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15화 (16/67)

[15화]

“모탱, 너 어떡해? 사실 어제 수아가…….”

“수아가 왜?”

“좀 이상하더라고. 너랑 유일반 진짜 사귀는 거냐고 묻더니…….”

“묻더니?”

“사귀는 거 맞다고 하니까 정색하더라고.”

태영은 어제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제게 생각 없다며 차갑게 굴던 수아를 떠올렸다.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 거겠지.”

“근데 내 느낌엔 수아 걔 유일반 좋아하는 것 같아.”

“뭐?”

“내 촉이 딱 그래.”

해니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태영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그를 본 해니가 얼른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현 여친은 모탱 너잖아. 유일반 걔가 바람피울 성격도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마.”

순간 태영은 어제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차라리 권수아랑 사귀는 거라면 믿겠다. 걔가 오히려 이상형에 가깝…….’

그랬다. 녀석의 이상형은 내가 아니라 수아라고 했다. 그런데 수아까지 녀석을 좋아한다면…….

태영은 절망적이었다.

“저, 저기…… 모탱?”

갑자기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버린 태영을 해니가 안쓰럽게 쳐다봤다.

“괜찮아?”

“아니. 나 안 괜찮은 것 같아. 수아도 유일반을 좋아하는 거면 내가 물러나는 게 맞는 거겠지?”

“뭔 소리야? 유일반은 널 좋아하잖아. 수아가 아니라.”

“…….”

태영은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헷갈리기 시작한 거다.

분명 유일반도 날 좋아해서 사귀자는 내 고백에 응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다. 어쩌면 유일반이 그냥 내가 불쌍해서 사귀어 준 걸지도.

지금 가장 절망적인 건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녀석의 기억이 돌아와야만 풀 수 있다는 거였다.

“모탱!”

생각에 잠겨 있느라 뒤늦게 해니의 목소리를 들은 태영이 움찔 놀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뭐 이것저것.”

“너 유일반이랑 송바위 증명사진은 구해 왔어?”

“아!”

뒤늦게 물리 선생과의 약속이 떠오른 태영은 낭패감이 깃든 얼굴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못 구했어? 누구? 송바위?”

“응. 어제 만나서 내 사정 다 얘기했는데도 딱 잘라 거절하더라. 나쁜 놈! 걘 내가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빌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놈이야. 몰라, 그냥 벌점 받지 뭐.”

“지금 니 성적에 벌점까지 꽉 차면 대학 원서 쓸 때 불리하지 않아? 그럼 청소년 기자단 합격해도 의미 없잖아. 자소서 훌륭하면 뭐 해. 벌점이 만땅…….”

“팩폭 그만해라.”

“그러지 말고 그냥 송바위한테 한 번 더 부탁해 봐. 이따 쉬는 시간에 잠깐 나가서 사진 찍으면 금방 나오잖아.”

“……그럴까? 으, 아니야. 난 못 해. 최니 니가 대신 구해다 주면 안 될까?”

“아, 문제가 하나가 더 있다.”

“뭔데?”

“송바위 걔 오늘 학교 나왔을까?”

“아…….”

결석을 밥 먹듯 하는 송바위가 오늘 학교에 안 나왔다면 모든 게 끝.

어제 어렵게 유일반 증명사진 얻어서 다 해결될 줄 알았건만, 의외의 복병이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이야.

“모탱, 근데 유일반 증명사진은 어때? 나 좀 보여 주라. 궁금해.”

태영은 치마 주머니에 고이 넣어 놨던 녀석의 증명사진을 꺼내 해니에게 보여 줬다. 사진을 확인한 해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진짜 유일반 맞아?”

“어? 어. 왜?”

“표정이 왜 이래? 완전 딴사람 같아. 냉기가 흐른달까.”

“냉기는 무슨. 그냥 어색해서 표정이 그렇게 나온 거지. 이리 줘.”

태영은 녀석이 기억과 함께 표정까지 같이 잃었다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고 사진을 도로 뺏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유권이도 유일반 걔 좀 이상하댔어.”

“왜? 뭐가 이상한데?”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태영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해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해니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작게 말했다.

“유일반이 유권일 못 알아봤대. 인사했는데도 씹혔다던데?”

“에이, 못 봤겠지.”

“그른가? 근데 유권이 말론 완전 딴사람 같았대.”

“걔 요새 그 로봇대회 준비하느라 정신없어서 그런 걸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니, 늦었다. 빨리 뛰자.”

태영은 말을 돌리기 위해 해니의 팔을 잡고 얼른 교실로 달려갔다.

“대박. 모탱, 저기 봐 봐.”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해니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쟤가 웬일로 이 시간에 등교했지?”

해니가 가리킨 곳은 창가 쪽 제일 끝자리. 그곳엔 송바위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태영은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습 준비를 위해 책상에서 문제집을 꺼냈는데.

“!”

바닥으로 뭔가 나풀대며 떨어졌다. 겨우 손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낚아챈 태영은 손바닥을 펼쳤다. 그것의 정체는 증명사진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송바위.

입술에 상처가 있는 걸로 보아 이건 어제 혹은 오늘 찍은 게 분명했다.

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책상에 엎드려 따사로운 햇볕을 이불 삼아 편히 자고 있는 송바위의 커다란 등을 응시했다.

* * *

1교시는 물리. 시작종이 울림과 동시에 태영은 물리책보다 먼저 꺼낸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유일반과 송바위의 증명사진.

“모탱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그 두 사람 증명사진을 손에 넣었냐?”

“그러게나 말이다. 송바위 얘는 이렇게 줄 거면서 어젠 왜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군 건지.”

태영은 구시렁거리며 창가 쪽 빈자리를 쳐다봤다.

“송바위 걔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뭐래.”

“그런 게 아니고서야 학교는 왜 왔냐고. 어차피 자습 시간 끝나자마자 집에 갈 것을. 너한테 사진 주려고 일부러 온 거지.”

“말도 안 돼. 그냥 근처에 볼일 있어서 학교 잠깐 왔겠지. 아님 밀린 잠 보충하려고 왔다든가.”

“아니라니까. 백퍼 너 좋아하는 거라니까.”

확신에 찬 해니와 달리 태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넌 몰라. 걔 나 되게 싫어해. 나도 마찬가지고.”

“너네 대체 왜 싸운 거야? 어렸을 땐 친했다며.”

“사실 중학교 때…….”

“얘들아! 1교시 음악으로 바뀌었대!”

태영이 중학교 때 송바위와 있었던 일화를 말하려고 하던 그때 반장이 앞문으로 들어와 크게 외쳤다. 그러자 태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해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떡해. 나 음악책 없는데. 모탱, 나 유권이한테 책 빌려 올게!”

해니가 후다닥 교실을 벗어났고 태영은 서둘러 들고 있던 유일반과 송바위의 증명사진을 물리책에 꽂아 넣은 후 사물함으로 향했다. 다행히 태영의 사물함 안엔 음악책이 있었다.

“음악 쌤이 음악실로 오래! 빨리!”

반장이 재촉했다. 무섭기로 소문난 음악 선생이었기에 반 아이들도 무슨 전쟁이라도 난 듯 미친 속도로 교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휩쓸려 태영도 부랴부랴 음악실로 전속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음악 수업을 끝내고 화장실로 향한 태영은 손을 닦으며 속으로 물리 선생 욕을 중얼거렸다.

물리 쌤 너무한 거 아니야? 출장 갈 거였으면서 왜 오늘까지 증명사진 가져오라고 그렇게 닦달한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어제 아주 그 난리를 쳤구만.

유일반에게 사정사정해서 사진관에 데려가질 않나, 송바위에게 먼저 말까지 걸었다고. 아오, 수치스러워.

하여튼 과목 중엔 물리가 제일 싫고, 쌤들 중에서도 물리가 제일 싫어!

잔뜩 억울한 얼굴로 화장실을 나온 태영은 복도를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멀지 않은 곳에 유일반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복도 창문에 기대어 어딘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은척을 하려던 태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의 시선이 창문 아래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었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내 친구 수아였다.

태영은 순간 오늘 아침 학교 앞에서 수아와 유일반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해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수아를 지켜보는 유일반의 눈빛.

저 눈빛은 뭐지? 그래, 어제저녁 수아가 학원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볼 때도 저 녀석 저런 눈빛이었어. 애틋하달까? 뭔가 다가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뭐 그런? 설마 저 녀석 수아 좋아하나? 그럼 나는? 난 그냥 불쌍해서 사귀어 준 거고? 게다가 해니의 말대로 수아도 유일반을 좋아하는 거면…….

이게 뭐야! 나만 빠져 주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거잖아?

태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하필 그 순간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녀석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태영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더니 녀석을 피해 교실로 도망가 버렸다.

“으, 내가 왜 도망갔지?”

책상에 엎드려 발을 동동거리던 태영은 잘못한 것도 없는 자신이 도망친 게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아 짜증이 났다.

게다가 이놈의 심장은 또 왜 이렇게 쥐어짜듯 아픈 거야?

나 진짜 죽을병 걸렸나? 아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남친이 딴 여자 좋아하고, 그 딴 여자가 내 친구고, 내 친구도 내 남친 좋아하고. 뭐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이 다 있냐고!

정말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

급기야 태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짜 확 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태영을 불렀다.

“저기…….”

태영이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봤다. 반 아이 중 한 명이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지은아 왜?”

“밖에서 누가 너 좀 데리고 나오래.”

“누가?”

태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지은이가 가리킨 뒷문 쪽을 쳐다봤다. 그곳엔 유일반이 벽에 기댄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태영은 저도 모르게 또 녀석의 시선을 휙 피한 채 책상에 도로 엎드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지은이에게 부탁했다.

“지은아, 정말정말 미안한데, 나 바빠서 못 나간다고 전해 줄…….”

“뭐가 그렇게 바쁜데?”

“옴마얏!”

태영이 기겁을 하며 놀랐다. 녀석이 바로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더니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그 기세에 눌린 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하나둘 태영의 주변을 피하기 시작했다.

“너 나 왜 피하냐?”

태영은 여전히 녀석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먼 산을 보며 대답했다.

“내가 뭘.”

“지금도 나 안 쳐다보잖아.”

녀석은 아까 복도에서부터 저와 눈도 안 마주치는 태영을 골이 난 얼굴로 쳐다보다가 안 되겠는지 태영의 턱을 잡아 돌려 저를 보게 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녀석이 태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뭐, 뭘!”

“어디 아프냐?”

녀석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 한마디에 태영의 심장이 또 쿵,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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