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23화 (24/67)
  • [23화]

    태영은 영 찜찜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그렇게 녀석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탄 태영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도로 곳곳 가로수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펴 있었다.

    “날씨 한번 좋다.”

    창문을 열자 따스한 봄바람이 꽃 내음과 함께 불어왔다.

    기막히게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녀석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런지, 태영의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며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와, 진짜 높다.”

    태영은 압도적인 높이의 벽을 올려다봤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녀석의 집이란 이곳 정말 웅장하다. 안에는 더 넓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태영은 제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해니가 추천해 준 꾸민 듯 안 꾸민 패션. 하얀색 조거 팬츠에 후드 티. 힙하다 힙해.

    “흠흠.”

    대문 앞에 선 태영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벨을 눌렀다. 집이 넓어선지 벨 소리에 응답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벨을 세 번 정도 더 누르자 스피커 너머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 태영이구나? 잠깐만 기다려 줄래?

    순간 태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이 다정하고 나긋한 말투……. 유일반인데?

    그렇게 태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데 마침 문이 열리고 녀석이 나타났다.

    “!”

    태영은 이번엔 제 눈을 의심했다.

    앞머리를 덮은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단추를 목까지 꽉 채운 흰 셔츠에 청바지.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제가 원래 알던 유일반이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 가방 무겁겠다. 이리 줘.”

    세상에. 가방 들어 주는 매너까지.

    태영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녀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유일반, 너 기억 돌아온 거야?”

    “기억? 무슨 말이야? 아…… 어제 본 드라마 얘기 하는 거구나?”

    “드라마 말고 너…….”

    “도련님!”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녀석의 뒤로 갑자기 지난번 이 집을 찾아왔을 때 만났던 아줌마가 나타났다.

    “어머, 우리 도련님 오늘 친구랑 스터디한다더니, 여자 친구?”

    “여자 친구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 같은 이과.”

    아줌마의 말에 녀석이 곧장 손사래까지 치며 부인했다. 그러자 아줌마가 민망해하며 사과했다.

    “미안. 나도 참 주책이지? 그나저나 우리 일반 도련님 친구분 거기 서 있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아줌마가 문을 활짝 열고 안을 가리켰다.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간 태영은 넓게 펼쳐진 초록빛 정원에 입성했다. 정원의 규모는 밖에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여기가 집이라고?

    “잠깐, 혹시 저번에 도련님 병원 갔을 때 집에 찾아왔던 학생?”

    “네? 네.”

    아줌마가 뒤늦게 태영을 알아보곤 알은척을 했다.

    “교복을 안 입어서 딴사람인 줄 알았어. 요샌 이런 옷이 유행인가? 세상에, 너무 유치하고 귀엽다.”

    욕이야 칭찬이야? 태영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굳어졌다. 그사이 세 사람은 저택 안으로 들어섰고 내내 조용하던 녀석이 이제야 입을 열었다.

    “여사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친구랑 오늘 저녁까지 공부하기로 했으니까 2층에 간식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어서 올라가세요.”

    아줌마가 태영을 흘끔 보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태영은 왜 이렇게 저 아줌마의 시선이 기분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녀석을 따라 2층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녀석을 향해 물었다.

    “유일반, 너 기억 돌아온 거야?”

    태영의 물음에 녀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아까는 천사, 지금은 악마! 녀석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제발 그놈의 입 좀 다물어.”

    태영이 잔뜩 실망한 기색으로 말했다.

    “헐. 안 돌아왔네? 그럼 너 기억…….”

    녀석이 갑자기 태영의 입을 틀어막으며 작게 속삭였다.

    “입 다물라고. 지금부터 기억 어쩌고 그런 얘기 하지 마.”

    태영은 놀란 얼굴로 녀석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자 녀석이 손을 치우고 태영을 놓아줬다.

    “일단 책부터 꺼내.”

    녀석의 지시대로 태영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작게 말했다.

    “느낌이 왔어. 너 저 아줌마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거지? 너 머리 고장 난 거.”

    “맞아. 저 아줌마한테 걸리면 끝이야.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녀석의 말에 태영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근데 왜 집으로 오라고 한 거야?”

    “니가 훔쳐야 되는 게 집에 있어.”

    “그럼 훔칠 게 아니라 그냥 가지고 나오면 되잖아. 니네 집인데.”

    “저 아줌마 손에 있거든.”

    “대체 뭔데?”

    태영이 묻자 녀석이 공책에 뭔가를 그렸다. 그건 열쇠였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갑자기 녀석이 환하게 웃었다. 또 유일반스럽게 말이다.

    똑똑.

    그때 아주 기가 막히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아줌마가 들어왔다. 놀란 건 태영뿐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태영은 괜히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 교과서를 들여다봤다.

    “어머, 교과서가 깨끗하네? 필기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

    아줌마가 제철 과일이 예쁘게 담긴 접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태영의 교과서를 흘끔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러곤 씨익 웃으며 태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공부 열심히 해요.”

    그렇게 아줌마가 나간 후 태영은 현타가 밀려왔다.

    “있잖아, 유일반. 나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안 나쁘면 사람이냐? 옷 촌스럽다고 지적질에, 너 공부 못하는 거 교과서만 보고도 딱 알아차렸는데, 당연히 기분 나빠야지.”

    “팩폭 그만.”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은 태영은 입을 삐죽 내밀곤 샤인머스캣을 하나 입안에 넣었다.

    “오. 겁나 맛있어.”

    두 눈이 동그래진 태영은 먹는 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과일을 해치운 태영은 배가 부르자 이제야 녀석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너 그거 알아? 니 방이 우리 집보다 크다.”

    “설마.”

    “진짜야. 와, 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부자구나?”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일단 앉지?”

    녀석은 방을 구경하느라 돌아다니던 태영을 끌어다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답답한지 셔츠 맨 위 단추를 풀어 헤쳐 버렸다.

    그런 녀석을 태영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근데 너 아까 연기 되게 잘하더라. 그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학교에선 왜 그런 거야?”

    “니가 있잖아.”

    “내가 뭐.”

    “학교에선 니가 쉴드 쳐 주니까. 근데 여긴 나 혼자잖아.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어쩐지 녀석의 표정이 꽤 쓸쓸해 보였다. 이 큰 방이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태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암튼 너 아까 되게 유일반스러웠어.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서 좋냐?”

    “좋다니 뭐가?”

    “내가 유일반인 척하는 거. 니 말대로 유일반스럽게 행동하는 거. 그게 좋냐고.”

    “……모르겠어.”

    “?”

    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태영의 뜻밖의 대답에 녀석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태영이 천천히 속마음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사실 아까 조금 낯설더라.”

    “…….”

    “난 이제 유일반 같지 않은 니가 더 유일반 같아. 응? 내가 지금 뭐라는 거지?”

    말을 내뱉고서야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태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있잖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원래도 너한테 이런 모습이 잠재되어 있었던 거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잖아.”

    “이런 모습이 어떤 모습인데?”

    “싸가지 없는 거. 성격 지랄맞은 거.”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암튼 훔쳐야 되는 게 열쇠? 그거 어딨는데?”

    태영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녀석은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준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1층 복도 끝에 방이 하나 있어. 거기가 추 여사 방이야. 아마 거기 있을 거야.”

    “근데 무슨 열쇠야?”

    “중요한 열쇠.”

    태영이 녀석을 째려봤다.

    “우리 지금 같은 편이거든? 그렇담 서로 비밀은 없어야지. 어디에 필요한 열쇠인지 똑바로 말해. 안 그럼 협조 못 해.”

    태영이 팔짱을 낀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녀석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우리 집 창고에 내 물건이 있어. 그 창고 열쇠야.”

    “무슨 물건?”

    “엄마 유품.”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유품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약해진 태영은 팔짱을 얼른 풀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줌마를 밖으로 유인할까? 그사이 니가 방에서 열쇠 찾으면 되잖아.”

    “방은 이미 뒤져 봤고, 내 생각엔 아줌마가 몸에 지니고 있거나 외투 주머니나 가방 안에 있을 확률이 커.”

    “그럼 어떡해?”

    “내가 아줌마 옷이랑 가방 뒤지다 걸리면 좀 이상하잖아?”

    “난 안 이상하고?”

    “넌 원래 이상하니까 대충 둘러대면 되지.”

    “야! 그러다 나 걸려서 경찰서 가면 어떡해?”

    “내가 그렇게 놔둘 거 같아?”

    “응. 난 너 못 믿겠어. 그나저나 너 너무한 거 아니야? 이렇게 아무 계획도 없이 날 부른 거야?”

    “니가 잘할 수 있다며. 어떻게든 훔쳐다 준다며.”

    “그거야 니가 내 부탁 들어주면 그러겠다는 거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너 내일 내 부탁 들어줄 거지?”

    “너 오늘 하는 거 봐서 들어준다니까.”

    “그럼 열쇠만 가져오면 되는 거지? 너 약속 꼭 지켜라.”

    “야, 보류. 근데 너야말로 나한테 숨기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우린 서로 비밀이 없어야 한다며. 한 팀이니까.”

    “내, 내가 뭘.”

    찔리는 게 많았던 태영이 말까지 더듬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녀석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마주하니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똑바로 얘기해. 갑자기 보류를 풀어 달라느니, 남친 행세를 해 달라느니, 그게 다 무슨 말인지. 넌 내일 나한테 뭘 부탁하려고 이러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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