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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과 2반 사이-24화 (25/67)

[24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면 좋을지 곰곰 생각에 잠겨 있던 태영은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 보니 부탁을 하게 됐지만, 내일 일은 원래 니가 해 주기로 했던 일이었어. 그리고 우리 사귀는 사이거든? 그니까 남친 행세가 아니라, 진짜 내 남친으로 같이 가 주기로 했었는데…….”

“그니까 어딜 가냐고.”

“우리 사귀기로 한 날 니가 나랑 약속한 게 있어.”

“본론만.”

“나랑 커플로 너튜브 출연하기로 했어.”

“뭐? 구라 치지 마.”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녀석이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딜 출연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진짜거든?”

“내가 왜?”

“나의 절실한 마음이 통했나 보지. 유일반은 그런 애였어. 얼마나 따뜻하고 배려심 깊은 애였는데. 분명 지금 니 안에도 그런 게 있을 거야. 남아 있을 거니까 잘 떠올려 봐.”

태영은 주술이라도 걸듯 녀석의 심장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런 태영을 보며 녀석이 비웃음 쳤다.

“꿈 깨. 촬영 그딴 거 절대 못 해. 안 해!”

“열쇠 훔쳐다 줄게! 감방 가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기필코…….”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오느라 고생 많았다. 수고비는 니가 방금 다 먹어 치운 과일이면 되겠지? 이만 가 봐.”

갑자기 녀석이 교과서를 가방에 챙겨 넣더니 태영을 일으켜 품속에 가방을 안겼다. 그러곤 인사했다.

“잘 가.”

“알았어.”

절대 못 간다고 할 줄 알았던 태영이 순순히 인사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며 씨익 웃었다.

“1층 복도 맨 끝에 아줌마 방이 있다고 했지? 가서 다 말할 거야. 너 동아리방에서 사고 나서 머리 고장 났다고.”

“야!”

“내가 말했잖아. 인간관계는 오고 가는 게 중요하다고. 니가 내 부탁 안 들어주면 나도 안 들어줄 거야. 잘 있어!”

태영이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

문이 안 열린다. 위를 올려다보니 녀석이 커다란 손으로 문을 누르고 있었다. 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에 녀석의 커다란 가슴팍이 시야를 막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비켜. 안 그럼 나 소리 지를…….”

“너튜브 그거 뭐 찍는 건데?”

녀석이 정말 하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갑자기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방 안에 있는 스피커에서 웅장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왜 찍는 거냐고.”

녀석이 되물으며 책상으로 가 끄트머리에 기대앉았다. 태영은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자세가 다소 삐딱하긴 했지만 뭔가 얘기를 들어 줄 준비가 된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슬그머니 녀석에게로 다가간 태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내가 기자가 꿈이거든. 그래서 이번 청소년 기자단에 지원하려고 하는데,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내가 스펙이 조금 딸려.”

“하. 조금?”

“지금 비웃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래서 뭐. 계속해.”

망할. 저 자식 아직도 날 비웃고 있어. 태영은 녀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째려보다가 마지못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말이야 스펙이 아주 조. 금. 부족해. 그래서 그걸 커버 칠 수 있는 SNS 계정이 필요한 거지. 기자단 서류 전형에서 SNS를 중요하게 본다고 했거든.”

“그래서?”

“근데 팔로워가 안 느는 거야.”

죽을상을 하는 태영을 보니 대충 감이 왔는지 녀석은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딱 좋은 기회가 왔지 뭐야. 너랑 나랑 사귀는 줄 알고 너튜브 출연 섭외가 들어온 거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부탁을 했고, 넌 도와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우린 사귀게 됐지. 그런데 바로 그날 너한테 사고가 난 거지. 이해했어?”

“어. 그러니까 넌 그 너튜브 출연하고 싶어서 유일반한테 사귀자고 한 거네?”

“역시 이해 못 했구나. 그런 거 아니거든?”

“뭐가 아니야. SNS 팔로워 수 올리려고 접근했다가 둘이 엮여서 소문났고, 섭외 들어왔고, 그다음은 안 봐도 뻔하지. 니가 사귀자고 쫓아다녔겠지.”

뜨끔. 정곡을 찔린 태영은 갑자기 딸꾹질이 나왔다.

“쪼, 쫓아다닌 건, 딸끅, 아니거든? 그냥 얘기 좀 할까 해서 만나러 갔다가.”

“와,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팔로워 때문에 사귀자고 한 거냐?”

“끅.”

태영의 딸꾹질이 심해지자 녀석은 방 안에 있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내밀었다.

“마셔.”

태영은 일단 급한 대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태영은 뒤늦게 녀석의 말에 반박했다.

“꼭 팔로워 때문에 사귀자고 한 건 아니야!”

“팔로워 플러스 너튜브 촬영이겠지.”

“아니라고.”

“그럼?”

“조, 좋아하니까…….”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태영을 녀석이 화가 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곤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

“어떤 면이? 왜? 구체적으로 뭐가 좋았는데?”

“그거야 그…… 일단 넌 내 생명의 은인이잖아.”

“수영장에서 구해 준 거 말하는 거야?”

“어. 넌 내…….”

첫 키스 상대라고 하면 비웃을 게 뻔하겠지. 태영은 일단 그 얘긴 패스하기로 했다. 그리고 찬찬히 녀석이 왜 좋은지에 대해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나도 밥 혼자 먹는 거 싫어하거든.”

“…….”

“아빠는 안 계시고, 엄만 항상 바쁘고, 오빤 맛있는 반찬 다 뺏어 먹어서 같이 먹기 싫고. 근데 니가 나랑 떡볶이도 같이 먹으러 가 주고, 옥상에서 떡볶이도 사 주고, 아! 인형도 뽑아 주고, 그 비싼 초콜릿도 주고……. 너 왜 웃어?”

분명 비웃을 만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지금 무척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녀석은 급기야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려 버리기까지 했다.

“야! 왜 웃냐고!”

저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내가 유일반을 좋아하는 이유가?

태영은 너무 황당해서 녀석이 고개를 돌린 쪽으로 다가가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놔. 배 찢어지겠네. 하.”

얼마나 웃은 건지 녀석은 손등으로 눈가에 묻은 물기를 닦고 있었다. 그러곤 어리둥절한 태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 내가 왜 웃는지 진짜 몰라?”

“어.”

“야. 초콜릿, 급식, 떡볶이 그거 다 나랑 먹었거든? 인형 뽑아 준 것도 나.”

녀석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도 모르겠어?”

태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진지하게 말했다.

“방금 니가 말한 게 진심이면, 니가 좋아하는 건 나라고.”

녀석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영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듯 마구 떨렸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한다고?

다정하고 배려심 끝판왕의 기억을 잃기 전 유일반이 아니라, 유일반인데 전혀 유일반스럽지 않은 막말 폭격기 플러스 욕쟁이 싸가지 이 녀석을?

“아니야!”

다짜고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라고 부인하는 태영을 녀석이 어이없게 쳐다봤다.

“뭐가 아닌데?”

“떡볶이가 좋다는 거지 너가 좋다는 건 아니었어. 솔직히 난 다정하고 배려심 깊고 막 햇살같이 웃는, 기억을 잃기 전의 너가 좋았어. 그래서 사귀자고 한 거라고. 근데 다음 날 갑자기 기억을 잃었다면서 인상 팍, 다정과 배려심은 개나 줘 버린 너가 나타난 거라고. 그래서 쑤쑤 님 미팅도 펑크 나고 일이 다 꼬여 버렸다고.”

“내가 나타나서 다 꼬였다고?”

녀석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태영은 흠칫 놀라 서둘러 변명했다.

“미, 미안. 널 탓하는 건 아니야. 사고는 사고니까. 근데 그래도 너한테 어느 정도 책임이 있으니까…….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약속은 약속이고…….”

“열쇠.”

“응?”

“열쇠 찾아오면 내일 니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 남친 행세를 하라면 하고, 카메라 앞에서 벗으라면 벗고.”

“벗기진 않을게.”

“고맙다 아주. 그니까 열쇠나 가져와.”

어디 한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눈빛을 한 녀석이 턱끝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질세라 태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돌아오더니 빈 접시를 들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쨍그랑.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태영의 행동에 녀석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태영이 다 생각이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열쇠 찾고 싶으면 협조 좀 해 줘.”

* * *

“여사님, 잠깐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다시 유일반스럽게 하얀 셔츠의 맨 위 단추까지 꽉 잠근 녀석이 추 여사에게 다가갔다. 거실에서 화초에 물을 주던 추 여사가 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제 방에서 그릇을 깨트렸어요.”

“어쩌다…….”

생전 안 하는 실수를 했냐고 물으려던 추 여사는 뒤에서 불쑥 나타난 태영을 보곤 혀를 내찼다.

“친구가 깨뜨렸어요?”

“네!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태영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친 덴 없죠? 여기 앉아 있어요. 내가 가서 치울 테니까.”

“여사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시나리오대로 녀석은 추 여사를 따라갔다. 태영은 두 사람이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1층 복도 끝 방을 향해 달려갔다.

“여긴가?”

방이 워낙 많아서 헷갈리긴 했지만, 나머지는 거의 다 창고 수준으로 껌껌했고, 맨 끝에 있는 방 하나만 사람이 머물 만한 곳이었다. 그곳엔 옷장과 화장대 등 오래된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일단 옷장에서 오늘 추 여사가 입고 온 듯한 외투를 발견한 태영은 주머니를 뒤졌다.

“으, 이게 뭔 일이냐. 내가 왜 이러고 있냐구. 으으, 죄송합니다!”

가끔 오빠 방에서 과자 훔쳐 먹은 거 외에는 태어나 처음 해 본 도둑질이었다. 태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철컹.

갑자기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태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디로 숨으면 좋을지 고민할 새도 없이 그렇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

“쉿.”

불행 중 다행으로 들어온 누군가는 녀석이었다. 녀석이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태영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추 여사 지금 내려오고 있어.”

“벌써?”

“몰라. 빨리 나가자.”

녀석이 태영의 손목을 붙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는데.

“도련님!”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녀석을 부르는 추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셨지? 친구도 안 보이네? 도련님!”

추 여사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 이쪽으로 오는 모양인 듯했다. 녀석은 한숨을 내쉬며 뭔가 자포자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태영은 달랐다. 운동선수일 때도 태영은 늘 위기에 강했다. 지금도 딱 그 모습이었다.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

“드라마에서 왜 맨날 그런 장면이 나오나 했는데 이제 딱 이해됐어. 우리한테 지금 필요한 건 그 장면이야.”

“뭐라는 거야?”

갑자기 태영이 녀석의 셔츠 깃을 잡고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보류 딱 10초만 풀자.”

“보류를 갑자기 왜…… 읍!”

그렇게 태영은 막무가내로 녀석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괜히 더 오버액션을 하며 녀석의 목을 끌어안고 드라마에서 배운 키스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태영의 보드라운 입술 촉감에 녀석의 얼굴과 귀가 터질 것처럼 빨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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