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안 그래도 축축 처지는 월요일 아침. 하필 1교시가 물리라니. 최악의 조합이었다.
“오늘은 기말고사 범위를…….”
“앳취!”
“모태영 일어나.”
태영은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재채기 때문에 코까지 틀어막으며 일어났다.
“오늘은 조용하나 싶더니 이제 하다 하다 재채기 공격이냐?”
“쌤, 제가 재채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 앳취!”
“욘석아, 너 계속 방해할 거면 보건실 가.”
“안 할게요. 재채기 진짜 안 할…… 앳, 애…… 읏.”
“어휴, 저 꼴통. 앉아!”
몸을 배배 꼬며 필사의 힘을 다해 재채기를 참는 태영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물리 선생이 다시 말을 이었다.
“56페이지.”
곧 기말고사라 그런지 오늘따라 반 아이들의 집중도가 장난 아니었다. 조용히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교실. 태영도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열심히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업이 다 끝나고 물리 선생이 태영을 향해 말했다.
“모태영은 교무실로 따라와.”
물리 선생이 나가자마자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난 해니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물리 또 왜 저래?”
“몰라. 재채기 몇 번 한 거 가지고 난리야.”
“근데 너 감기 걸렸어? 얼굴 엄청 빨개. 앗, 뜨거. 열나는데?”
해니가 태영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태영은 제 몸 상태보다 어제 녀석에게 바람맞은 일 때문에 또 열이 뻗쳤다.
“감기 때문이 아니라 열받아서 그래.”
“왜? 무슨 일인데?”
“일단 교무실 갔다 와서 얘기해 줄게.”
태영이 코를 훌쩍이며 서둘러 교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해니가 다시 누워 잠을 자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곤 태영의 자리에 탑처럼 쌓인 교과서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모탱이 웬일로 책을 다 꺼냈지?”
* * *
“쌤, 물리 점수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태영의 질문에 물리 선생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너 정말 많이 아프구나? 담임 쌤한테 말해서 조퇴해.”
“멀쩡하거…… 앳취! 으, 암튼 재채기 땜에 그렇지 저 멀쩡하거든여?”
“아닌데? 너 오늘 많이 이상해. 물리 시험 범위를 다 받아 적지를 않나. 점수를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걸 왜 물어?”
“이번 기말 성적 올리고 싶으니까요. 제가 물리가 제일 약하거든요.”
“과연 그럴까? 내가 듣기론…….”
“아, 쌤. 암튼 저 이번에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그러든지 말든지.”
“근데 저 왜 부르신 거예요?”
물리 선생은 뒤늦게 태영을 부른 이유가 생각났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일반이 오늘 결석했던데 걔 요즘 무슨 일 있니?”
“그걸 또 왜 저한테 물으세요?”
“너희 둘 사귄다며. 혹시 헤어졌니?”
“…….”
태영이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흘끔 눈치를 보던 물리 선생이 넌지시 물었다.
“차였구나?”
“아니거든요? 차도 내가 찰 거예요!”
나쁜 놈. 어제 그렇게 비겁하게 도망가 놓고 연락 한 통 없다니. 게다가 학교까지 안 와?
“암튼 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럼 이제 가도 되죠? 저 공부해야 돼요.”
태영의 입에서 공부 소리를 들은 물리 선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영을 쳐다봤다.
“역시 차였구나? 그 충격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
“쌤!”
“가 봐.”
태영이 물리 선생을 한껏 째려보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빡침 덕분인지 재채기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 * *
“모탱, 혹시 수아랑 연락 돼?”
경시대회도 끝났는데 또 결석인 수아를 해니가 걱정했다. 태영은 수아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 같으면 좋아할 수 있겠어? 유일반 때문에 만년 2등인 내가? 나한테 유일반은 적이야.’
얼마 전 수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태영은 배신감이 들었다.
“……거짓말.”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주말에 전화는 왜 하는데? 적이라면서. 근데 주말에 그 녀석한테 왜 전화를 하냐고. 왜 그 녀석을 데려갔냐고.
갑자기 화난 얼굴로 혼잣말을 하는 태영을 해니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모탱!”
뒤늦게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어?”
“너 무슨 일 있지? 갑자기 안 하던 필기를 하고, 책은 왜 다 꺼낸 거야?”
“나 결심했어! 떳떳하게 내 성적으로, 내 힘으로 대학 갈 거고, 기자 될 거야!”
“쑤쑤 님한테 까였구나? 섭외 엎어졌지?”
해니는 단번에 태영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주말에 쑤쑤 님 만난다더니 잘 안됐나 보네. 유일반이 협조 안 해 줌?”
“도망갔어.”
“뭐?”
“같이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한다고 나가더니 안 돌아왔다구.”
“헐…… 뭔 전화? 뭐 급한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나도 이런저런 생각 다 해 봤는데,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이건 너무한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나한테 되게 중요한 거라고 사정사정해서 데려간 건데…….”
어떻게 수아한테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모든 걸 날려 버리느냐고.
태영은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다.
“나 헤어질 거야. 내가 유일반 차 버릴 거라고.”
“진짜? 너 유일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다 필요 없어. 걘 나 안 좋아하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처음엔 나도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 잘난 유일반이 대체 너랑 왜 사귄다고 한 걸까? 의문이었지. 근데 요샌 딱 보이더라.”
“뭐가 보여?”
“뭐랄까. 유일반 걔 좀 변했다고나 할까? 저번엔 매점을 막 기웃거리면서 애들한테 너 어딨냐고 묻더라고. 걔 하루 종일 니 뒤만 졸졸 따라다니잖아. 급식실에서도 너 없음 밥도 안 먹고.”
“그건…….”
녀석의 머리가 고장 나서 나밖에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랐지만, 태영은 꾹 참고 말을 돌렸다.
“암튼 난 결심했어. 청소년 기자단은 물 건너갔고, 이제 공부로 승부 볼 거야.”
“그냥 유일반이랑 화해하고 맞팔이라도 해 달라고 해서 청소년 기자단에 접수하는 게…….”
“아니야.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게 더 빨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너 공부는……. 아, 알았어. 열심히 해. 모탱 파이팅!”
해니는 태영이 처음으로 공부를 하겠다며 책에 코까지 파묻고 열의를 보이자 걱정이 앞섰다.
* * *
“모탱! 탱! 탱탱탱탱!”
태혁이 방문을 마구 두드리며 방정맞은 목소리로 태영을 불러 댔다. 하지만 안에서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자 태혁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 미쳤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태영을 발견한 태혁이 화들짝 놀랐다.
“대박 무서워. 모탱, 너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서 그 책상 10년 만에 돈값 하게 만드는 거냐고. 돌아가신 아버지 섭섭하게. 뒤늦게 효도하는 거야 뭐야.”
아놔. 저 인간이. 참다못한 태영이 고개를 돌려 태혁을 째려봤다.
“안 나가냐? 나 공부하는 거 안 보여?”
“지금 공부할 때가 아닐 텐데.”
“뭔 소리야?”
“병원 좀 갔다 와. 엄마 오늘 당직이래.”
태혁이 책상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맛있는 냄새가 확 풍기자 태영이 킁, 냄새를 맡으며 쇼핑백 안을 들여다봤다.
“이게 뭐야?”
“보면 몰라? 도시락이잖아. 엄마 드시라고 해.”
“오빠가 가면 되잖아. 나 공부해야 돼.”
“이 불효자. 오늘 엄마 생신이거든?”
“나 양말 어딨지?”
엄마 생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태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말을 찾기 시작했다. 그를 보며 태혁이 혀를 내찼다.
“쯧쯧. 엄마 생신 선물은 샀냐?”
“뭐 사지?”
“병원에서 드시기 편하게 조각 케이크로 사.”
“응.”
양말을 다 신은 태영이 쇼핑백을 품에 안고 현관으로 향했다.
“근데 오빤 같이 안 가?”
태영이 신발을 신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태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병원엔 아는 사람이 많아서 곤란.”
하긴, 오빠 동기들이 다 그 병원에서 인턴 하고 있겠구나. 저래 봬도 저 인간 명원대 의대 수석 입학까지 했는데. 유전자 몰빵이야 뭐야. 난 아무리 책을 들여다봐도 공부는 영 아닌 것 같은데 저 인간은 공부도 잘하고 인정하긴 싫지만 얼굴도…….
“근데 그 좋은 학교 붙어 놓고 대체 왜 안 가? 나도 명원대 가고 싶은데…….”
“지금 가잖아. 명원대 옆에 있는 명원대병원.”
“장난해? 그게 아니라 오빤 왜 복학 안 하냐구.”
태영의 물음에 태혁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픈 사람들 보는 게 힘들어. 아빠 생각 나.”
“…….”
“그런 거 보면 울 엄마도 참 대단하셔.”
훅 들어온 오빠의 말에 태영은 괜히 그 병원에서 병으로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인마, 빨리 가. 더 늦기 전에 엄마 저녁 드셔야지.”
“응!”
태영이 대답과 함께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 Code Blue. Code Blue. 2301호. Code Blue…….
스피커에서 코드 블루 방송이 울리자 간호사와 의사들이 본관 2301호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compression(가슴 압박) 해야겠어.”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심폐 소생술을 하던 의사가 모니터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intubation(기관 내 삽관) 준비 좀 해 주세요!”
생사를 가르는 긴박한 상황. 환자에게 투여할 주사제를 들고 뛰어온 서 간호사는 처참한 심정으로 병실 안을 바라봤다.
환자의 상태는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기만 했고 의료진들은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황급히 주사제를 투여하고 뒤로 빠진 서 간호사의 눈에 병실 소파 위 테이블에 놓인 교복과 명찰이 들어왔다.
자신의 딸 태영과 같은 명원고 교복.
서 간호사는 명찰 속 새겨진 이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유일반?”
환자의 이름을 읊조리던 서 간호사는 다른 오더를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병실을 나가 데스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