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19화 (20/67)

[19화]

“자, 1반 2반 조용!”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탄 2반 담임이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이내 들썩거리던 버스 안이 점차 조용해졌다. 공기에서부터 소풍 가는 학생들의 설레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안 탄 사람 없지?”

“권수아요!”

맨 뒷좌석에 앉은 해니가 외쳤다. 그렇다. 수아는 쇼핑하기로 한 날 저녁부터 오늘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경시대회 준비. 수아는 1등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수아는 오늘 못 온다고 연락 왔었고, 이제 진짜 없지?”

“쌤!”

담임이 마이크를 내려놓기 직전 이번엔 태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유일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영은 연신 창밖을 내다보며 녀석을 찾기 바빴다.

“모태영은 또 왜? 할 말 있니?”

“유일반도 아직 안 왔……. 왔네.”

마침 창밖으로 교장 선생님과 함께 유일반이 어슬렁어슬렁 버스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교복 차림인 걸 보니 아무래도 녀석은 오늘 소풍 가는 날임을 몰랐나 보다.

혼자만 교복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탄 유일반은 담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앞자리에 앉으려다 태영을 발견하곤 뒤쪽으로 걸어왔다.

“비켜.”

“우리 반은 번호대로 앉은 건데…….”

태영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태영을 쳐다봤다.

“지은아 미안해. 안 비켜도 돼. 야, 유일반! 얼른 니 자리 가서 앉아.”

“내 자리가 어딘데?”

“저기.”

태영이 뒤쪽을 가리켰다. 마침 주유권이 얼른 오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안한데 자리 좀 바꿔 줄래? 내가 모태영한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웬일로 녀석이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마치 기억을 잃기 전 유일반처럼 말이다. 근데 또 그게 통했는지 아까완 달리 유일반의 미소에 마음이 녹아 버린 지은이는 흔쾌히 알았다며 짐을 들고 뒷좌석으로 가 버렸다.

털썩. 결국 태영의 옆자리를 차지한 녀석은 태영을 째려봤다.

“야. 얘기를 했어야지. 소풍 가는 줄 모르고 혼자 교실에서 교과서 챙기다가 교장 쌤한테 잡혀 왔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안 오는 건데.”

“니가 너무 학급 일에 관심이 없었던 거 아니야? 맨날 동아리방에만 처박혀 있으니까 모르지.”

“처박혀 있어? 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흠. 미안.”

녀석이 정색하며 말하자 금세 쫄아서 태영이 깨갱했다. 그런 태영을 귀엽게 쳐다보던 녀석이 장난이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사이 버스가 출발했다.

태영은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까만 비닐봉지 하나를 녀석에게 내밀었다.

“뭐야? 쓰레기야?”

“아니거든? 우씨. 기껏 먹으라고 만들어 왔더니만.”

“이게 뭔데?”

까만 봉지에서 쿠키를 꺼낸 녀석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모양새를 살폈다.

“먹는 거 맞아? 폭탄 아니고?”

“아오, 이리 내!”

“농담이야. 먹을게.”

“그거 밀가루 안 들어간 거야. 비건 쿠키.”

“이런 것도 만들 줄 아냐?”

쿠키를 한 입 베어 맛을 본 녀석은 생각보다 맛이 있었는지 다시 한 입 더 베어 먹었다.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태영은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뭔데? 그냥 말해.”

“뭐, 뭐가?”

“이거 뇌물이잖아. 나한테 뭐 부탁할 거라도 있는 모양인데?”

“어떻게 알았어?”

“뭐냐니까.”

“그게 사실은…….”

태영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녀석 분명 싫다고 할 텐데. 사귀는 것도 보류시킨 마당에 고딩 커플 컨셉으로 너튜브에 같이 나가자고 하면 보류가 아니라 아예 헤어지자고 할지도.

“유일반 너 있잖아. 그게……. 아, 너도 너튜브 보지?”

“아니. 관심 없는데?”

“아…… 그, 그렇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말하기 힘들어졌다.

태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제가 싸 온 쿠키를 한입에 넣고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었다. 그사이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녀석이 물었다.

“근데 소풍은 어디로 가는 거냐?”

“너 몰라? 니가 추천한 곳이잖아. 아, 기억 안 나겠구나. 암튼 학기 초에 니가 소풍지로 추천했던 곳이야. 로봇 박물관. 국내에서 제일 큰 곳이래. 넌 좋겠다. 니가 가고 싶었던 곳으로 소풍 가서.”

“그닥.”

“?”

“난 딱히 로봇엔 관심 없거든.”

“응?”

“지겹다고. 그놈의 로봇.”

“아…… 하긴, 너 그 로봇 수리하느라 힘들지? 지금 얼마나 고쳤어?”

“몰라. 엉망진창이야. 대체 어떻게 망가진 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쳐야 되는지 모르겠어.”

녀석은 정말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두 눈을 감았다.

“나 잔다. 도착하면 깨워 줘.”

피곤했는지 두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댄 녀석의 옆모습을 태영이 흘끔 쳐다봤다.

조각 같은 턱선과 베일 듯 날렵한 콧날.

이런 애랑 같이 너튜브 나가면 조회 수 대박 치긴 할 텐데.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태영은 갑자기 없던 욕심까지 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영은 다부진 눈빛으로 다짐했다.

오늘 안에 기필코 유일반에게 출연 허락을 받아 내겠다고.

* * *

앞쪽으론 강이 흐르고 뒤쪽으론 나무가 울창한 숲속이 펼쳐진 이곳은 경기도 남부에 위치한 로봇 박물관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자유 시간이 주어진 학생들은 박물관 주변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고 핫도그와 아이스크림 같은 군것질거리를 사 먹으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너도 내가 한 장 찍어 줄까?”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을 향해 태영이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나 사진 찍는 거 싫어해. 찍히는 건 더더욱.”

“그, 그래? 그럼 영상은? 동영상! 그건 괜찮지 않나?”

“최악이지.”

젠장. 망했다. 태영은 할 말이 없어졌다. 영상 찍는 게 최악인 녀석한테 무슨 소릴 하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송바위 앞에서 나대지나 말걸. 괜히 유일반 섭외 자신 있다고 말했다가 망신만 당하게 생겼네.

태영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대체 어떻게 하면 녀석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박물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콜록!”

녀석이 갑자기 기침을 해 대기 시작했다. 태영이 뒤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계속 제 뒤에 바짝 붙어 졸졸 따라오던 녀석이 저만치 멀리 멈춰 서 있었다. 태영이 쪼르르 녀석에게로 달려갔다.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물, 나 물 좀…….”

“물? 잠깐만.”

갑자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을 찾는 녀석. 태영은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리다가 박물관 뒤쪽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연기가 나는 쪽을 보던 태영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불? 어떡해. 저기 불났나 봐!”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목격한 태영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곳을 향해 달려가려는데.

“가지 마.”

“무슨 소리야. 불 번지기 전에 꺼야지! 소화기가 어딨지?”

가지 말라고 붙잡는 녀석은 보이지도 않는지 태영의 눈은 소화기를 찾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사이 새빨간 불길을 보자 속이 매슥거리고 연기 때문에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던 녀석의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야, 너 왜 그래? 유일반! 정신 차리고 넌 일단 신고부터 해! 아니, 쌤한테 말해야 되나? 아니다 내가 할게!”

“가지…… 말라고! 가지 마.”

“저러다 박물관으로 옮겨붙으면 어떡해! 이럴 시간 없어. 나 간다!”

태영은 저를 붙잡고 놓지 않는 녀석을 세게 뿌리치고 불이 난 지점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불이 났음을 알리고 소화기를 찾아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소화기는 안 보이고 불길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뒤늦게 화재가 발생한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태영은 꿋꿋이 박물관 주변을 뛰어다니며 겨우 소화기 하나를 찾아내 품에 안고 거센 불길로 향했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맞다. 이렇게 뽑고…….”

정확히 소화기 사용법을 인지하고 있던 태영은 안전핀을 뽑아 발화 지점을 향해 정확히 분사했다.

지이이익. 지이익.

그렇게 다행히도 하얀 가루가 날리며 불은 서서히 꺼져 갔다.

* * *

경찰은 CCTV를 통해 화재 원인을 찾아냈다.

원인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 피우다 만 담배꽁초. 몰래 담배를 피우고 도망가다가 실수로 에어컨 실외기에 던지고 간 것이 큰불로 이어진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태영은 로봇 박물관의 대형 화재를 막았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굿즈를 증정받았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태영은 녀석을 찾기 시작했다.

아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하얗게 질린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자 태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점심시간이라 잔디밭 이곳저곳에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그중 녀석은 없었다.

그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 멀리 버스 앞에서 녀석을 발견했다.

녀석은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감싼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태영은 당장 녀석이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달려갔다.

“너 괜찮아?”

태영의 목소리를 들은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영을 차갑게 쳐다봤다.

“유일반, 왜 그래? 너 아픈 건 괜찮…….”

“내가 가지 말랬잖아! 소방차 금방 올 텐데 왜 니가 나서냐고! 왜 나서서…….”

버럭 소리를 지르던 녀석이 말끝을 흐렸다. 녀석은 태영의 발을 쳐다봤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하얀 운동화가 새까매졌다. 게다가 소화기 안전핀을 뽑다가 다쳤는지 태영의 손가락엔 상처가 나 있었다. 그를 본 녀석은 피곤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근데 다음부턴 절대 이런 일에 나서지 마. 제발 부탁이야.”

“…….”

“난 또다시 누가 내 앞에서 위험해지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너도 아까 봤잖아. 나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거.”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에서 녀석의 아픔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태영은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듯 아프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순간 녀석을 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충동은 충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태영은 녀석을 와락 안아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