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어디 아프냐?”
녀석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 한마디에 태영의 심장이 또 쿵,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아프냐고.”
“그래, 아프다!”
너랑 있으면 심장이 아파 죽겠다고. 급기야 태영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걸 본 녀석이 당황해 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빨리 가. 나 쉴 거야.”
눈물까지 보인 게 너무 쪽팔렸던 태영은 괜히 더 차갑게 말하곤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녀석이 앉아 있는 오른쪽에 가 있었다.
녀석이 일어나는 소리, 의자를 끌어다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는 소리, 녀석이 가는 발걸음 소리.
태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정말 녀석이 갔는지 두리번거렸다.
“유일반 갔어.”
언제부터 있었는지 해니가 옆자리에 앉아 팔을 괸 채 태영을 보며 히죽 웃었다.
“벌써부터 사랑싸움이야? 아주 살벌하던데?”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몰라. 괜히 막 짜증 나. 그리고 나 어제부터 몸이 좀 아픈 거 같아.”
“어디가 아픈데?”
“심장. 막 갑자기 빨리 뛰기도 하고, 또 어떨 땐 엄청 기분 나쁘게 아파. 왜 있잖아. 막 몰라. 설명을 못 하겠어. 처음 겪어 본 일이야.”
태영의 고민에 해니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야?”
“그치? 그래야겠지?”
“어. 당장 가 봐. 너희 엄마 간호사잖아. 일단 물어보든가.”
“울 엄마 바쁜 거 알잖아. 언제 얼굴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너희 오빠한테 물어봐. 의대생이잖아.”
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의대생은 무슨. 그 인간 뭐 개발자 되겠다고 휴학한 지가 언젠데.”
“모탱.”
태영이 언제 아팠냐는 듯 신나게 오빠 흉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니가 심각한 얼굴로 태영을 불렀다. 태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응?”
“유일반 다시 왔는데?”
“뭐?”
수업 시작 1분 전. 정말 해니의 말대로 갑자기 뒷문이 열리고 녀석이 나타났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몽땅 녀석에게로 쏠렸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태영 앞에 딱 서더니.
툭.
녀석이 책상 위에 뭔가를 내던졌다.
태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녀석이 제 책상 위에 던진 것을 쳐다봤다.
초콜릿이었다.
제가 어제 담배로 오해했던 그 초콜릿. 달라니까 녀석이 한 박스나 몽땅 줬는데 너무 맛있어서 쉬는 시간에 다 먹어 치워 버린 그 초콜릿.
“먹어.”
“어?”
“먹으라고. 너 그거 좋아하잖아.”
녀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태영은 주변을 의식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잘 먹을게. 근데 이거 주려고 온 거야?”
“…….”
녀석이 뭔가 핑곗거리를 찾다가 태영의 책상 위에 놓인 물리책을 집어 들며 말했다.
“빌려줘. 다음 교시 물린데 책이 없어.”
“어…… 아, 알았어.”
그렇게 녀석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바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꺅! 모탱, 미쳤어 미쳤어!”
해니가 태영의 팔을 마구 때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방금 봤어? ‘먹어, 너 그거 좋아하잖아.’라니. 유일반 보기보다 겁나 쿨하다? 상남자! 너 아프다니까 초콜릿 주러 왔나 봐.”
“물리책 빌리러 왔다잖아.”
“넌 그걸 믿냐? 1반 다음 교시 수학이거든?”
해니가 유권이 때문에 갖고 있던 1반 시간표를 들이밀며 말했다. 정말 다음 교시는 수학이었다.
그럼 물리책 빌리러 온 게 아니라 나한테 초콜릿 주려고 온 거라고? 왜?
태영이 의아한 얼굴로 초콜릿과 녀석이 나간 문 쪽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 * *
한편, 수학 수업이 한창인 교실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간 녀석은 난간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 하지만 그의 얼굴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무슨 일 있나?”
그는 아까 태영이 복도에서 저를 피한 것도 모자라 교실에서까지 무시하던 게 떠올라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지. 어제 떡볶이도 사 주고 인형도 뽑아 줬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정말 어디 아픈가?
“아오. 모르겠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필요도 없는데 괜히 빌려 온 물리책을 테이블 위에 툭 내던졌다.
그런데 책 안에서 웬 사진 하나가 삐져나오더니 나풀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바닥에서 주워 든 건 증명사진이었다. 사진 속 주인공의 얼굴을 본 그의 표정이 돌연 굳어졌다.
처음 보는 남자애였다.
“모태영은 왜 이딴 걸 지 책에 넣고 다녀?”
갑자기 확 열이 뻗친 그는 단번에 사진을 구겨 버렸다.
* * *
점심시간 태영이 향한 곳은 급식실이 아닌 보건실이었다.
수아가 보건실로 바로 등교해서 여태껏 교실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버린 까닭이었다. 종종 있는 일이라 해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태영은 걱정이 돼서 찾아왔다.
수아가 싫다고 해도 무조건 급식실로 데려가 밥을 먹여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태영은 보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수아는 맨 끝자리 침대 위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저기…… 수아야?”
태영이 조심스레 수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잔뜩 예민한 얼굴로 수아가 고개를 들었다. 흠칫 놀란 태영이 미안해하며 배시시 웃었다.
“방해해서 미안.”
“왜 왔어?”
“밥 먹으러 가자.”
“난 별로 생각 없어. 너나 얼른 가서 먹어. 난 이거 마저 풀어야 돼.”
수아가 다시 문제집을 들여다봤다. 표정이 어찌나 차가운지 말도 못 붙이겠네. 태영은 쭈뼛거리며 서 있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너 없으면 나 혼자 먹어야 되는…….”
“유일반 있잖아. 니 남친.”
태영의 말을 자르고 수아가 차갑게 말했다. 태영은 놀란 눈으로 수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수아가 어딘가 화가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둘이 사귄다며. 그니까 둘이 먹으라고.”
“아…… 그, 그게…… 그렇긴 한데……. 내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혹시 유일반 좋아해?”
“좋아하면 어쩔 건데?”
태영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수아가 유일반을 좋아하고, 유일반도 수아가 이상형이랬으니까…… 결과는 뻔했다.
“내가 포기할게.”
“…….”
“괜찮아. 우리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사실 그 녀석은 기억도 잃은 데다, 결정적으로 날 안 좋아하거든, 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태영은 꾹 삼켰다.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너 유일반 많이 좋아하지?”
“아니거든? 아니야. 진짜 아니야! 아니고…… 그니까 많이는 아니고…… 조, 조금 좋아해.”
수아의 물음에 태영이 강하게 부정하다가 너무 과한 것 같아 살짝 말을 바꿨다. 그렇다고 내가 녀석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자 수아가 무슨 일에선지 웃음을 터뜨렸다. 태영이 멋쩍어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왜 웃어?”
“니가 걔를 많이 좋아하든 조금 좋아하든 상관없어. 난 유일반 안 좋아하니까.”
“어?”
“나 사실 유일반 싫어해.”
“싫다고? 왜?”
“너 같으면 좋아할 수 있겠어? 유일반 때문에 만년 2등인 내가? 나한테 유일반은 적이야. 그런 놈이 내 친구랑 사귄다니까 처음엔 좀 화가 났어. 근데 친구 연애사에까지 간섭하는 건 너무 쪼잔한 것 같아서 그만두려고. 그러니까 너 편한 대로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
태영은 기분이 묘했다. 뭔가 수아가 짠하면서도 수아가 녀석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말에 안심이 됐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태영아, 이만 나가 줬으면 좋겠어. 보다시피 이번 경시대회 무조건 우승해야 돼. 이번 대회에 유일반이 참가 안 하거든. 1등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부탁할게.”
“어! 알았어. 바로 나갈게.”
수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태영은 서둘러 보건실을 뛰쳐나왔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거였다니…….”
태영은 보건실 문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럼 어제 옥상에서도 수아가 나한테 차갑게 군 이유가 그거였어? 자신이 싫어하는 유일반과 내가 같이 있어서?
정말 생각도 못 한 전개였다. 수아가 유일반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태영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급식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쿵.
누군가의 가슴팍에 이마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아얏.”
태영이 고개를 들어 단단한 가슴팍의 주인공을 올려다봤다.
“이제 안 피하네?”
녀석이 비아냥거리며 서 있었다. 태영은 어쩐지 녀석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너 이제 어떡하니? 니 이상형 권수아가 너 싫단다. 푸하하. 쌤통이다. 뭐? 수아가 지 여친이면 차라리 좋았겠다고? 꿈 깨셔!
태영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너 미쳤냐? 왜 사람을 보고 실실 쪼개? 아프다더니 정신 줄 놨어?”
“우이씨, 뭐? 정신 줄을 놔?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냐?”
“소리 지르는 거 보니까 다 나았나 보네.”
“그래. 다 나았다 어쩔래? 암튼 나 지금 바빠. 간다.”
태영이 서둘러 급식실로 향하려고 몸을 틀었는데. 녀석이 어깨를 잡아끌었다.
“아, 왜?”
“급식실 문 닫았거든?”
“뭐? 벌써?”
“벌써가 아니지. 점심시간 다 끝나 가는데.”
“헐…… 진짜네?”
태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살폈다. 정말 점심시간이 이제 10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태영이 배를 움켜잡았다. 근데 이상했다. 또 소리가 났다. 이번엔 태영의 배가 아니었다. 태영이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설마 너도 밥 안 먹었어?”
“나 혼자 먹는 거 싫어해.”
“다른 친구들이랑 먹지.”
“내가 친구가 어딨냐? 암튼 옥상으로 가자.”
녀석이 먼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가며 태영이 외쳤다.
“옥상은 왜? 배고픈데 매점 먼저 갔다가 가면 안 될까?”
고개를 돌린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태영을 쳐다봤다.
“떡볶이 먹기 싫어?”
“먹고 싶어!”
“그럼 조용히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