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17화 (18/67)

[17화]

“저기 있는 책상이랑 의자 좀 가져와.”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녀석은 명령했고, 태영은 구시렁거리며 녀석의 지시대로 옥상 구석에 쌓여 있는 책상과 의자를 동아리방 앞으로 옮겼다. 그러자 녀석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흰 천 쪼가리로 책상을 덮었다.

“우와. 레스토랑 같아!”

“레스토랑 안 가 봤지?”

“그냥 하는 소리지. 근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있던 거야.”

무심하게 말하며 녀석은 하얀색 봉지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태영은 봉지에 새겨진 가게 이름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대박. 이거 우리 어제 갔던 그 가게 떡볶이잖아. 어뜩해, 따뜻하잖아!”

봉지를 만져 본 태영이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냄새 너무 좋아. 근데 이거 왜 따뜻해?”

“방금 사 왔으니까.”

“왜? 너 떡볶이 싫어하잖아.”

“그냥 먹지 마.”

쏟아지는 질문에 하마터면 너 기운 없어 보여서 사 왔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괜히 멋쩍어서 녀석이 서둘러 봉지를 치우려는 척을 하자 태영이 얼른 녀석의 손에서 봉지를 뺏어 들고 마구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팅을 마치고 젓가락을 탁, 반으로 쪼갰다.

“이 떡볶이가 왜 여기에 있고, 나 먹으라고 사 온 건가?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데, 일단 잘 먹겠습니다!”

에라이 몰라. 일단 먹고 보자. 정말 뺏기기 전에.

“맛있냐?”

“으으응.”

“너 아침에 아프단 거 뻥이었지?”

“으응.”

태영이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넌지시 물었다.

“그럼 무슨 일 있었냐?”

태영이 생각에 잠겼다. 가만있어 보자. 아침에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지? 분명 기분 안 좋은 일이었는데…….

아, 맞다! 해니가 그랬어. 아침에 이 녀석이랑 수아랑 단둘이 있었다고.

그리고 이 녀석이 복도 창문 너머로 수아를 애틋하게 쳐다보고 있었어.

나 다 생각났어!

태영은 녀석을 흘겨봤다.

“왜 그렇게 봐?”

“이런 말 하는 거 좀 미안하긴 한데…….”

“그럼 하지 마.”

“근데 니가 꼭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뭔데?”

수아가 너 싫대. 널 적으로 생각한대.

이렇게 말하면 녀석이 상처받으려나? 태영은 갈팡질팡하다가 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녀석이 아무리 미워도 그런 상처를 주긴 싫었다.

“뭐냐니까? 얘가 또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별거 아니야. 그냥, 뭐 그…… 너 교실은 가 봤어?”

“하아…….”

“왜?”

교실 얘기에 녀석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뭔가 화가 나는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말 더럽게 많은 놈 한 명 있어. 교실 갈 때마다 들러붙어서 얼마나 귀찮게 하던지.”

“주유권 말하는 건가?”

“어. 맞아. 근데 걔 뭐 하는 애냐?”

“유일반 찐친.”

“그럴 리가.”

“너랑 중학교 때부터 친했다던데. 어? 너 입학식 전에 있었던 일은 다 기억한다면서. 근데 주유권은 기억 안 나? 같은 중학교 나왔는데?”

“……몰라.”

녀석이 당황한 얼굴로 태영의 시선을 피했다. 태영은 너무 이상했다. 이거 뭐야? 선택적 기억 상실이야?

“이거 너무 수상한데? 너 나한테 거짓말한 거 있지?”

태영이 예리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망설이던 녀석이 말을 꺼냈다.

“나 사실…….”

“응응. 말해. 사실 뭐?”

“과거의 기억도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아.”

태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태영의 얼굴을 흘끔 본 녀석은 역시 안 통하는구나 싶은 마음에 그냥 사실대로 다 털어놓으려고 했는데.

“너한테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나 사실 유일반이 아니…….”

“어뜩해. 나 이제 알았어!”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녀석은 일단 태영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알았다고? 뭘?”

“입학식 전에 있던 일들도 기억이 안 나기 시작했다고 했지?”

“안 나면 왜?”

태영이 까무러치게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 진짜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혹시 그, 그…… 그거 뭐더라? 영환데. 맞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 거기서 여자 주인공이 걸린 병. 너 그런 병 걸린 거 아니야?”

“머리 뭐? 지우개? 그게 뭔데?”

“있어. 옛날 영화. 울 엄마가 정우성 아저씨 찐팬이거든.”

도통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녀석이 태영을 쳐다봤다. 그러자 태영이 이래도 모르겠냐며 힌트를 투척했다.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태영이 콜라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녀석이 바로 대답했다.

“안 사귄다고. 보류라니까.”

“아오. 나도 알거든? 지금 그 얘기 하는 거 아니거든? 영화 속 대사거든? 울 엄마가 하도 봐서 나도 외웠잖아. 그거 볼 때마다 빨리 성인 돼서 소주 마셔 보고 싶었는데.”

“성인 돼서 하고 싶은 게 고작 술 마시는 거야?”

“그럼 넌 뭐 하고 싶은데?”

“글쎄, 난 딱히 내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없다고? 왜? 미래가 보장되어 있어서 그른가?”

“뭐, 그럴지도. 미래가 정해져 있긴 하지.”

“그건 그거고. 그래서 뭐냐고. 성인 되면 뭐가 제일 하고 싶냐고.”

“몰라. 내가 만약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너 소주 마시는 거 구경이나 해야겠다.”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예상치 못한 녀석의 대답에 태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대체 무슨 뜻일까? 왜 저런 쓸쓸한 눈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태영은 너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이 흘렀고 뜻밖에 먼저 말을 꺼낸 건 녀석이었다. 녀석도 진지한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주유권이랑 맨날 붙어 다니면서 나 훔쳐보는 여자앤 누구냐? 니 짝꿍이던데.”

태영이 자연스럽게 녀석의 말을 받아쳤다.

“걔는 특별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눈치가 엄청 빠르거든. 될 수 있으면 말 섞지 말고 무조건 피해.”

“누군데?”

“내 친구.”

“하. 니 친구들은 하나같이 다 왜 그러냐?”

아오. 얜 좋다가 꼭 이래. 태영은 녀석을 째려보며 버럭 화를 냈다.

“내 친구들이 뭐 어때서!”

“너 권수아랑 친하댔지?”

“갑자기 수아는 또 왜?”

먼저 수아 얘기를 꺼낸 녀석을 서운하게 쳐다보던 태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 녀석 수아한테 관심 있는 게 분명해.

“걔랑 가까이 지내지 마.”

“왜? 니가 가까이 지내려고?”

“뭔 소리야. 걔 이상하다니까.”

“아아. 그러셔? 그렇게 이상한 애를 왜 아침부터 둘이 따로 만났을까나?”

“만난 게 아니라 붙잡힌 거지. 아침부터 사람 붙잡고 경시대회 왜 신청 안 했냐고 따지더라. 역시 별로야. 미친 것 같아.”

“경시대회? 그럼 아침에 둘이 그 얘기 한 거야?”

“그럼 뭐. 니 욕이라도 했을까 봐?”

“어? 어! 둘이 내 욕이라도 하나 싶어서 괜히 쫄았네.”

두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에 태영은 안도하며 점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왜 웃냐?”

“내가 언제? 그냥 떡볶이가 너무 맛있어서 웃음이 절로 나오네. 아, 그럼 넌 수아 어떻게 생각해?”

“아까 말했잖아. 미친 것 같다고.”

“미쳤다니. 니가 수아한테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너도 지금 좀 제정신이 아니잖아.”

“야.”

“쏘리.”

“그러는 넌 송바위 어떻게 생각하냐?”

“갑자기 송바위?”

태영은 녀석의 입에서 송바위 이름이 나오자 당황했다.

“너 송바위 알아?”

“역시 맞네. 모태영이 물리책에 고이 간직한 사진 속 주인공이 그 새끼네. 송바위.”

태영은 뒤늦게 물리책 속에 중요한 증명사진 두 장을 꽂아 놓은 것이 떠올랐다.

“아, 물리책! 온 김에 가져가야겠다. 내 물리책 어딨어?”

“버렸어.”

“뭐? 농담하지 말고. 거기 나한테 되게 중요한 거 들어 있단 말야.”

“이거?”

녀석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 줬다.

“뭐야? 그거 왜 구겨져 있어?”

태영이 냉큼 녀석에게서 사진을 뺏어 꼬깃한 증명사진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녀석의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들끓기 시작했다.

“너 걔랑도 같이 사진 찍으러 갔었냐? 떡볶이도 먹고? 인형 뽑기 게임도 하고?”

“뭐래. 우리 이제 그런 거 같이 안 하거든?”

“했었다는 얘기네?”

“그랬었지.”

녀석의 아래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둘이 무슨 사이라도 되냐?”

“그냥 조금…… 아니, 많이? 친했던 사이랄까.”

그 시절이 왠지 아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태영은 문득 송바위와 뭐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지냈던 날들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야, 그 새끼 생각 그만해.”

“아얏.”

태영은 갑자기 녀석에게 딱밤을 맞고 말았다.

“와. 어이없어. 내가 누굴 생각하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이야? 왜 때려! 너도 한번 맞아 봐라!”

태영도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 타격도 입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니,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엄청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달까.

“모태영, 넌 내 여친이야.”

“보, 보류라며.”

태영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순간 고백받은 줄.

“보류여도 내 여친이야. 그니까 딴 놈 사진 책에 꽂아 놓고 그런 짓 하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내로남불이냐? 지는 내 앞에서 이상형이 수아라고 뻔뻔하게 말할 땐 언제고.”

“아니라고. 권수아 내 이상형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 귀로 똑똑히 들었구만.”

“그럼 다시 똑똑히 들어. 난 귀여운 거 좋아해.”

“!”

녀석이 태영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누구처럼 귀여운 여자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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