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30화 (31/67)

[30화]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이반이 놀란 얼굴로 사 원장을 불렀다.

“닥터! 방금 봤어? 움직였어. 손가락…….”

“진정해.”

웬일인지 사 원장이 침착하게 말하며 이반의 어깨를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말했잖아. 이 녀석 지금 숙면 중, 그러니까 의학적 용어로 세미 코마 상태라고. 반사적으로 움직인다거나, 눈을 뜬다거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럼 아깐 왜 그런 건데? 나도 다 들었어. 병원 전체가 다 뒤집어졌다던데?”

며칠 전 원진남고 무리와 싸우느라 핸드폰이 박살 났던 이반이 근처 수리점에 핸드폰을 맡기고 돌아오니 병실은 옮겨져 있었고, 간호사 스테이션에선 코드 블루 상황에 대해 수군거리며 다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반은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텅 빈 병실에 들어섰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항상 우리 둘 중 먼저 죽는 건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깐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세미 코마에서 코마로 넘어가면 깨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니까. 근데 방금 움직임을 보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닥터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거지?”

이반은 사고 이후 내내 자신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사 원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확히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사 원장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이반은 나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벌써 몇 주째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이틀 전엔 아주 잠깐이지만 눈도 떴었어. 인마, 본받아. 이 녀석은 이렇게 살려는 의지가 강력하잖아. 너랑 다르다고.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너 미국으로 언제 돌아갈 거야? 더 늦기 전에 수술받아야지.”

“내가 지금 어떻게 가? 유일반은 누워 있고, 로봇은 망가졌고, 대회는 얼마 안 남았고…… 젠장!”

이반이 욕을 읊조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 원장이 안타까워했다.

“유이반, 지금 그깟 로봇이 니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야?”

“그깟 로봇이라니.”

이반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국에 겨우 하나 남은 엄마 흔적이야. 그 동아리, 프리무스만큼은 그 인간이 못 건드리게 할 거야.”

“…….”

“엄마 유품들도 그 사람이 다 망가뜨리고, 불태우고, 없애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다 사라졌어. 찾을 길이 없다고.”

생물학적 아버지를 향한 원망을 드러내며 이반이 말했다. 그러자 사 원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이반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유 회장 그 작자는 정말 지독한 사람이었다.

이혼하자마자 천재 로봇 개발자라 불리던 전 부인의 눈부신 업적까지 훼손한 것도 모자라 교수직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임하게 만들어 외국으로 쫓아냈으니 말이다.

이반의 말대로 그녀의 흔적은 명원고에 있는 프리무스라는 이름의 동아리가 유일했다.

근데 이제 그마저도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번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할 시 동아리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고 이사장이 선포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사장이 왜 그런 조건을 내걸었겠는가. 이는 유 회장의 압박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형이 로봇 개발자가 되는 거 그 사람은 반대했대.”

“그 사람? 유 회장?”

“어. 근데 대회 앞두고 로봇 망가진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거야 사고…….”

“아니. 누가 일부러 망가뜨리고 유일반도 이렇게 만든 거야.”

“넌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릴 하고 그르냐?”

“두고 봐. 내가 꼭 찾아낼 거야.”

이반은 사고 후 처음 동아리방에 갔을 때 난장판이던 그곳을 떠올렸다.

“잡히기만 해 봐. 가만 안 둘 거니까.”

“제발 좀 진정해.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인 거야?”

“알면서 왜 물어?”

이반의 대답에 사 원장은 할 말을 잃었다. 이 녀석이 닮긴 누굴 닮았겠는가. 지 엄마를 꼭 빼닮았지.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아주 판박이였다.

사 원장은 학창 시절 고집불통이던 이반의 모친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 소연화를 떠올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말을 말자. 암튼 너희 아버지는 아직 모르시지?”

“너희 아버지라니. 누가 내 아버진데?”

사나워진 이반의 눈초리에 사 원장은 서둘러 제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 내가 실수했다. 유. 일. 반. 아버지 말이야. 유 회장은 모르냐고. 지 아들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거.”

사 원장의 물음에 이반은 단호하게 말했다.

“평생 모르게 할 수도 있어. 그 집에 있는 동안 그 사람이랑 한 번도 마주친 적 없거든.”

“마주치면? 만약 마주치면 어쩔 건데? 너희가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그 인간도 아버지야. 못 알아볼 리 없어. 분명 들킨다고.”

“그럴 일 없어.”

이반은 단언했다. 하지만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표정이 안 좋아졌다.

“오히려 유 회장보다 그 여자가 문제야.”

“그 여자?”

이반은 거의 24시간 집에 상주하는 추옥랑 여사를 떠올렸다.

실질적 집주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손에 쥐고 제멋대로 관리 감독 하는 그 여자. 가끔 그 여자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숨이 막혔다.

“닥터, 추 여사에 대해 뭐 아는 거 없어?”

“추 여사? 유일반 유모 말하는 거야?”

“어. 그 여자가 내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데 돌아 버릴 지경이야. 내가 누굴 만나는지, 뭘 먹었는지까지 다 보고해야 된다니까.”

“근데 너 어떻게 지금까지 안 들켰냐? 그 꼴로 집에 갔는데도 그 여자가 모르디?”

사 원장이 깁스한 녀석의 팔을 턱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이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계단에서 굴렀다고 했어.”

“이 녀석아 자랑이다.”

사 원장이 상처 난 이반의 얼굴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대체 어쩌다 그런 거야? 누구한테 맞은 거지?”

“계단에서 굴렀다니까.”

“어느 계단에서 굴러야 얼굴이 그 모양이 되냐?”

“잔소리 좀 그만해. 닥터가 내 엄마라도 돼?”

“어. 이제 내가 니 엄마야. 죽은 니 엄마랑 약속했거든. 그나저나 넌 말이 점점 짧아진다?”

“언젠 상관없다며.”

“그땐…….”

“울 엄마한테 잘 보이고 싶었겠지. 근데 이젠 뭐 엄마 없으니까 잘 보일 상대도 없으니 반말하지 말라고?”

“아오. 됐다 됐어. 반말하든지 말든지……. 근데 너 지금 뭐 하냐?”

갑자기 환자복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는 이반을 사 원장이 황당하게 쳐다봤다.

“주치의가 퇴원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누구 맘대로 환자복을 벗어?”

“검사 다 끝난 거 아니야?”

“하나 더 남았어. 내일까진 상태 지켜봐야 한다고. 요새 계속 아팠다며.”

이반은 지난번 옥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태영이 갑자기 문을 열고 옥상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문에 이마를 찧은 날이었다. 하필 그날 생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었고, 그 애 앞이라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실은 숨도 못 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한 건.

하지만 사 원장에겐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간 이 병원에 감금될 게 분명했다.

“그냥 살짝 뻐근했던 정도야.”

“근데 진통제는 왜 달라는 건데? 인마,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안 되겠다. 너 이대론 못 가. 검사 다 받고 가.”

사 원장이 이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이반이 사 원장의 손목을 끌어다 제 심장 쪽에 가져다 댔다.

“어때? 잘 뛰지?”

이반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닥터, 나 무지 바빠. 추 여사한테 가서 어제 외박한 거랑 학교 무단결석한 거 뭐라고 변명할지 생각도 해야 되고, 내일은 학교도 가야 돼. 그래야 안 들키지. 들키면 끝이야. 그 인간이 알았다간 당장 프리무스 없애 버릴걸?”

프리무스에 집착하는 이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사 원장이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외쳤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대신 약 잘 챙겨 먹어. 그리고 내가 이번 일 너한테 협조하고 눈감아 주는 건 다 그 약속 때문인 거 잊지 말고.”

사 원장은 지금 몹시 진지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반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생색 좀 그만 내. 병원이 뭐 여기만 있는 줄 알아?”

“병원이야 많겠지. 하지만 한국에서 유이반이 개인적인 용무를 부탁할 수 있는 의사는 나뿐이지. 너 한국에 아는 사람 나밖에 없잖아.”

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애의 말간 얼굴이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유이반, 무슨 생각 해?”

사 원장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반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한국에 아는 사람 한 명 더 생긴 것 같은데…….”

“뭐라고?”

“갈게.”

“잠깐! 혹시라도 통증 심해지면 나한테 바로…… 아놔. 저 새끼 사람 말하는데 또 그냥 가네.”

통증 얘기가 나오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반이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닫힌 문을 바라보는 사 원장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저 녀석 괜찮아야 될 텐데…….”

* * *

“모탱, 너 괜찮아?”

기운 없이 책상에 엎드려 있는 태영을 향해 해니가 물었다. 그러자 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괜찮다고? 무슨 일 있어?”

“몰라. 그냥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

태영의 대답에 곰곰 생각에 잠겨 있던 해니가 왜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놀리듯 말했다.

“유일반 얼굴 못 봐서 그런 거지? 참 나, 헤어진다더니. 학교 오기만 하면 뻥 차 버릴 거라며.”

“다, 당연하지! 아주 그냥 오기만 해 봐.”

“오늘은 왔던데?”

“무슨 소리야? 아까 옥상 가 보니까 잠겨 있…….”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유일반 보고 싶어서 교실 오기 전에 옥상부터 갔다 왔네.”

“그런 거 아니거든? 근데 유일반 진짜 학교 왔어? 지금 어딨는데?”

“구라지.”

“아놔. 최니 너 죽을래?”

“죽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너 진짜 헤어질 거야?”

“당연하지. 너도 알잖아. 쑤쑤 님이랑 그 미팅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자리였는지.”

“알지. 그날 촬영만 성사됐어도 니가 이렇게까지 피폐해지진 않았겠지.”

눈 밑이 퀭한 태영을 해니가 안쓰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어제 잠 못 잤음?”

“응. 나 어떡하지? 공부는 진짜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특히 물리! 으.”

태영은 어제 물리 교과서를 보며 느꼈던 좌절감을 떠올리곤 진저리를 쳤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생각 바꿔.”

“무슨 생각?”

“유일반이랑 헤어질 생각. 도망간 게 아니라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그 사정이 뭔지 내가 알아. 아니까 이러는 거라고.”

“안다고? 뭔데?”

해니의 물음에 태영은 카페에서 녀석이 수아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사라진 것이 다시금 떠올라 괴로웠다.

그러다가도 아닐 거라고 믿고 싶고, 다시 화가 나고, 왜 그랬는지 궁금하고……. 대체 이 감정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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