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녀석이 주문한 음료를 가지러 카운터로 향했다.
지이잉. 지이잉.
그리고 불행의 서막은 테이블 위에 두고 간 녀석의 핸드폰이 진동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태영은 테이블 위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액정에 뜬 발신인을 확인하곤 두 눈이 커다래졌다.
[수아]
대체 이 주말에 수아가 녀석에게 무슨 볼일이 있기에 전화를 했을까?
나랑 해니한테도 먼저 전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수아인데. 녀석한텐 왜?
게다가 이 녀석, ‘수아’라고 저장했어. ‘권수아’도 아닌 ‘수아’라니.
이쯤 되니 태영은 녀석이 자신을 뭐라고 저장했을지 궁금해졌다.
그사이 수아에게선 더 이상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고, 태영은 냉큼 핸드폰을 꺼내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2반 모태영]
액정에 뜬 문구를 확인한 태영은 실망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 여자 친구는 난데, 나는 왜 ‘2반 모태영’이고, 수아는 ‘수아’냐고.
“야, 보류. 받아.”
녀석이 언제 왔는지 음료를 건넸다. 열받아 죽겠는데 저놈의 보류 소리!
“왜 째려봐?”
녀석은 태영이 음료를 받지 않고 저를 째려보기만 하자 그러든지 말든지 대충 태영의 앞에 음료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다리를 꼬고 앉아 에이드를 마시며 핸드폰 액정에 찍힌 부재중 목록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구겼다.
“너 전화했었냐? 바로 앞에 있는데 왜?”
“그냥. 그냥 해 봤어.”
저장한 이름 바꿔 달라고 하면 유치하다고 뭐라고 하겠지? 됐다. 말을 말자.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태영은 속이 타서 초코라떼가 든 컵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는데.
와르륵.
“앗, 차가!”
갑자기 얼음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얼굴을 강타했다. 각 얼음으로 얼굴을 때려 맞은 태영의 옷이고 얼굴이고 까맣게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풉.”
녀석은 하마터면 에이드를 뿜을 뻔했다. 태영은 똑똑히 보았다. 녀석이 웃음을 참느라 일부러 아래턱에 힘을 빡 주는 것을.
“뭐 해? 나 빨리 휴지 좀.”
태영의 재촉에도 녀석은 느긋한 자세로 두리번거리더니 일어났다. 그러곤 식수대에서 휴지를 잔뜩 챙겨 와 내밀었다.
“하여튼 가지가지 한다. 빨리 닦아.”
“우씨. 저 알바생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얼음 조금 넣어 달랬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니 얼굴만 쳐다보더니. 아우! 나 어떡해. 옷 다 젖었어. 하필 초코라떼…… 으잉.”
태영은 청치마 안에 입은 흰 티가 까맣게 물든 것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녀석은 입고 있던 자신의 청 재킷을 벗어 태영에게 내밀었다.
“입고 있어.”
“어?”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 아직 오려면 멀었지?”
“10분 정도 후면 도착할 것 같은데. 왜?”
“알았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딜?”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의 옷자락을 태영이 꽉 잡았다.
“어디 가려고? 나 쪽팔려서 도망가는 건 아니지?”
“도망갈 거였음 진작 갔지.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갑자기 왜? 그냥 있어. 쑤쑤 님 금방 올 텐데…….”
“나도 금방 올게.”
안 된다며 그냥 있으라고 고집하려던 태영은 하필 녀석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또 보고야 말았다. 액정에 뜬 발신인을.
[수아]
기운 빠진 태영과 달리 녀석은 밖으로 나가야 할 명분을 찾아 다행이라는 듯 핸드폰을 흔들더니 말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녀석의 옷을 꽉 잡고 있던 태영의 손이 스르륵 힘을 잃었고, 그사이 녀석은 서둘러 카페를 벗어났다.
카페 창문 너머로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내다보던 태영은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 * *
“남자 친구는?”
너튜버 쑤쑤이자 송바위 사촌 누나 송설원이 태영의 텅 빈 옆자리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게다가 태영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옷은 남자 친구 옷?”
커다란 청 재킷을 어정쩡하게 걸치고 있던 태영이 멋쩍게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음료를 쏟아서 꼴이……. 그리고 걔는 아니, 남친은 잠깐 전화하러 갔어요. 금방 온댔는데…….”
“괜찮아. 내가 약속 시간보다 좀 빨리 왔는데 뭘. 천천히 기다리자. 나도 뭐 좀 마셔야겠다.”
설원이 쿨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태영은 녀석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말고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
하지만 웬일인지 신호 연결음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핸드폰 전원 끈 거야?
태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응시했다.
* * *
한 손엔 쇼핑백을 든 채 의류 매장에서 나온 녀석의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아까 카페를 나와 옷 가게를 찾는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정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애는 날 위해 창고 문까지 발로 부숴 주겠다는데 이 정도쯤이야.
녀석이 피식 웃으며 다시 카페를 향해 달려가려는데.
지이잉. 지이잉.
손에 쥔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금방 간다니까 그새를 못 참고 그 애가 전화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액정을 확인한 녀석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수아? 권수아? 얜 뭔데 맨날 전화하고 난리야. 짜증 나게.”
오늘만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하는 권수아.
녀석은 언제나 그랬듯 아주 자연스럽게 수신 거절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건너 지름길을 찾아 골목으로 들어섰다.
부릉. 끼이익.
그런데 하필 그곳은 막다른 골목이었고, 뒤쪽엔 언제부터 따라왔는지 모를 오토바이 서너 대가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너 유일반이지?”
“넌 뭔데?”
“나 기억 안 나?”
오토바이에서 내린 남자가 헬멧을 벗었다. 험악하게 생긴 인상. 저번에 태영을 때리려던 그 새끼였다. 아무 잘못도 없는 그 애한테 화풀이나 하는 찌질한 새끼.
중학교 시절 운동부 동료들에게 폭행당했단 사실을 애써 웃으며 덤덤하게 말하던 그 애가 떠오르자 녀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나 바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그 애 아팠던 거 생각하면 내가 지금 너 죽여 버릴 것 같거든.”
“이 새끼 어이없네. 너 눈깔 없냐?”
험악남이 지난날 맞은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친구들을 잔뜩 데려온 모양이다.
덩치 열댓 명이 골목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다들 손에는 야구 배트와 같은 길고 무거운 것들을 쥐고 있었다.
“오늘 죽는 건 너야.”
“글쎄. 난 쉽게 안 죽을걸.”
녀석이 태연한 얼굴로 말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험악남의 표정이 점점 더 비열하게 바뀌었다.
“얘들아! 이 겁대가리 없는 새끼 죽고 싶다는 말 나올 때까지 조져!”
험악남이 소리치자 덩치들이 연장을 땅에 질질 끌며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필 그사이 또 녀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정말 그 애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빨리 가야 되는데. 하지만 어쩐지 쉽게 끝날 것 같진 않았다.
녀석은 혹시 몰라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러곤 쇼핑백 안에서 원피스와 같이 포장된 옷걸이를 꺼내 손에 쥐었다. 이 옷걸이가 녀석에겐 유일한 무기였다.
퍽! 쾅!
그렇게 싸움은 시작되었다.
* * *
“이번엔 진짜 너무한 거 아니니?”
결국 설원이 화를 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앞에 태영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번엔 사고가 있어서 그랬다 쳐. 근데 오늘은 뭐야? 아까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다며. 근데 갑자기 어딜 간 거냐고. 혹시 도망간 거 아니야?”
“아니에요. 그럴 애는 아니에요. 도망갈 거였음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분명 무슨 일이…….”
“핸드폰도 꺼져 있다며.”
“배터리가 다 됐나…….”
“태영아, 니가 바위 친구니까 내가 그냥 편하게 말할게.”
태영이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설원이 단단히 각오라도 한 듯 말했다.
“그 남자애랑 헤어져.”
“네?”
“걘 널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오늘 자리 너한테 중요한 거 아니야? 너 이번에 청소년 기자단 지원하려면 SNS 팔로워 늘려야 한다며. 그럼 이만큼 좋은 기회가 또 어딨어? 이런 사정 그 친구한테도 다 얘기했을 거 아니야. 그럼 잘 알고 있을 텐데 두 번씩이나 이런 식으로 멋대로 펑크 내는 건 아니지. 대체 여자 친구를 뭘로 생각하길래……. 미안. 말이 너무 심했니?”
“…….”
“니가 이해해 줘. 나도 시간 내서 나온 건데 이게 뭐니? 아무튼 이번 촬영은 그냥 없던 일로 하자. 난 다른 애들 찾아볼게. 그럼 간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설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가 버렸다.
그렇게 홀로 남은 태영은 입고 있던 녀석의 청 재킷을 벗어 테이블 위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라도 화풀이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 * *
쏴아.
카페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전혀 비가 내릴 것 같지 않은 하늘이었는데.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마치 오늘의 내 하루 같군. 빌어먹을, 우산도 없는데.
태영은 어차피 옷도 엉망인데 그냥 비를 온몸으로 맞을 생각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운동화에 빗물이 차서인지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만에 하나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런 와중에도 녀석이 걱정되다니. 나도 참 병이다. 병.
차라리 설원 언니 말대로 녀석이 도망간 거였음 좋겠어. 그렇게라도 그냥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태영은 녀석의 청 재킷이 더 젖지 않게 꽉 품에 안은 채 길을 걸었다.
그런데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우산을 내밀고 서 있는 송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또 화가 난 얼굴이다.
“이 멍청한 계집애야!”
송바위가 버럭 소릴 지르며 비에 잔뜩 젖은 태영을 쳐다봤다.
“우산이 없으면 편의점에서 하나 사든가. 아님 태혁이 형한테 연락을 하든가. 왜 비를 맞고 다녀!”
후두둑.
송바위가 머리 위에 씌워 준 우산 위로 빗방울이 거세게 내리는 소리와 함께 잔소리 폭격이 쏟아졌다. 태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니가 뭔 상관인데? 남이사 비를 맞든 말든.”
“설원 누나한테 들었어. 그 새끼 너랑 약속 깨고 토꼈다며?”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왜 안 나타났대? 그 자리 너한테 중요한 거 아니었어?”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비켜. 나 빨리 집에 갈래.”
태영이 송바위가 씌워 준 우산 밑에서 나가려는데.
“그 사정이 뭔지 내가 알 것 같은데. 알려 줄까?”
송바위가 태영의 손에 우산을 쥐여 주며 말했다.
“유일반은 너 안 좋아해.”
“…….”
“그 새끼는 권수아 좋아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둘이 키스하는 거 내가 봤거든.”
“……뭐? 언제?”
“너 유일반이랑 사귄다고 학교 게시판 난리 났던 날. 그날 점심시간 강당 뒤에서.”
태영은 그 순간 하필 녀석의 핸드폰 액정에 뜬 수아의 이름이 떠올랐다. 분명 녀석은 수아한테서 온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애써 부정했지만, 난 사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녀석은 날 버리고 수아에게 갔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