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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과 2반 사이-10화 (11/67)
  • [10화]

    오늘따라 교무실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 이미 태영은 점심시간 이후부터 두어 차례나 넘게 교무실 입성에 실패한 상태였다.

    “이번엔 꼭 성공하자!”

    비장한 얼굴로 태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기합을 넣었다. 그러곤 대걸레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원래 교실 청소였던 태영은 교무실 복도 청소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일종의 위장 전술이랄까.

    “얘, 여기도 좀 닦아. 저기도 더럽네. 저쪽도 닦고.”

    “네!”

    대걸레를 들고 교무실 앞에 오자마자 태영은 얼떨결에 음악 선생한테 청소 지도를 받게 되었다. 또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는 편인 태영은 출석부는 잊은 채 청소 삼매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더럽던 복도는 어느새 광이 날 정도로 반짝거렸다.

    “너 2반 모태영이지? 청소 되게 잘하네. 앞으로 교무실 복도 청소는 태영이가 하면 되겠네. 내가 너희 담임한테 말해 놓을게.”

    “네?”

    으, 젠장. 괜히 열심히 했네. 빗자루가 낫지, 대걸레는 진짜 헬인데. 이거 빨아서 말리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태영은 제가 닦아 놓은 깨끗한 복도 바닥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

    “근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여긴 왜 왔지? ……아, 출석부!”

    출석부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태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엔 교무실이다!

    태영은 무슨 첩보 영화라도 찍듯 후다닥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대걸레로 바닥을 닦는 둥 마는 둥 하며 출석부가 꽂혀 있는 학급함을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태영의 천적, 물리 선생이었다.

    딱 봐도 뭔가 켕기는 구석이 많아 보이는 태영을 물리 선생이 재밌다는 듯 지켜봤다. 그러다 태영이 학급함에서 출석부 몇 개를 꺼내 품에 안고 도망가려고 하자 잽싸게 달려가 태영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잡았다 요놈!”

    “꺅!”

    태영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의 시선이 태영에게 집중되었다.

    태영은 망할 놈의 제 입을 틀어막으며 물리 선생에게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모태영이 따라와.”

    물리 선생은 봐줄 생각이 없는지 자신의 사무실 책상으로 향했다. 태영은 죽을상을 하며 따라갔다. 하필 걸려도 물리한테 걸리다니. 하여튼 모태영 운도 지지리도 없어.

    “하다 하다 이제 출석부를 훔쳐?”

    “선생님 죄송한데, 훔치려고 한 건 아니고요. 그냥 잠깐 보고 도로 갖다 놓으려고 했는데요…….”

    “출석부에서 볼 게 뭐가 있는데? 아하. 요놈 너 또 사진 훔치려고 했지?”

    “네? 아닌데요?”

    “출석부 줘 봐.”

    태영은 떳떳했다. 당당하게 출석부를 물리 선생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요 봐, 요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유일반 사진이랑 송바위 사진이 없네?”

    물리 선생이 1반과 2반의 출석부 맨 앞장을 펼쳐 보여 줬다.

    태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출석부를 쳐다봤다. 딱 중간쯤에 비어 있는 직사각형.

    “너지? 사진 니가 훔쳐 갔지?”

    “저 진짜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작년에도 애들한테 빵 받아먹고 3학년 선배 사진 훔쳐다 줬잖아.”

    서울대 출신이라더니 기억력도 좋으셔라. 태영은 할 말이 없었다. 그 얘긴 팩트였으니까.

    “선생님 오늘은 저 진짜 억울해요. 작년에 그 일 있고 저 엄청 반성했구요, 그래서 다신 그런 짓 안 했다구요. 그리고 사실 걔가 그 선배를 중학교 때부터 짝사랑했대요. 선배 졸업하기 전에 사진이라도 한 장 갖고 싶다고 해서 도와준 건데…….”

    “아이고 눈물겨워라.”

    “그쵸? 얼마나 안됐어요. 오죽했으면 사진이라도 갖고 싶…….”

    “그래서 니가 잘했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암튼 이번엔 진짜 제가 훔친 거 아니에요. 저 유일반이랑 특히 송바위 사진엔 관심도 없어요.”

    “입 다물고. 모태영이 넌 다음 주 월요일까지 유일반이랑 송바위 사진 채워 놔. 안 그럼 벌점이다.”

    “벌점이요? 뭐 이런 걸로 벌점까지…….”

    “내일까지.”

    “네?”

    “내일까지 사진 채워 놔라. 선생님 말에 한마디만 더 토 달면 지금 즉시 벌점 추가다.”

    “…….”

    물리 선생이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태영은 풀이 죽은 얼굴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도로 꽂아 놔.”

    “……네.”

    마침 옆 반 애들이 문제집을 들고 찾아오는 덕분에 물리 선생의 시선이 애들한테로 향했다. 그 틈을 타서 태영은 은근슬쩍 출석부를 다시 챙겨 교무실을 벗어났다.

    * * *

    종례를 마치자마자 옥상으로 달려간 태영은 비상구 문을 벌컥 열었는데.

    쾅!

    “윽!”

    갑작스럽게 열린 문에 머리를 박은 녀석이 옥상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심장을 움켜쥔 채 괴로워하는 녀석을 보고 놀란 태영은 얼른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아? 많이 아파?”

    “으…….”

    말도 못 할 정도로 아픈 모양이다. 근데 이상했다. 부딪힌 건 머리인데 왜 심장을 쥐고 괴로워할까?

    녀석은 급기야 바닥을 손으로 짚은 채 고통스러워했다. 이마엔 식은땀까지 흘렀다.

    “어떡해. 구급차 부를까?”

    “안 돼…….”

    핸드폰을 꺼내려고 하자 녀석이 손으로 저지했다. 태영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제 손에 닿은 녀석의 손이 매우 차가웠기 때문이다.

    “야, 유일반…… 너 진짜 왜 그래? 혹시 사고 후유증이야? 정신 좀 차려 봐.”

    녀석의 상태가 꽤 심각해 보였다.

    덜컥 겁이 난 태영은 녀석의 어깨를 흔들며 녀석이 정신을 잃지 않게끔 노력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녀석의 신음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고, 녀석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고통에 찌든 얼굴, 살짝 풀린 눈.

    그렇게 녀석은 초점 없는 눈으로 태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 기억이…….”

    “기억이 왜? 혹시 기억 돌아온 거야? 문에 머리 부딪혀서?”

    “뭔가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녀석은 정말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이번엔 머리를 감싸 쥔 채 뭔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유일반 뒤통수 한번 날려 볼걸. 이렇게 고전적인 방법으로 기억이 돌아올 줄이야. 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근데 너 진짜 몸은 괜찮아? 아까 심장…….”

    “괜찮아.”

    녀석이 말을 자르고 괜찮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대로 아직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아까보단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태영은 이제야 한시름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천천히 기억해 봐. 일단 우리 어제 사귀기로 한 거 그거부터 기억해 봐. 가장 최근 일이니까 잘 떠오를 거야. 어때? 생각나?”

    “어제 여기서…….”

    “맞아! 여기 맞아. 우리 여기서 사귀기로 했잖아. 어뜩해. 너 진짜 기억 돌아오고 있나 봐!”

    태영은 너무 좋아서 방방 뛰며 기뻐했다. 하지만 녀석은 해맑게 소리까지 내며 웃는 태영을 노려볼 뿐이었다.

    “왜 째려봐?”

    “너 진짜 실망이다.”

    녀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태영을 쳐다봤다. 그러자 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 녀석은 왜 눈빛이 그대로지? 이건 어제의 유일반에겐 없었던 눈빛인데……. 아직 기억이 덜 돌아와서 그러나? 기억이 돌아와도 이 상태면 어떡하지?

    “아씨 짜증 나. 나 여기 멍 들었지?”

    녀석이 갑자기 욕을 읊조리며 태영에게로 이마를 들이밀었다.

    “살짝 붓기는 했는데……. 근데 너…….”

    태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끝이야? 더 기억나는 거 없어? 머리 한 대 더 때려 줄까?”

    “죽을래? 머리 좀 부딪혔다고 기억이 돌아오면 그게 코미디지.”

    태영이 제 머리통을 날리려 주먹을 쥐고 다가오자 녀석은 손가락으로 태영의 이마를 툭 밀어 버렸다. 뒤로 밀려난 태영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럼 너 아까 기억이 어쨌니, 어제가 저쨌니, 그거 장난친 거야?”

    그걸 이제 알았냐며 녀석이 혀를 내찼다.

    “믿은 니가 바보지.”

    “야! 넌 무슨 그런 걸로 장난을 쳐? 난 너 기억 돌아온 줄 알고 얼마나 좋았는데.”

    “그러게, 너 되게 좋아하더라? 어제 여기서 둘이 뭐 어쨌는데? 사귀기로 했다고? 보나마나 니가 먼저 들이댔겠고.”

    “아니거든?”

    “하.”

    “지금 비웃는 거야? 진짜 내가 먼저 안 그랬거든? 니가 먼저 나 좋다고 따라다녔었거든?”

    “웃기고 있네. 나 기억 안 난다고 말 지어내지 마라. 내가 널 왜 따라다니냐? 너 나한테 돈 꿨냐?”

    “너랑 나 사이에 채무 없었고. 넌 내가 귀여워서 좋다고 했어. 그래. 그랬어.”

    당당해지자. 영 없던 얘기는 아니잖아. 분명 동아리방에서 유일반이 나한테 귀엽다고 했으니까. 그건 팩트라고.

    “이상형이 귀여운 쪽은 아닐 텐데. 걔, 아니 내 이상형은 너랑 반대라니까.”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기억도 없으면서.”

    “……직감, 본능. 그런 거 있잖아. 넌…….”

    녀석이 태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기처럼 뽀얀 피부, 이 작은 얼굴에 동그란 눈, 오뚝한 코, 분홍빛 입술이 다 들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웃으면 눈이 반달로 접히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그리고 저 작고 앙증맞은 입술…….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녀석의 얼굴이 화락 달아올랐다. 침을 꼴깍 삼키며 녀석은 고개를 돌려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내 타입 아니야. 근데 왜 사귄 걸까? 궁금해지네…….”

    녀석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개진 것도 모른 채 태영이 구시렁거렸다.

    “누군 지가 이상형인 줄 아나. 난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가 좋거든? 그래서 내가 너 좋아했던 건데, 이게 뭐람…….”

    그 말에 녀석이 발끈하며 되물었다.

    “내가 다정하고 배려심 깊었다고? 웃기고 있네.”

    “웃긴 건 너고. 암튼 어제까지의 넌……. 됐다.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태영은 체념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유일반의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건 장기전이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돼.

    태영은 다부진 눈빛으로 가방에서 출석부 두 권을 꺼내 녀석에게 내밀었다.

    “일단 1반이랑 2반 것만 가져왔어. 출석부 몽땅 없어지면 금방 들통나니까.”

    “너 머리 나쁘지?”

    무거운 출석부를 받으며 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태영이 버럭 화를 냈다.

    “와, 킹받네. 여기서 머리 나쁘단 얘기가 왜 나와?”

    “사진 찍어서 가져오면 되지 무겁게 이걸 왜 들고 오냐?”

    “뭐? 그거 이리 내! 기껏 가져다줬더니. 우씨. 나 그거 가져오다가 물리한테 걸려서……. 맞다. 너 증명사진 있어?”

    “없어.”

    “그럼 한 장 찍어서 내일 가져와. 알았지?”

    “내가 왜?”

    “1반 출석부에 니 사진만 없어. 물리가 니 사진 안 채워 넣으면 나 벌점 먹인대.”

    “맛있게 먹어.”

    “됐거든? 나 벌점 하도 먹어서 배 터질 지경이거든? 암튼 너 도와주려다 이렇게 됐으니까 니가 책임져.”

    녀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출석부를 펼쳐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핸드폰을 내려놓고 2반 출석부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송……바위?”

    사진 없이 텅 빈 직사각형 밑에 새겨진 이름을 녀석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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