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14화 (15/67)

[14화]

태영은 작년 축제 때를 떠올리며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스틱을 움직이는 녀석의 화려한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이 씨.”

미숙한 조작 때문에 집게는 갈피를 잃었고, 엉뚱한 곳에 처박히고 말았다. 녀석이 작게 욕을 읊조렸다.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모양이다.

그렇게 똥손의 활약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태영은 혼란스러웠다. 또 심장이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원래의 유일반에게서 볼 수 없는 이 하찮음이 너무, 너무…….

‘귀엽잖아!’

태영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젠장. 이거 왜 이따구냐?”

녀석이 버럭 화를 내며 또다시 지갑을 열었다.

“야, 보류. 현금 좀 바꿔 와.”

녀석이 태영의 손에 지폐를 쥐여 줬다. 제 손에 녀석의 손이 닿자 태영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녀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지갑에서 또 한 장의 지폐를 꺼내 태영의 손에 쥐여 줬다.

“심부름값. 됐지?”

또 녀석의 손이 제 손에 닿자 태영은 이제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안 되겠다 싶었던 태영은 후다닥 지폐 교환기로 달려갔다.

“미쳤어. 나 왜 이러지?”

아까 떡볶이 가게에서 녀석의 미소를 본 이후부터 태영은 자꾸만 명치 아래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체했나?”

아니지. 소화력 하난 끝내주는 강철 위장이 체했을 리는 없고. 그럼 대체 오늘 왜 이러냐고. 태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지폐를 바꿔 들고 다시 녀석에게로 향했다.

“아오. 짜증 나.”

또 기계에게 당한 모양인지 녀석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인형 하나에 목숨 걸고 막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하는 녀석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태영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풉!”

그 소리에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나 비웃냐?”

“당연하지. 너 또 과거의 유일반이랑 비교한다 어쩐다 뭐라 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럼 하지 마.”

“해야겠어. 너 작년 축제 때 뽑기왕이었어. 그때 인형을 몇 개 뽑았더라? 암튼 같은 반 여자애들한테 두 개씩은 나눠 줬을걸? 나도 받고 싶었는데……. 그때 같은 반이었음 좋았을 텐데…….”

“돈이나 내놔.”

녀석이 어쩐지 화가 난 얼굴로 태영이 손에 쥔 지폐를 낚아챘다. 그러곤 다시 기계 앞에 섰다. 뭔가 이번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녀석의 얼굴엔 오기가 가득했다.

태영은 흠칫 놀랐다. 이런 상태면 인형을 뽑을 때까지 집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태영은 슬며시 말을 꺼냈다.

“있잖아. 저기 오른쪽 구석에 있는 모자를 잡아 보는 건 어때? 고리에 걸면 쉬울 텐데.”

“싫어.”

녀석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스틱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집게는 또 몽몽이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 왜 자꾸 몽몽이만 잡으려고 해? 그게 제일 어려운데.”

“니가 갖고 싶다며.”

녀석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버튼을 툭, 하고 눌렀다. 그 소리와 함께 태영의 심장도 쿵, 하고 내려앉아 버렸다.

집게가 몽몽이를 잡아 올리는 그 순간, 태영은 깨닫고 말았다.

어떡해…… 나 심장병 걸렸나 봐.

녀석은 태영의 속도 모르고 또 아까와 같은 환한 미소를 보이며 드디어 구출에 성공한 몽몽이를 내밀었다.

“가져.”

태영은 또 한 번 세차게 뛰는 심장을 움켜잡으며 녀석이 내민 몽몽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 *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들어선 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깐 그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더니 녀석과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자마자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시적인 현상인 건가?”

내일 당장 병원에 가 볼 생각까지 했던 태영은 손에 쥔 몽몽이를 바라봤다.

‘니가 갖고 싶다며.’

무심한 얼굴로 말하던 녀석이 떠오르자 또 심장이 찌르르.

“뭐야 이거. 이거 뭐지? 왜 그 녀석만 생각하면 심장이 왜…….”

태영은 몽몽이를 품에 꽉 안은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릉. 끼익.

갑자기 옆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섰다. 헬멧을 벗자 드러난 얼굴은 송바위였다.

녀석은 또 싸우고 왔는지 입술이 터져 있었다.

하여튼 안 좋은 건 다 한다니까. 아줌마가 그렇게 오토바이 타지 말라고 사정사정을 했는데, 나쁜 놈!

태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송바위를 흘겨봤다. 그러곤 언제나처럼 송바위를 못 본 척 그냥 집에 들어가려는데.

‘모태영이 넌 다음 주 월요일까지 유일반이랑 송바위 사진 채워 놔. 안 그럼 벌점이다.’

하필 물리 선생의 말이 딱 떠오르고 말았다.

일단 유일반 증명사진은 확보했으니 이제 송바위 것만 있으면 벌점은 면할 수 있는데……. 아니야. 먼저 말 거는 건 죽어도 싫어. 그냥 집에 가서 앨범 좀 뒤져 보자. 어딘가 송바위 사진 하나쯤은 있을 거야. 그거 오려 가면 되지……가 아니라. 그 깐깐한 물리 선생이 그냥 넘어가 줄 리가 없겠지? 나 어떡하지?

태영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러곤 현관 문고리를 잡은 채 송바위 쪽을 흘끔 쳐다봤다. 마침 오토바이 주차를 마친 녀석이 집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송바위!”

태영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송바위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태영을 쳐다봤다.

이미 엎질러진 물. 태영이 눈 한 번 딱 감았다 뜬 후 말을 이었다.

“너 혹시 집에 증명사진 있어?”

“왜?”

“내가 좀 필요해서. 아, 개인적으로 필요한 건 아니고 출석부에 너만 증명사진이 없어서. 물리가 채워 넣으라고 해서. 안 그럼 나 벌점 먹인다고 해서…….”

“없어.”

송바위가 말을 잘라먹었다. 태영은 열이 확 뻗쳤다. 역시, 괜히 말 걸었어.

“그래? 알았어.”

태영이 씩씩거리며 그냥 집에 들어가려는데.

“할 말이 그게 다야?”

송바위가 시비조로 물었다. 태영은 녀석을 확 째려보며 말했다.

“그게 다면 뭐 어쩔 건데?”

“모태영. 너 언제까지 나랑 이렇게 지낼래? 유치하다고 생각 안 해?”

“뭐어? 유치? 송바위 너 말 다 했어? 우리가 이렇게 된 게 나 때문이야?”

“그럼 나 때문이야?”

“어. 너 때문이지. 난 너 예전의 너로 돌아가면 당장이라도 화해…….”

“돌아갈 생각 없다면?”

“그럼 나도 너랑 화해할 생각 없어.”

“하.”

송바위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곤 태영이 안고 있는 노란색 인형을 쳐다봤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거슬렸던 거다.

“그건 뭐냐?”

“이거? 유일반이 줬는데.”

“유일반? 너 그 새끼한테 차인 거 아니었어?”

“누가 그래? 모태혁이 그랬지? 아니거든? 우리 잘 만나고 있거든?”

“그럼 지금까지 그 새끼랑 있다 온 거야? 야, 너 그 새끼가 어떤 새낀지 알아? 유일반 걔 권수아랑…….”

“갑자기 여기서 수아가 왜 나와?”

“됐다. 그 새끼한테 이용당하든지 말든지 니 맘대로 해.”

“너 저번부터 대체 누가 누굴 이용한다는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유일반 그런 애 아니라고.”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송바위가 문이 부서져라 쾅 닫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던 태영은 허공에 주먹을 마구 날렸다.

“내가 모르긴 뭘 모르냐! 나 모르는 거 없거든? 나쁜 놈!”

유치하게 뒤에서 중얼거리던 태영은 씩씩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악! 깜짝이야!”

문을 열자마자 태혁과 눈이 마주친 태영이 화들짝 놀랐다.

“왜 문 앞에 서 있어? 놀랐잖아.”

“나 다 들었다. 너네 또 싸우더라?”

“뭐래.”

태영은 태혁을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그에 질세라 태혁이 태영의 뒤를 바짝 따라붙어 방까지 쫓아 들어갔다.

“너네 대체 왜 싸운 거냐니까? 유딩 때부터 그렇게 죽고 못 살던 녀석들이.”

“오빤 몰라도 돼. 나 피곤하니까 좀 나가 줄래? 아, 그리고 나 안 차였거든? 오빤 왜 송바위한테 쓸데없는 소릴 하냐고.”

“안 차인 거 확실해? 그럼 어젠 왜 울었냐?”

“내가 언제 울었다고. 아 시끄러. 나가!”

뒤늦게 태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문득 아까 송바위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너 그 새끼가 어떤 새낀지 알아? 유일반 걔 권수아랑…….’

대체 뭐지? 유일반이랑 수아가 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태영은 아까 점심시간에 옥상으로 달려왔던 수아의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냉랭한 눈빛. 대체 그 표정은 뭐였을까?

“으으으으으, 몰라몰라!”

생각할수록 머리가 너무 아팠다. 태영은 몽몽이를 꽉 끌어안은 채 침대 위에 뛰어들어 발버둥을 쳤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태혁이 혀를 내찼다.

“모탱 이 시끼 차였는데 차인 줄 모르는 거 아니야? 쯧쯧.”

안 봐도 뻔하다는 듯 태혁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 * *

등굣길 횡단보도를 건너는 태영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자꾸만 어제 송바위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송바위와 싸우긴 했지만, 사실 태영은 녀석을 신뢰하고 있었다. 오랜 친구였기에 녀석을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은 없는 말을 지어서 하는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 유일반과 수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데……. 대체 뭘까?

태영은 축 처진 어깨로 학교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태영을 불렀다.

“모탱!”

아침부터 텐션 업인 해니였다.

“너 연애하는 애 맞냐? 표정 어쩔? 완전 썩었어.”

“몰라 나 망했어.”

“왜? 너 차였어?”

“모태혁인 줄. 너넨 내가 차였음 좋겠냐?”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 암튼 무슨 일인데?”

태영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최니, 너 혹시 수아랑 유일반……. 아니다. 암것도 아니야.”

“왜왜? 뭔데 그래? 수아랑 유일반 뭐. 나 걔네 둘 아까 저기서 봤는데.”

해니의 말에 태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 어디?”

“후문 건너편 골목.”

“둘이 왜?”

“뭐 학생회 얘기 하겠지. 뭐야? 우리 모탱 지금 질투하는 거야?”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유일반이 수아랑 같이 있다니까 방금 눈 부릅뜨고 나한테 어디 있냐고 따지더만. 모탱, 아무리 그래도 친구한테 질투하는 건 좀……. 잠깐! 나 뭐 생각났어.”

갑자기 해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모탱, 너 어떡해? 사실 어제 수아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