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29화 (30/67)

[29화]

명원대병원 1층 로비.

“왜 안 오지?”

엄마를 기다리던 태영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난 상태였다.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던 태영은 그만두기로 했다.

전화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고 어차피 엄마를 만나려면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영은 손에 든 쇼핑백과 조각 케이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일단 엄마한테 문자를 보내 놨으니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평소 같았으면 당직실이나 원무과에 맡기고 그냥 갔을 테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꼭 엄마 얼굴을 보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창가 쪽에 마련된 대기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태영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주말에 비가 와서 그런지 어느새 벚꽃은 다 떨어지고, 그 자리에 초록색 새싹이 돋아나 가로등 불빛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벌써 여름이네…….”

중얼거리며 초여름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며칠 동안 연락 한 통 없는 그 녀석 때문이었다. 태영은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톡이라도 보내 볼까? 에이, 아니야. 뭐 별일이야 있겠어?”

수아한테서 온 전화 받고 뛰쳐나가는 거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근데 그건 그거고, 주말에 그따위로 내 일을 망쳐 놨으면 사과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근데 웬 잠수? 지가 뭔데!

“아오!”

대체 왜 연락이 없냐고. 손가락이라도 부러졌어? 그것도 아니면서……. 에라이! 확 부러져 버려라! 나쁜 놈.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태영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녀석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는데.

“!”

창에 비친 것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로비를 지나는 많은 사람 중에 녀석과 닮은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뒷모습이 빼박 그 녀석인데…… 웬 환자복? 팔에 깁스도 했잖아.

“아닌가?”

태영은 제 두 눈을 의심하며 뒤로 휙 돌았다. 그러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녀석과 닮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태영아!”

엄마가 시야에 나타났다. 태영은 고개를 내밀어 엘리베이터 쪽을 다시 봤지만 녀석과 닮은 뒷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래도 잘못 본 모양이다.

“우리 딸 어딜 그렇게 봐?”

“어? 아, 아냐.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갑자기 위독한 환자가 생겨서.”

“아아. 그, 코드 블루? 아까 방송 나오긴 하던데. 거기 갔었구나……. 그 환잔 어떻게 됐어?”

아까 로비에서 들었던 코드 블루 안내 방송이 생각난 태영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 좋게 된 거야?”

“아니야. 괜찮아졌어.”

“정말?”

“응. 근데 여기까진 왜 왔어?”

엄마의 물음에 태영이 활짝 웃으며 손에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짜라란, 엄마 생일 축하해요!”

“세상에, 이게 뭐야?”

서 간호사가 쇼핑백 안을 들여다봤다. 도시락과 케이크가 있었다.

“도시락은 오빠 선물이고 케이크는 내 선물. 젤 맛있는 걸로 샀으니까 이따 피곤할 때 꼭 먹어.”

“그래, 고맙다.”

“엄마, 선물 하나 더 있어.”

“뭔데?”

“나 앞으로 공부 진짜 진짜 열심히 하려고.”

“왜?”

“왜긴 왜야. 학생이 공부하는 건 당연한 거지.”

“또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됐고. 난 우리 태영이가 건강하기만 하면 돼.”

“치이. 그래도 공부 잘하면 좋잖아.”

“니 오빠만큼 잘할 수 있어?”

“공부하지 말까?”

“농담이야. 근데 갑자기 공부는 왜?”

“나 기자 되려고.”

“응?”

서 간호사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기자? 무슨 기자?”

“방송국 기자. 나 이건욱 기자님처럼 데스크에도 앉을 거야. 누가 그러는데 난 빠른 게 장점이래. 막 시민들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태영이 말끝을 흐렸다.

‘어디든 도움 필요한 곳에 제일 먼저 달려가고, 가서 얘기 들어 주고, 함께 아파하고, 고민해 주고. 넌 그런 애잖아.’

하필 이 순간 제 꿈을 응원해 주던 녀석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처음이었다. 내 꿈을 지지해 주고 믿어 준 사람.

갑자기 가슴속에 뭔가 돋아난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푸른 새싹이 돋아나듯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태영아.”

태영은 엄마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 왜? 엄마 뭐라고 했어?”

“운동은 이제 진짜 안 해도 되냐고.”

“응. 안 해도 돼. 더 하고 싶은 게 생겼으니까. 나 이제 내 모든 힘을 기자 되는 데 다 쏟을 거야.”

한번 꽂히면 무조건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서 간호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운동하느라 몸 쓰다가 부상 오고 다치고 그런 것보단 기자가 낫겠지. 사실 아까 그 코드 블루 환자 너랑 동갑이더라. 학교도 명원고던데…….”

“누구?”

태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최근 2학년 중 누가 큰 사고를 당했다거나 아프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냐면…….”

누군지 말하려던 서 간호사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왜 그래? 이름 생각 안 나?”

“그게 아니라, 이름이 정확하지가 않아.”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내가 괜한 얘길 했네. 그냥 너도 모른 척해. 근데 이 도시락은 태혁이가 직접 만들었나 보네?”

서 간호사가 쇼핑백에서 보온병을 꺼내 들며 물었다.

“니 오빤 잘 있지?”

“그 인간은 엄청 잘 있어서 문제지.”

“오빠한테 그 인간이 뭐야.”

“암튼 엄마,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조만간 우리 셋이 꼭대기 바비큐 가자.”

“좋지. 그날은 1인 1닭 하자.”

“당연한 거 아니야? 난 두 마리도 먹을 수 있어. 대접밥은 세 그릇까지 가능.”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지 입맛을 다시던 태영이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 간호사는 2년 전 처참한 꼴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딸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만 해도 두 번 다시는 딸의 미소를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간 혼자 잘 견뎌 내고 원래처럼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준 태영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서 간호사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하는 딸을 애틋하게 바라봤다.

* * *

저녁을 먹고 당직실에서 나온 서 간호사가 2301호로 향했다.

병실 앞에 도착한 서 간호사는 문 옆에 붙은 환자 이름을 올려다봤다.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이 환자 이름 말이야…….”

“유이반 환자요?”

서 간호사는 아까 병실에서 봤던 명찰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유이반이라고? 유일반이 아니라? 이름 오타 난 거 아니야?”

“아닌데……. 유이반 맞아요. 그 환자 유명하거든요.”

“어째서?”

“아…… 선생님은 저희 병동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모르시겠구나. 그 환자 보호자가 병원장님이시잖아요.”

“아들인가? 아니지, 병원장님은 결혼 안 했잖아. 게다가 유씨도 아니고.”

“지금 그게 미스터리예요. 미혼부라는 소문도 있어요.”

동료 간호사가 누가 들으면 안 되기라도 하듯 작게 속삭였다.

“암튼 유이반 환자 특혜니 뭐니 말이 많아서 어제 잠깐 하급 병실로 이동한 건데, 아까 그 난리가 나서 다시 VIP 병실로 옮겼어요. 전 여기 정리하러 왔구요.”

동료 간호사가 이름표를 교체한 뒤 문을 열었다.

서 간호사가 안을 들여다봤다. 병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 *

“유이반!”

30대 후반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원장 자리에 오른 사지훈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VIP 병실에 들어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이 자리에 만약 사 원장의 부하 직원이 있었다면 다들 무서워서 오줌까지 지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병원 내에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사 원장이었다.

하지만 사 원장이 아무리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다그쳐도 저 18세는 표정에 변화 하나 없다.

환자복을 입은 채 소파에 누워 있던 18세 유이반이 깁스한 팔을 내밀며 사 원장을 향해 말했다.

“이거나 빨리 풀어 줘.”

“새꺄, 뼈가 붙어야 풀지.”

“과잉 진료야. 내가 심장은 몰라도 뼈는 튼튼하거든.”

답도 없는 어린 새끼. 사 원장의 표정은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반은 소파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침대로 향했다.

“여긴 내 자린데…….”

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는 환자를 응시하던 이반의 눈빛이 꽤 쓸쓸해 보였다. 마치 제가 누워 있기라도 한 듯 저와 똑같이 생긴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반은 혼잣말을 읊조렸다.

“니 자리 영영 뺏기기 싫으면 당장 일어나. 일어나라고…….”

그런데 그때였다.

이반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걸까? 환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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