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13화 (14/67)

[13화]

“너 유일반 아니지?”

태영이 똘망똘망한 눈에 힘을 팍 주며 녀석을 쳐다봤다. 녀석의 표정은 역시나 굳어 있었다.

“맞네. 너 유일반 아니네.”

“그럼 난 누군데?”

“또 다른 인격체! 또는 귀신! 왜 있잖아, 드라마에서 보면 막 귀신이나 다른 인격체가 그 주인공 영혼 뺏어서 들어앉으려고 그러잖아. 너도 그런 거지?”

“하.”

진지하게 태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녀석이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곤 보기보다 훨씬 더 단순한 태영을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내가 유일반의 다른 인격체 또는 귀신이라는 사실보다 기억을 잃었다는 게 더 믿기 힘든 이유가 뭔데?”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너 떡볶이는 왜 안 먹어?”

“밀가루 알레르기 있어.”

“소름!”

“왜 또! 뭔데.”

“너 어제 내가 사다 준 빵 겁나 맛있게 먹는 거 봤거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그리고 기억 잃었다면서 자기 체질을 왜 이렇게 잘 알아?”

갑자기 날아든 질문 폭격기에 녀석은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다 받아치기 시작했다.

“하아…… 몇 번을 말하냐? 입학 전까진 다 기억난다고. 내가 너 몸무게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거 보면 몰라? 그리고 빵은…… 그래, 어제부터 사귀기로 했다며. 그니까 그 성격에 거절 못 하고 억지로 먹어 줬겠지.”

“그, 그래? 그렇다면…….”

뭔가 찝찝하다. 내 앞에 있는 이 녀석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태영이 떡볶이를 마저 먹으며 녀석을 흘끔 훔쳐봤다. 녀석은 속이 탔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근육과 핏줄이 팍 오른 전완근 보소. 어젠 저렇게까지 단단하지 않았는데. 섹시하진 않았는데……. 으, 망했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어 미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는 태영을 녀석이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너 방금 이상한 생각 했지? 해선 안 될 생각.”

“아니거든! 난 그냥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좀……. 헐…… 나 이제 알겠다. 진짜 알겠다.”

“알긴 개뿔.”

태영이 새침한 얼굴로 팔짱을 딱 낀 채 말했다.

“유일반, 너 솔직히 말해 봐. 오늘 일부러 그랬지?”

“뭐래? 너 국어 몇 등급이냐? 말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네.”

“이거 봐. 내가 싫어하는 소리만 하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마치 탐정놀이 하는 어린아이처럼 태영은 진지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웃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 나 차려고 기억 잃은 척하면서 내가 싫어하는 행동이랑 일부러 막 싸가지 없게 말하고 그런 거지? 나 떨어져 나가라고.”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녀석이 짓궂은 얼굴로 일부러 리액션을 크게 하며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런 줄도 모르고 태영은 역시 제 직감이 맞았다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럼, 이제 알았으면 떨어져 나가 줄래?”

“뭐?”

“지금의 내가 싫으면 그냥 니가 나 차 버리라고. 그럼 되잖아.”

“아니! 절대 그렇겐 못 하지!”

“왜?”

“니 작전은 틀렸어. 나 사실 아까 너한테 반했거든.”

“난 그럴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없긴 왜 없어. 아까 나 구해 줬잖아. 손도 막 잡아 주고. 나 괴롭힌 놈 어깨도 막 박살 낸다 그러고……. 사실 난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모태혁이랑 정반대인 사람.”

“모태혁이 누군데?”

“있어 내 핏줄. 근데 모태혁은 겁쟁이거든. 싸움도 못하고 완전 찌질이야. 근데 너 아까 보니까 싸움도 잘하고 되게 든든하더라. 나 남자한테 그런 느낌 처음 받아 봤어. 보호받는 느낌 말이야.”

“모쏠이냐?”

“너도 모쏠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난처해지자 녀석이 말을 돌렸다.

“사실 난 아빠가 없거든…….”

“…….”

“언제나 날 지키는 건 나였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니가 아무리 기억 잃은 척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도 이미 아까 내 마음은 확실해졌어.”

“…….”

“나 거친 남자 좋아하나 봐. 아니면 니가 뭘 해도 그냥 좋은가 봐.”

“!”

녀석은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얘 뭐야? 녀석은 태영의 홍조가 오른 두 뺨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환장하겠네.”

갑자기 웬 고백? 녀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태영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좋다고?”

“응. 그니까 너도 솔직히 말해 봐. 기억 잃은 거 맞아, 아니야?”

“……맞아.”

“그럼 일부러 나 차려고 못되게 군 건 아니란 거지?”

“내가 언제 너한테 못되게 굴었냐?”

태영은 곰곰 생각해 봤다. 사실 썩 그렇게 못되게 군 건 아니었다. 아까 옥상에서 초콜릿도 주고, 급식실에서 치킨도 주고, 원진남고 애들한테서 구해 주고, 소독약도 사 주고, 사진도 찍어 주고…….

어라? 이 녀석 뭐지? 생각해 보니까 싫다면서 다 해 줬네.

태영은 멋쩍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더니 주먹밥을 하나 집어 녀석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이거라도 먹어. 주먹밥엔 밀가루 안 들어 있어.”

“난 남의 젓가락 닿은 건 안 먹어.”

“하여튼 되게 깔끔떠네. 이럴 땐 재수 없다니까.”

“아깐 내가 뭘 해도 좋다더니. 너 진짜 말하는 법 다시 배워라.”

“암튼 니가 기억을 잃었든 안 잃었든, 무슨 망나니짓을 하든 말든, 난 절대 너랑 헤어질 생각 없으니까 포기해. 이상 끝! 나 말하는 동안 소화 다 돼서 또 배고파. 그럼 마저 먹을게. 먹는 동안 말 시키지 마.”

“너나 그만 떠들어. 아, 귀 아파.”

녀석이 귀를 만지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태영은 녀석을 흘겨보더니 마저 떡볶이를 먹었다. 그사이 녀석은 제 접시에 놓인 주먹밥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탁.

또 주먹밥 하나가 접시에 날아들었다.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새 젓가락으로 집은 거니까 그건 먹어도 돼.”

태영이 새 젓가락을 들고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녀석은 태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녀석은 누군가에게 챙김을 처음 받아 본 사람처럼 어색해했다.

“왜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닮았어…….”

태영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누구랑? 내가 누구랑 닮았는데? 아까도 말하려다 말았잖아. 대체 누군데 그래?”

마치 그 사람을 떠올리듯 녀석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태영은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아까 녀석이 수아를 바라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다른 이성을 생각하는 녀석을 막상 눈앞에서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됐어. 말하지 마. 나 하나도 안 궁금해. 암튼 주먹밥이나 먹어.”

태영이 토라지자 녀석은 어리둥절했다. 아깐 그렇게 귀엽게 웃더니 지금 저 표정은 뭐야? 화난 거야? 하여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애다. 갑자기 고백을 하질 않나. 맞다. 고백.

녀석의 미간이 구겨졌다.

“야, 보류.”

“먹을 때 말 시키지 말라구.”

“너 고백이 취미는 아니지?”

“뭐래.”

“아무 놈한테나 그런 말 하고 다니는 거 아니냐고.”

“그럼 뭐 어쩔 건데?”

“뒤진다.”

“뭐?”

“그 새끼 나한테 뒤진다고.”

“어째서? 우리 사이 보류라며. 그럼 나도 딴 남자 만나고, 너도 막 내 절친 애틋하게 쳐다보고 나 닮았다는 그 여자 떠올리고 그래도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냐? 그리고 너 닮은 건 여자 아니야.”

“남자야?”

“사람이 아니라니까.”

“헐. 그럼 뭔데?”

“조만간 보여 줄게. 아, 그리고 주말에 만나자. 시간 비워 놔.”

“주말에? 너랑 나랑 둘이? 혹시 이거…….”

“데이트 그런 거 아니고, 니가 해야 될 일이 있어.”

김이 팍 샌 얼굴로 태영이 투덜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다 목적이 있었구만? 어쩐지 잘해 준다 싶더라. 대체 주말에 뭘 시키려고 그러는데?”

“그때 돼서 얘기해 줄게.”

“또 뭐 훔치는 건 아니지?”

“훔치는 거야.”

“우씨, 나 못 해! 이번엔 대체 뭘 훔치려고!”

“출석부보다 크고 무겁긴 한데 걱정하지 마. 이번엔 내가 다 계획을 세워 놨으니까. 아주 완벽하게.”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는지 그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양이다.

태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 처음으로 녀석이 활짝 웃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니, 웃으면 사람이 저렇게 예쁜데 오늘 하루 종일 왜 그렇게 정색하고 있었던 거야? 세상에, 여기 어디 반사판이라도 깔았나? 왜 이렇게 녀석 뒤에서 후광이 나는 것 같지?

콩닥콩닥.

내 심장은 또 왜 이렇게 빨리 뛰는 거냐고. 고장이라도 난 거야?

아니면 설마…….

나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태어나서 이런 기분을 처음 느껴 본 태영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 * *

“어? 몽몽이다! 저거 한판만 하고 가자!”

떡볶이 가게에서 나와 길을 걷던 태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후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인형 뽑기 기계가 있었다.

“너 먼저 가!”

태영은 녀석을 버리고 냅다 오락실 앞으로 달려갔다. 홀로 남은 녀석은 그냥 가려다 말고 못 이기는 척 태영의 뒤를 따라갔다.

“으, 잡아, 잡아! 잡앗! 윽!”

벌써 세 판이 넘게 인형을 잡지도 못하고 끝나 버린 태영은 허탈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어? 안 갔어?”

바로 뒤에 녀석이 서 있자 태영이 의아한 듯 보다가 갑자기 녀석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뭐.”

녀석이 태영의 손을 어이없게 쳐다봤다. 그러자 태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 돈 좀.”

“삥 뜯는 거야?”

“갚을게.”

애원하는 태영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녀석은 지갑에서 오만 원권을 꺼내 건넸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나 진짜 딱 네 판이면 몽몽이 구출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몽몽이가 뭔데? 저 노란색 오리?”

“응! 그럼 나 잔돈으로 바꿔 올게!”

태영이 냅다 지폐 교환기 앞으로 달려갔다. 한편 기계 안에 파묻힌 노란색 인형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녀석은 코웃음을 쳤다.

“네 판은 무슨, 한 판이면 되겠네.”

“이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거든여?”

금세 돈을 바꿔 온 태영은 녀석의 손에 만 원권 네 장과 천 원권 여덟 장을 쥐여 줬다.

“난 딱 이천 원어치만 할 거야. 안 되면 오늘은 포기.”

비장한 각오로 다시 기계 앞에 선 태영은 손깍지를 꼈다 풀었다 스트레칭까지 마친 후 돈을 넣었다.

“아오!”

그렇게 시작한 지 1분 만에 완패. 게임은 종료되었다.

“저기…… 나 천 원만 더…….”

“비켜.”

태영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녀석이 기계 앞에 섰다. 녀석은 대충 천 원권 몇 장을 집어넣더니 바로 게임을 시작했다.

그 순간 태영은 문득 작년 축제 때 일이 생각났다.

3학년 선배들이 이른바 ‘인형 뽑기왕’ 대회를 연다고 기계를 대여해 왔었는데, 당시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게임 오타쿠 3학년 선배를 이기고 신입생이 뽑기왕에 등극했으니.

그게 바로 유일반이었다.

태영은 작년 축제 때를 떠올리며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스틱을 움직이는 녀석의 화려한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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