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9화 (10/67)

[9화]

태영은 밥 위에 가득 쌓인 치킨 조각과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나 그만 보고 밥이나 먹어.”

태영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녀석은 괜히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녀석의 눈치를 흘끔 보던 태영은 자칫 잘못하면 치킨을 몽땅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젓가락을 들었다. 이건 본능이었다. 어릴 적부터 모태혁 때문에 터득한 본능. 내 할당량은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삶의 지혜.

“주니까 마다하지는 않을게. 잘 먹겠습니다!”

치킨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태영이 활짝 웃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대따 마시써. 크으, 역시 울 학교 급식이 최고라니까.”

어깨춤은 기본, 콧노래까지 부르며 치킨을 먹는 태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녀석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녀석은 억지로 입꼬리를 내려 얼른 정색했다.

하지만 태영은 밥 먹느라 앞에서 녀석이 어떤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어제 데이트 바람맞은 후부터 지금까지 먹은 건 아까 옥상에서 녀석이 준 초콜릿 하나가 전부였던 태영은 허겁지겁 밥 먹는 데만 열중했다.

그사이 밥을 다 먹은 녀석은 턱을 괸 채 태영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맛있냐?”

태영이 치킨을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 툭, 하고 머리 끈이 끊어져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를 본 녀석이 피식 웃었다.

“망나니 같네.”

“뭐? 마, 망 뭐?”

“많이 먹으라고.”

안 그래도 많이 먹을 생각이거든? 내가 누구 때문에 어제 저녁도 못 먹었는데. 태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입으로 들어가든지 말든지 열심히 치킨을 뜯었다.

미친 속도로 입안에서 치킨 뼈를 발골하는 태영을 구경하던 녀석은 생각했다. 얘한테 치킨 안 줬으면 내 뼈가 발골될 뻔했네.

“야, 보류. 너 왜 이렇게 잘 먹냐?”

“잘 먹는 것도 불만이야?”

“그건 아니지만 신기해서.”

“난 니가 더 신기하거든? 밥을 왜 다 남겼어?”

녀석의 식판 위에 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태영이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너 잘 먹어야 돼. 그래야 기억 돌아오지.”

“그건 무슨 논리야?”

“내 논리야. 밥을 잘 먹어야 일도 잘 풀리고 행복해진다. 나처럼.”

태영이 배시시 웃었다. 그를 본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휴지 한 장을 뜯어 던지듯 내밀었다.

“입술에 기름이나 닦아. 더러워.”

“치이. 먹다 보면 묻을 수도 있지.”

태영은 대수롭지 않게 휴지로 입을 슥슥 닦았다.

“이제 다 먹었지?”

“아니아니. 후식 먹어야지.”

태영이 요플레를 들고 흔들더니 잽싸게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뚜껑에 묻은 요플레를 핥아 먹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너 원래 내 앞에서 이렇게 더럽게 먹었냐?”

“처음인데?”

“뭐가?”

“너랑 같이 밥 먹는 거.”

“사귀는 사이라며.”

“어제가 1일이었다니까. 같이 밥 먹을 새도 없이 니가 기억을 잃은 거라고. 그니까 내가 얼마나 억울하겠냐구. 태어나서 처음 사귄 남친인데, 되게 다정하고 배려심 깊고 멋있는 남친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런 또라이 개싸가지로 변해서…….”

“개싸가지? 어이가 없네. 야. 내가 기억 안 잃었어도 너 이렇게 먹는 거 봤으면 바로 차였어.”

“아니거든? 유일반은 그렇게 겉모습만 보고 사람 판단하는 애 아니거든?”

“웃기고 있네. 걔 이상형은 너랑 정반대거든?”

“걔? 방금 걔라고 했어? 걔가 누군데?”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지금껏 제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던 녀석이 말을 아끼다니. 태영은 의아한 눈초리로 녀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대뜸 화를 냈다.

“걔가 누구긴 누구겠냐! 어제 너랑 사귀기로 한 그 멍청한 놈이지.”

“아하. 그렇구나? 근데 멍청아, 그 요플레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어도 돼?”

“누구더러 멍청이래!”

“어제의 너도 지금의 너도 같은 유일반이니까. 어제의 유일반이 멍청이면 너도 멍청이지. 요플레 안 먹을 거냐고.”

“그래 너 많이 먹어라.”

녀석이 요플레를 툭 하고 태영 쪽으로 밀었다. 냉큼 요플레를 받아 든 태영은 바로 뚜껑을 뜯으며 배시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잘 먹을게 멍청아.”

“야!”

“농담이야. 농담.”

태영이 키득거리며 요플레를 두 통째 해치우고 있었다.

“와. 사귀어도 무슨 이런 애랑……. 아오.”

녀석은 환장할 것 같은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이 여자애 때문에 다 까먹었다.

“아, 생각났다.”

겨우 하려던 일이 떠오른 녀석이 말을 이었다.

“먹으면서 들어.”

태영이 요플레를 먹으며 녀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이 넌지시 물었다.

“아까 걔랑 친해?”

“누구? 수아? 친구니까 친하지. 그건 왜?”

“별로 안 친해 보여서.”

열받은 태영이 녀석을 째려봤다.

“너 또 나랑 해보자는 거야? 아니거든? 우리 고1 때부터 찐친이거든?”

녀석은 고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이상하게 느낌이 안 좋아.”

“무슨 느낌?”

“암튼 나 기억 돌아오기 전까진 걔랑 가까이 지내지 마. 그리고 너 입조심해. 나 이렇게 된 거 다른 애들한테 들켰다간 내가 너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참 나. 가만 안 두면 뭐 어쩔 건데?”

태영은 어이가 없어서 숟가락을 탕, 하고 내려놨다. 돌발 행동에 살짝 놀랐는지 녀석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 기세를 몰아 태영이 반박했다.

“막말로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다 들키게 생겼거든?”

“내가 뭘.”

태영은 속에 쌓아 뒀던 불만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너 아까 ‘안녕’ 하면서 수아한테 웃을 때, 그때 되게 유일반 같지 않았어.”

“유일반 같은 건 또 뭔데?”

“원래 유일반은 엄청 따사로운 햇살같이 웃었다고.”

어제 옥상에서 저를 향해 다 잘될 거라면서 웃어 주던 일반의 미소가 떠오른 태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현실은 제 앞에 있는 이 녀석. 이 멍청이! 미간에 주름 팍! 사나운 눈초리 팍!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암튼 너 그렇게 인상 쓰고 다니다간 금방 들킬걸? 그리고 유일반은 인싸야. 완전 핵인싸. 이렇게 구석탱이에서 밥 안 먹는다고. 니 자리는 저기 중앙이야.”

“관종이냐? 아무 데나 앉으면 되지.”

“봐 봐. 이렇게 말 안 듣는 것도 유일반스럽지 않아.”

“내가 남이랑 비교하지 말랬지?”

“남이 아니고 너랑 비교한 거거든?”

“지금 나한텐 어제의 나도 남이야. 기억이 안 나니까. 알아들어?”

“…….”

종알종알 말 많던 태영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녀석이 흘끔 쳐다봤다.

“그 표정은 뭐냐?”

“반성 중…….”

“갑자기?”

태영은 풀이 죽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녀석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어제의 나도 남처럼 느껴질 만큼. 그러니 어제의 나더러 멍청한 놈이라고 했겠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너 꼭 기억 찾을 수 있게 도와줄게.”

“또 그 소리야? 대체 니가 어떻게 도와줄 건데?”

“어제의 니가 남처럼 느껴진댔지? 내가 어제 그리고 지난 1년간 학교에서 봤던 너의 행적들을 하나씩 말해 줄게. 그러다 보면 뭔가 기억나는 게 있지 않겠어?”

“넌 내 기억에 왜 이렇게 집착하냐? 그놈의 보류 기간 길어질까 봐?”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사귄 남자 친군데!

꼭 기억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서 연애도 계속하고, 그리고 같이 너튜브에도 출연할 거고, 팔로워 수도 올릴 거고…….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태영은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 녀석의 기억을 찾아 주려는 목적이 나를 위한 거였다니.

“야, 보류.”

“어? 왜, 왜?”

뒤늦게 녀석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태영이 뭐 몰래 먹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런 태영을 수상쩍게 쳐다보던 녀석이 대뜸 말했다.

“니가 도와줄 게 하나 있어.”

“뭔데? 뭐 훔치는 것만 아니면 뭐든 할게!”

“훔치는 건데?”

“그건 좀…….”

“내 기억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며. 못 해?”

“일단 들어 보고. 뭔데? 뭘 훔쳐야 되는데?”

“출석부. 일단 2학년 것만.”

“그건 왜?”

갑작스러운 요구에 태영은 의아한 얼굴로 녀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은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내가 누굴 꼭 찾아야 되거든.”

“누구? 설마…… 그 동아리방 습격한 범인? 너 혹시 그 범인 얼굴 본 거야?”

태영이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듯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내 생각엔 학교 CCTV를 먼저 확보해서…….”

“고장.”

“헐…… 소름. 그럼 이거 계획적인 범죄?”

“탐정 납셨네. 재밌냐?”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재밌냐니. 나야말로 그 범인 꼭 잡고 싶은 사람이거든? 내 남친을 이렇게 못 쓰게 만들다니. 그놈 찾아서 아주 아작 내 버릴 거야.”

“못 쓰게 만들어? 내가 무슨 물건이냐? 그리고 나 멀쩡하거든? 야, 말해 봐. 내가 왜 못 써? 왜 못 쓰는데.”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눈빛으로 태영은 녀석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삐딱한 자세로 다리까지 꼬고 앉아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 역시 이 녀석은 못 쓰게 돼 버린 게 분명해. 이 상태론 재활용도 안 된다고.

“야, 보류. 암튼 오늘 수업 끝나기 전까지 출석부 가져와. 애들 얼굴이랑 이름 매치된 거 보면 뭔가 기억날 수도 있으…….”

“알았어! 내가 바로 갖다줄게.”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녀석의 말에 태영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곤 기필코 녀석의 기억을 되찾아 주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식판 좀 치워 줘.”

그렇게 태영은 후다닥 급식실을 벗어났다.

얼떨결에 태영의 식판을 떠맡게 된 녀석은 깨끗하게 비워진 태영의 식판을 보며 피식 웃었다.

“쪼그만 게 밥을 왜 이렇게 많이 먹어?”

식판을 들고 일어난 녀석은 창밖을 내다봤다. 태영이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교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애는 건물 앞에 서자 긴장되는 모양인지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 얼굴을 본 녀석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귀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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