. 결과적으론 안 왔잖아.”

    “…….”

    “너 때문에 내 입장이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근데 뭐? 말 못 할 사정? 웃기고 있네.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그날 어디 갔는지 내가 다 알거든?”

    너 수아한테 갔잖아. 이 나쁜 새끼야!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한 채 태영은 자리를 박차고 급식실을 나가 버렸다.

    잡을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린 태영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반은 뒤늦게 태영을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

    털썩.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또 심장에 통증이 찾아온 것이다. 이반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시야는 점점 흐릿해졌고, 호흡이 가빠졌다.

    녀석은 어떻게든 정신을 잃지 않으려 심장을 부여잡은 채 죽을힘을 다해 고통을 삼켜 내고 있었다.

    * * *

    “어이구, 잘 먹네.”

    매점 한구석에서 라면을 흡입하고 있는 태영을 해니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모탱, 지금 라면이 목구멍으로 들어가?”

    “못 들어갈 이윤 뭔데. 너무 맛있는데? 볶음면 하나 더 먹을까?”

    국물까지 원샷 하는 태영을 해니가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유일반은 식판에 손도 안 대고 다 버리던데. 지금쯤 배 무지 고프겠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빵이랑 우유 사서 동아리방 가 봐.”

    “빵은 무슨. 걔 밀가루 알레르기 있거든?”

    “밀가루 알레르기는 무슨. 유일반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랬는데.”

    “누가?”

    “우리 유권이가. 그래서 둘이 시험 끝나면 항상 떡볶이 먹으러 가잖아.”

    “떡볶이를 먹는다고? 밀떡? 쌀떡?”

    “당연히 밀떡이지.”

    태영은 지난번 떡볶이집에서 떡볶이는 쳐다도 보지 않던 녀석이 떠올랐다. 뭐지? 기억만 잃은 게 아니라 미각도 잃었나?

    “무슨 생각 해?”

    “어? 아니야. 그냥 볶음면에 치즈 추가할까 말까 뭐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해야 돼. 정신 차려야지.”

    태영은 또 습관처럼 녀석을 떠올리고 있던 자신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툭툭 건드리며 자책했다.

    “그냥 웬만하면 화해하지 그래? 내가 봤을 땐 둘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설득하는 해니를 태영이 흘겨봤다.

    “최니 너 뭐야. 헤어지라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아까부터 왜 계속 유일반 편만 들어?”

    “편은 무슨. 난 중립 박았거든?”

    “그니까 왜 중립이냐고. 넌 내 편이어야지. 아까 급식실에서도 자리는 왜 비켜 주냐고. 너 때문에 닭강정도 못 먹었잖아.”

    “야 말도 마. 넌 못 봐서 그래.”

    “뭘?”

    “너 급식실에서 나가자마자 유일반이 갑자기 심장을 움켜잡더니 괴로워하더라니까. 무슨 실연당한 사람처럼. 대체 너 유일반한테 뭐라고 했길래 걔가 그렇게 충격받은 거야?”

    “최니, 있잖아. 그 녀석이 그런 거에 충격받을 타입이 아니라고. 예전의 유일반이면 모를까.”

    “예전의 유일반?”

    “!”

    저도 모르게 말이 헛나온 태영은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 뭐야? 예전의 유일반은 뭐냐고. 뭔데?”

    “그, 그런 게 있어. 암튼 괜히 불쌍한 척 엄살 피운 걸 거야. 이미지 관리하느라고.”

    “너 진짜 헤어질 거야?”

    “어. 이따 수업 끝나고 말할 거야.”

    “정말?”

    “정말!”

    “근데 결정적인 이유가 뭐야?”

    “그거야 말도 없이 사라지고 잠수 탔잖아.”

    “사정이 있다잖아.”

    “그 사정 나한텐 말 못 한다잖아.”

    “말 못 할 사정이니까 말을 못 하지.”

    “에잇! 너랑 말 안 해.”

    화가 난 태영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고, 해니는 대체 그 사정이란 게 뭘까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여잔 아닌 것 같아.”

    “아깐 양다리라며.”

    “아니야. 백퍼, 아니 이백? 삼백? 암튼 절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거 맞거든? 여자 맞거든! 게다가 그 여자가 수아거든?

    태영은 속으로 아우성쳤다. 말하고 싶어서 하소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모탱, 넌 몰라. 급식실에서 널 보는 유일반의 눈빛이 얼마나 스윗했는지.”

    “너 시력 몇?”

    “렌즈 빼면 거의 눈이 없다고 봐야지.”

    “그니까 옆에 있는 친구랑 남친도 구분 못 하잖아.”

    “그치. 그래서 내가 유권인 줄 알고 너한테 뽀뽀했잖아.”

    “우웩!”

    태영이 오바이트하는 시늉을 하자 해니가 섭섭한 표정으로 째려봤다.

    “암튼 아깐 안 보여도 보였어. 막 느껴졌거든. 너를 향한 유일반의 마음이! 제삼자가 보면 딱 안다니까. 유일반은 찐이야. 그니까 둘이 오해 풀고…….”

    “주유권이다!”

    “어디?”

    남친 이름에 즉각 반응하고 손거울부터 꺼내 얼굴 점검을 하는 해니를 보며 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 완전 대박, 빅뉴우스!”

    아오, 시끄러. 태영이 귀를 틀어막았다. 주유권이 호들갑을 떨며 매점으로 달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럼 난 이만.”

    주유권이 해니 옆에 앉자마자 태영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탱, 그냥 가려고? 넌 꼭 봐야 되는데.”

    “뭔데?”

    주유권이 태영에게 핸드폰을 들이밀며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

    그 동영상을 본 태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패싸움 현장이지. 나도 내 친구한테 받은 거야.”

    “그니까 왜…… 왜 여기 유일반이 있어?”

    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영상을 들여다봤다.

    대여섯 명이 넘는 남자애들한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은 분명 녀석이었다.

    녀석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니 쪽수에 밀려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했다. 그리고 주도적으로 유일반을 발로 밟고, 주먹을 날리고 있는 남학생은 저번에 날 괴롭히던 원진남고 그 새끼가 분명했다.

    “모탱, 이거 유일반 맞지? 근데 이상하네, 이 녀석이 싸움하고 그럴 녀석이 아닌데…….”

    “이거 언제 찍은 거야?”

    “몰라. 근데 이 패거리들 원진남고 애들이라는데? 뭐 아는 거 있어?”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계속 일어나 싸우는 녀석의 옷이 주말에 입었던 옷과 똑같다는 걸 알게 된 태영은 의자를 박차고 매점을 뛰쳐나갔다.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게…….

    나 때문이었다니.

    태영은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옥상으로 향했다.

    * * *

    “하아…….”

    진통제 덕분에 겨우 통증이 가라앉은 이반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다 젖었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흘린 식은땀에 티셔츠가 흠뻑 젖어 있었다. 찝찝함을 조금도 견디지 못하고 이반이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 버렸다.

    다부진 상체엔 멍 자국과 상처가 가득했다.

    캐비닛에 달린 거울을 통해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들여다보던 이반은 캐비닛에서 체육복 상의를 꺼내 들었다.

    “이건 빨아 놓은 거겠지?”

    위생 관념 제로인 형을 영 믿지 못하겠는지 이반은 찝찝한 얼굴로 체육복을 탈탈 털었다. 냄새는 안 나서 다행이긴 한데 썩 내키진 않았다. 하지만 땀에 젖은 티셔츠보단 낫겠다 싶어서 체육복을 입으려는데.

    철컥.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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