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31화 (32/67)

[31화]

평소답지 않게 말을 아끼는 태영을 해니가 의아하게 쳐다보더니 손뼉을 쳤다.

“알았다! 여자 문제지? 혹시 유일반 양다리?”

“!”

태영은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급기야 너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해니는 정말 이쪽 방면으론 천재 같다.

“맞네. 맞아. 대체 어떤 년인데? 누구냐고, 내가 아주 그냥……. 아니다. 유일반 그 새끼를 먼저…….”

“잠깐!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자 맞구만. 그런 거 아니면 멀쩡하던 놈이 너랑 같이 있다가 갑자기 사라질 일이 뭐가 있냐고. 것도 중요한 약속 앞두고. 야, 됐어. 그냥 헤어져. 니 말대로 니가 먼저 뻥 차 버려!”

갑자기 태영의 연애사에 과몰입한 해니가 열을 내며 노발대발하자 태영은 더 기운이 빠졌다.

“으이구. 우리 불쌍한 연애 쪼렙 모탱. 제발 정신 좀 차려.”

“내가 뭘 어쨌다고.”

“양다리 걸친 놈 뭐가 좋다고 어제부터 계속 1반이랑 옥상 기웃거리냐? 유일반이 지 발로 찾아와서 사과하게 만들어야지, 왜 니가 더 걔 얼굴 못 봐서 안달이냐고.”

“그거야 헤어지자고 말하려고…….”

“보고 싶어서가 아니고?”

“아니거든?”

태영이 발끈했다. 그를 더 수상하게 쳐다보던 해니가 추궁했다.

“그래? 진짜 아니야? 그럼 지금 당장 유일반한테 문자 보내. 헤어지자고.”

“문자는 좀 그렇지 않나? 만나서…….”

“만나면 못 헤어질걸.”

“어째서?”

“잘생겼잖아. 너 잘생긴 거 좋아하잖아.”

어이없는 대답에 태영이 헛웃음을 지으며 해니를 째려봤다.

“지금 농담이 나와?”

“농담 아니거든? 나라도 그 얼굴 보면 헤어지자는 말 안 나오겠다. 연애 쪼렙인 넌 더 힘들 거고.”

“웃기시네. 난 할 수 있어. 하여튼 나타나기만 해 봐. 온 힘을 다해 뻥 차 버릴 테다!”

태영은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을 영 미덥지 않게 쳐다보던 해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점이나 가자. 오늘 우리 유권이가 쏘는 날이야.”

“난 됐어. 둘이 가. 아! 최니 너 주유권한텐 말하지 마.”

“뭘 말하지 마? 유일반 바람피운 거?”

“바람 아니라고 했다.”

“그럼 모탱이 유일반 뻥 차 버리겠다고 다짐한 거?”

“뭐든. 뭐든 다 말하지 마. 너도 알잖아. 주유권이 아는 순간 전교생한테 다 소문나는 거.”

“알지. 말 안 할게. 근데 너 진짜 매점 안 가?”

“응. 생각 없어.”

태영이 기운 없는 얼굴로 철퍼덕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러자 해니가 안타깝게 쳐다보더니 교실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태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비어 있는 문자 함.

결국 어제 못 참고 녀석에게 먼저 문자까지 보냈건만.

“씹혔어……. 이럴 줄 알았으면 보내지 말걸.”

무슨 일 있냐며, 왜 학교는 안 오냐며, 너 진짜 이럴 거냐며, 막 걱정했다가 욱했다가 구구절절 장문의 문자를 보낸 자신의 손을 원망하며 태영은 다시 책상 위에 엎어져 버렸다.

* * *

3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잠깐!”

태영과 나란히 팔짱을 끼고 음악실로 이동하던 해니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세우더니 복도 끝을 가리켰다. 태영이 의아한 눈길로 해니가 가리킨 쪽을 쳐다봤다.

“쟤 유일반 아니야?”

“그냥 가자.”

“가긴 어딜 가, 드디어 만났는데. 근데 쟤 학교 언제 왔지? 유권이 말론 유일반 쟤 오늘도 결석이랬는데.”

해니가 도망가려는 태영을 붙잡았다.

“어딜 자꾸 도망가! 유일반 얼굴 보고 말한다며. 뻥 차 버릴 거라며.”

“하, 학교 끝나고 할 거야.”

말까지 더듬으며 녀석이 뒤를 돌아볼까 봐 전전긍긍하는 태영을 해니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모탱 너 뭐야. 갑자기 왜 쫄보가 됐어?”

“그래 나 그냥 쫄보 할게. 그니까 빨리 가자.”

태영이 해니의 팔을 마구 잡아당기며 반대쪽으로 향했다.

“알았어. 간다, 가. 근데 이상하네?”

“또 뭐가?”

“1반 4교시 지구 과학이라 제1과학실로 가야 되는데.”

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제2과학실로 향하고 있었다.

또 길 잃은 거야? 대체 저 녀석은 길치야 뭐야? 제1과학실은 1층에 있다고 몇 번 말했는데. 저러다 수업 늦으면 어쩌려고. 아니다. 늦든 말든 이제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헤어질 건데.

“가자.”

“정말 그냥 가려고?”

“가자고. 음악 수업 늦어.”

태영은 해니를 억지로 끌고 녀석이 서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이반은 등교하자마자 태영을 만나러 2반에 갔다가 음악실로 이동했다는 소릴 듣고 별관에 왔다. 하지만 찾는 음악실은 안 보이고 웬 과학실 앞이다. 녀석은 그저 애꿎은 푯말만 노려봤다.

“대체 음악실이 어디야?”

짜증이 가득 실린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올린 이반이 뒤를 돌았다. 그런데 저 끝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 애였다. 친구와 재잘거리며 점점 더 멀어지는 태영을 발견한 이반은 서둘러 태영의 뒤를 따라가려는데.

“유일반!”

누군가 일반의 이름을 부르며 이반을 붙잡았다. 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물리 선생이었다.

그는 이반이 그동안 이 학교에서 가장 많이 만난 선생님이었다. 이 선생님은 교장 다음으로 과학 천재 유일반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아픈 덴 괜찮니? 계단에서 굴렀다며?”

물리 선생의 물음에 이반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계단에서 구른 건 추 여사만 아는 얘긴데. 아, 닥터도 있구나. 혹시 닥터가 얘기했나?

“어제 오후에 너희 집에서 전화 왔었어. 근데 내가 알기론 너희 어머님은…….”

물리 선생이 흘끔 이반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이반이 대신 말을 이었다.

“돌아가셨어요. 근데 그건 왜 물으세요? 혹시 어제 여자분이 전화하셨어요?”

물리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은 이제야 전화한 사람이 추 여사라는 걸 확신했다.

“암튼 너희 집에서 진단서도 보내 주셨으니 병결로 처리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근데 선생님이 왜 제 출결을 체크하세요? 담임도 아니잖아요.”

“교실에 잘 안 들어와서 몰랐구나? 나 1반 담임 된 지 좀 됐는데? 암튼 그러니까 당분간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와. 알았지?”

“아…… 네.”

“대회 준비는 어떠니? 잘되고 있지?”

“네.”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그럼 수고…… 아, 잠깐.”

물리 선생이 또다시 이반을 붙잡았다.

“왜요?”

이반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 살벌한 표정을 마주한 물리 선생은 흠칫했다.

“저, 저기…… 너 혹시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니? 아니 말이야, 요새 부쩍 말도 무뚝뚝하게 하고, 눈빛도 매섭고…….”

“그런 거 아니에요. 얼른 들어가세요.”

이반은 뒤늦게 유일반스럽게 웃어 봤지만 물리 선생의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진짜 아니지? 나한테 안 좋은 감정 그런 거 없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이반이 아래턱에 힘을 잔뜩 준 채 억지로 대답했다. 그렇게 물리 선생에게 붙잡혀 있는 사이, 결국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태영을 만날 수 없게 된 이반은 점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 * *

“선배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후배들의 인사를 받는 것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처음엔 무지 귀찮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랬다.

급식실에 들어선 이반은 태영이 항상 지적하던 차가운 인상을 숨기고 제법 유일반스럽게 웃으며 선후배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곤 식판을 들고 구석으로 향했다.

그 애는 유일반은 인싸라며 아웃사이더처럼 구석에서 먹지 말라고 했지만, 이반은 이 자리가 가장 편하고 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남들에게 주목받는 건 딱 질색이다. 그래서 이반은 형의 학교생활이 대체적으로 불만족스러웠다.

아, 만족스러운 거 하나 있다. 바로 이 급식.

이반은 반찬과 밥이 푸짐하게 담긴 식판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오늘의 주메뉴는 닭강정. 그 애가 좋아하는 닭이다. 저번 주말에 이상한 동네 꼭대기에서 먹었던 대접밥과 치킨이 떠오른 이반은 괜히 군침이 돌았다.

메뉴 보자마자 또 좋다고 펄쩍 뛰겠네. 그 애의 미소를 떠올리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닭강정을 보고 좋아할 태영의 미소를 기대하며 이반은 밥을 먹는 척 급식실 입구만 쳐다봤다. 그러다 마침 급식실에 들어온 태영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런데 웬걸? 그 애는 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잽싸게 배식을 받으러 쌩하니 달려가는 게 아닌가. 평소 같았으면 손을 흔들고 왜 또 거기 앉았냐고 핀잔 섞인 눈빛을 보냈을 텐데 말이다.

심지어 그 애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무시당한 이 기분.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본 감정이었다.

뭔가 명치 아래가 기분 나쁘게 아프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할 새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애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애가 앉은 테이블엔 이미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이반은 제일 만만해 보이는 해니를 향해 유일반스럽게 아주 정중하게 부탁했다.

“미안한데 자리 좀 바꿔 줄 수 있을까?”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러자 해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통했다.

“물론이지. 바꿔 주고말고. 얼른 여기 앉아.”

“바꾸긴 뭘 바꿔. 그냥 먹어. 최니, 너 가기만 해 봐.”

하지만 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니가 후다닥 다른 테이블로 도망갔다.

태영은 배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해니를 째려봤다. 아깐 당장 헤어지라며 난리를 치더니 녀석의 미소 한 방에 넘어가다니. 저 배신자!

“야, 너 왜 나 피하냐?”

해니가 일어난 자리를 이반이 차지하고 앉으며 태영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태영은 이반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을 벗어나려는데.

“가지 마.”

“…….”

“같이 밥 먹자.”

녀석의 목소리가 태영의 발걸음을 무겁게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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