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집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두 사람은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어색했던 태영은 괜히 스트레칭 기구에 앉아 발을 뻗어 보기도 하고, 허리 돌리기 운동을 해 보기도 하며 녀석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녀석은 벤치에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너 설마 지금 우는 건 아니지?”
태영이 녀석에게 조심스레 다가가서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태영을 째려봤다.
“야, 보류! 너 대체 뭐 하는 애냐?”
“아까 일 때문이면 미안. 근데 어쩔 수 없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녀석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제 입술을 손등으로 가리며 태영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멀어졌다. 태영은 자신을 무슨 병균 취급 하는 녀석의 행동에 몹시 기분이 나빴다.
“참 나. 나라고 뭐, 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도둑으로 몰리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런 거지. 그리고 막말로 넌 손해 본 거 없잖아. 나만 여친도 아닌데 너한테 들이대다가 쫓겨난 애 된 거지. 근데 그 아줌마 진짜 기분 나빠!”
태영은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두 사람의 스킨십을 목격하자마자 추 여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도련님 입술을 사수하기 위해 태영의 등짝을 내리치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분리가 되었고, 태영은 부리나케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우씨. 아파.”
태영은 아직도 등이 쓰라린 것 같았다.
“근데 넌 왜 나왔어? 그 아줌마가 뭐래?”
“앞으로 다시는 너랑 같이 다니지 말래. 안 그럼 아버지한테 다 말한대. 공부도 못하고 못생긴 여자애를 집에 데려와서 남사스러운 짓을 당했다고. 성적 떨어지게 생겼다고.”
“뭐? 남사스러워? 못생겨? 치이. 내가 공부 못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그 독사 같은 아줌마 진짜 싫어. 너도 피곤하겠다. 그런 아줌마가 감시자라니.”
“하…….”
녀석은 아까부터 계속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땅 꺼지겠네. 대체 뭐가 문젠데? 열쇠 못 찾아서 그래?”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는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씩씩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태영을 째려봤다.
“너 때문이잖아.”
“넌 뭐 다 나 때문이래? 이번엔 또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경고하는데 다시는 어디 가서 이런 짓 함부로 하지 마.”
“이런 짓 뭐? 마우스 투 마우스? 야, 크게 의미 두지 마. 비상시였잖아. 너도 옛날에 나 수영장에서 구해 줬을 때…….”
“그거랑 이거랑 같냐? 그때 난 아무 감정 없이 널 살리기 위해서…….”
“나돈데? 나도 아무 감정 없이 널 살리려고 그런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태영을 녀석이 어이없게 쳐다봤다.
“그래? 그런 거구나. 나만 미친놈이네.”
의미 없는 마우스 투 마우스에 설레서 지금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 대는 나만 미친놈이야.
“하.”
“갑자기 미친놈처럼 왜 웃어?”
녀석이 실성한 것처럼 웃어 대자 이번엔 태영이 녀석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고 배고파. 그럼 난 이만 집에 가야겠…….”
“가긴 어딜 가!”
녀석이 은근슬쩍 도망가려는 태영의 가방을 확 낚아챘다. 그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시 녀석 앞에 서게 된 태영은 괜히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며 먼 산을 쳐다봤다.
“야, 보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까 일은…….”
“에잇,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됐지?”
남자가 쪼잔하게. 나도 지를 위해서 내 입술 희생한 건데. 태영이 속상한 마음에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나한텐 잘못해도 돼. 근데 다른 데 가선 절대 안 돼. 아까 같은 일 딴 놈한테도 하면 너 진짜 내가 손해 배상 청구할 거야.”
“손해 뭐?”
“못 알아들었음 됐어. 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끝낸 녀석은 붙잡고 있던 가방을 놔 버렸고, 그 바람에 앞으로 튕겨져 나가 넘어질 뻔한 태영은 녀석을 째려봤다.
그리고 한마디 하려던 그때, 하필이면 그때, 내일 쑤쑤와의 미팅이 떠올랐다. 내일도 이 녀석을 데려가지 못하면 너튜브 촬영은 이제 영영 날아가는 것인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지.
태영이 애써 화를 삼키며 빙긋 웃었다.
“근데 유일반 넌 배 안 고프니?”
“밥 사 달라고? 미안한데, 나 지갑 안 가지고 나왔어.”
“무슨 소리야. 저번엔 내가 떡볶이 얻어먹었으니까 오늘은 내가 사 주려고 그러지. 따라와! 내가 이 근처에서 제일 유명한 맛집으로 데려가 줄게!”
태영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녀석을 향해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녀석은 괜히 못 이기는 척하며 태영의 뒤를 따라갔다.
어쩐 일인지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 *
“여기가 맛집이라고?”
가게 밖 주황색 천막 아래 놓인 테이블 서너 개. 그중 한 테이블을 태영과 녀석이 차지했다. 녀석은 삐그덕거리며 돌아가는 바비큐 기계와 허름한 가게를 쳐다봤다.
“아저씨! 맨날 시키던 대로 주세요!”
자주 오는 곳인지 태영이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낡은 테이블을 찝찝하게 쳐다봤다.
“여기 진짜 맛있어. 너도 한번 먹어 보면 맨날 오자고 할걸?”
“글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녀석은 다리를 꼰 채 주변을 살폈다.
허름한 외관과 달리 골목 맨 꼭대기에 자리한 이 가게의 경치는 제법 볼만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가는 동네를 내려다보니 녀석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자, 바비큐 나왔습니다.”
경치를 감상하던 그때 사장님이 양념 바비큐 치킨과 대접 두 그릇을 내려놓았다. 대접 안엔 밥과 참기름 그리고 계란후라이가 올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조합에 녀석이 태영을 쳐다봤다.
“이제 어떻게 먹는 건지 알려 줄게.”
태영이 신이 난 얼굴로 바비큐를 포크 두 개로 쫙쫙 찢어 대접 안에 넣었다. 그렇게 양념소스도 함께 넣어 쓱쓱 비벼 맛있는 치킨비빔밥을 완성시켰다.
“짠. 어서 먹어.”
녀석은 제 앞에 놓인 대접을 들여다봤다. 비주얼은 좀 그렇지만 냄새는 일단 나쁘지 않았다.
“으음. 마시써!”
벌써 흡입을 시작한 태영이 감탄사까지 연발하자 녀석은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밥풀을 볼따구에까지 붙여 가며 먹어?
녀석이 떨떠름한 얼굴로 천천히 수저를 들어 밥을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는데.
“!”
녀석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뭐야?”
“왜? 별로야?”
“뭔데 맛있어?”
달달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혀를 휘감아 식욕을 자극했다.
평소 입이 짧은 녀석이 정말 맛있었는지 밥을 두세 숟가락 연속으로 퍼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태영은 뿌듯했다.
“거봐. 내가 맛집이라고 했지? 나 여기 10년 단골이거든. 초딩 때부터 송바위랑 생일마다 오는 필수 코스.”
“누구?”
갑자기 녀석이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미간을 구겼다.
“방금 송바위라고 했냐? 그 새끼 이름이 여기서 또 왜 나와?”
“친구였었다니까. 2년 전까지만 해도.”
“왜 2년 전이야? 싸웠냐?”
“비밀이야.”
“우리 사이에 비밀 없어야 한다며. 한 팀이니까.”
“어? 그거 아직도 유효한 거야? 그럼 너 내일 내 부탁 들어주는 거지?”
“열쇠 못 찾았잖아.”
“그건 내가 다음 주에 꼭 찾아 줄게. 집에 한 번 더 초대해 줘.”
“과연 추 여사가 널 집에 들여보내 줄까?”
“일단 니가 문만 열어 줘. 그다음은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 볼게. 대신 너도 내일 나 꼭 도와줘야 돼. 응? 시간이랑 장소는 내가 문자로 보낼 테니까 내일 꼭 나와. 알았지? 응?”
태영이 두 손까지 모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뭐 이렇게 절실할까? 녀석은 문득 궁금해졌다.
“운동했었다면서. 근데 꿈이 왜 운동선수가 아니라 기자야?”
“음…… 그건…… 치킨 뜯으면서 말하기는 좀…….”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영을 녀석이 집요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태영이 곧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운동 관둘 수 있게 도와준 게 기자거든.”
“?”
“중학교 때 운동부 동기들이랑 선배들한테 괴롭힘 당했었어.”
뜻밖의 얘기에 녀석은 조금 놀란 듯 태영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부끄러웠는지 태영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
“괜찮긴. 그럼 저번에 너 때리려던 새끼도 그중 하나야? 그 새끼도 너 중학교 때 괴롭혔냐고.”
“아니. 걔는 피해자래.”
“뭔 소리야?”
“내가 나 도와준다는 기자님이랑 손잡고 학교 운동부 고발해서 그 학교 운동부 죄다 없어졌거든. 걘 아마 그때 운동부가 없어져서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이야. 그 심정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후회해?”
“아니. 난 후회 안 해. 지금이 너무너무 좋거든. 반에 들어가면 내 친구들이 있고, 급식도 혼자 안 먹고, 집에도 혼자 안 가고, 이동 수업 때도, 체육 시간에도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까.”
태영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일 니가 하라는 대로 하면 너 기자 될 수 있는 거야?”
“도와주게?”
“나중에 커서 꼭 기자 되라.”
“응! 나 진짜 진짜 이번 꿈은 절대 포기 안 할 거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태영이 저도 모르게 녀석의 손을 꽉 쥐고 발을 동동거렸다.
“손은 왜 잡냐?”
녀석이 괜히 더 퉁명스럽게 말하자 태영이 얼른 손을 놓아 줬다.
“좋아서 그러지. 그런 의미로 우리 밥 한 공기 더 시킬까?”
“니 맘대로 해.”
“사장님! 밥 하나만 더 주세요! 콜라도요!”
환하게 웃는 태영을 녀석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갑자기 너한테 궁금한 게 생겼는데.”
“응. 뭐든 물어봐. 뭐든 대답해 줄게!”
“너 무슨 운동 했었어?”
“말해도 모를 텐데.”
“뭔데?”
태영이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세팍타크로.”
“풉!”
“뭐야. 지금 비웃은 거야?”
전혀 예상치도 못한 종목 이름이 태영의 입에서 나오자 녀석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여자애다.
“너 지금 세팍타크로 무시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왜. 넌 그걸 왜? 푸하하.”
조그맣고 귀여운 태영이 세팍타크로라는 격렬한 운동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버린 녀석은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이렇게 소리까지 내서 크게 웃은 적은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