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8화 (9/67)

[8화]

“너 미쳤어? 아무리 연애가 중요해도 그렇지 지금 시간이 몇 시냐?”

태영은 지각한 죄로 담임에 이어 해니한테까지 연타로 혼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해니가 핏대를 세우며 잔소리를 퍼부어도 태영의 정신은 온통 딴 데 가 있었다.

그곳은 바로 옥상. 옥상에 혼자 두고 온 녀석이 목구멍에 박힌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아픈 건 괜찮으려나?”

해니는 제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잣말까지 하는 태영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모탱! 너 내 말 듣고 있어?”

“아니.”

태영이 넋이 나간 얼굴로 해니를 쳐다봤다.

“최니, 나 어떡하지?”

“왜? 어제 유일반한테 데이트 퇴짜 맞은 것 땜에 그래? 우리 유권이 말로는 유일반 아직도 등교 안 했대.”

“했어. 등교.”

“유일반 만났어? 뭐래? 어젠 왜 안 나왔대?”

유일반이 동아리방에서 로봇 만들다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말을 하면 해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야, 유일반 왜 안 나왔냐고.”

“그냥…… 좀 바빴대.”

“아무리 바빠도 첫 데이트인데 너무하네. 게다가 쑤쑤 님이랑 하기로 한 미팅도 물 건너갔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뭐가 중요한데?”

“사실 유일반이……. 아니야. 암것도.”

태영은 너무 답답했다. 절친인 해니한테 또 비밀을 만들어 버린 이 상황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당분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최니.”

“응. 말해.”

해니가 물리책을 꺼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를 흘끔 보던 태영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혹시 너 주변에 기억 상실……. 아니다. 암것도 아니야.”

“암것도 아니긴. 니 주변에 누가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렸어?”

“!”

“대박, 찐이야? 찐 기억 상실?”

얘 어떻게 알았지? 태영은 너무 놀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러다 그 기억 상실증 걸린 사람이 유일반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모탱, 그거 드라마 얘긴 아니지? 어제 드라마에서 갑자기 주인공이 기억 상실증 걸려서 게시판 폭파됐잖아. 막장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그치? 말도 안 되지?”

“근데 말이 될 법도 해.”

“어째서?”

“너 어제 그 드라마 안 봤어? 주인공한테 딸이 하나 있었잖아. 근데 자기 앤 줄 알았는데, 자기 애가 아닌 거야. 그래서 해까닥 미쳐 버렸잖아. 난 주인공 심정 이해가 돼.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기억이 지워졌겠어.”

주인공에게 빙의한 해니는 안타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반면 태영은 해니의 말을 듣는 순간 아까 동아리방에서 봤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가진 로봇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던 녀석의 얼굴이.

“그러게……. 밤낮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하루아침에 처참하게 망가졌으니, 그 속이 진짜 말이 아닐 거야. 그니까 막 미친놈처럼 욕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래……. 착한 내가 이해해 주자.”

“너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야? 망가져? 미친놈? 누가?”

“어? 아, 그, 그게…… 모태혁!”

“헐. 니네 오빠 기억 상실증 걸렸어? 어젠 멀쩡하더니 어쩌다?”

친구야 미안하다. 거짓말 좀 할게.

모태혁한텐 하나도 안 미안해.

태영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하여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모태혁이 개발하던 어플이 있었거든. 거의 최종 단계였는데, 하필 노트북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거지. 그 바람에 프로그램 싹 다 날아가고 사람이 완전 미쳐 버렸는지 나도 기억 못 하더라고.”

“세상에. 동생인 너도 기억 못 해?”

거짓말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태영은 해니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태혁이 미쳐 버려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말을 해니는 아주 잘 받아들였다.

“그래서 오늘 늦은 거구나?”

“그, 글치. 어? 물리 쌤 왔다.”

다행히도 때마침 물리 선생이 교실에 들어왔고, 그렇게 기억 상실증 얘기는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 * *

“유일반이 안 보이네?”

해니의 말에 태영은 식판을 내려놓으며 일반이 항상 밥을 먹던 지정석을 바라봤다.

왜 없지? 설마 급식실이 어딘지 몰라서 안 왔나? 아님 아직도 머리가 아픈가?

“최니! 이거 주유권 먹으라고 해. 난 동아리방 좀 갔다 올게.”

“오올. 남친 챙기는 거야?”

해니가 놀리듯 말하자 같은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던 애들도 키득거렸다. 어딘가에선 휘파람 소리까지 들려왔다.

친구들의 놀림에 귀까지 빨개진 태영은 얼굴을 가린 채 서둘러 급식실을 빠져나가 옥상으로 향했다.

“똑똑!”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는데.

“세상에…….”

태영은 너무 놀라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동아리방이 깨끗해도 너무 깨끗했다. 바닥은 물론 창틀에 먼지 한 톨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옥상에 수건이 가지런히 널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뭐야, 나더러 치우라더니 지가 다 치웠잖아?

그나저나 저 로봇은 계속 저렇게 누워 있어야 되나? 영영 못 일어나는 걸까?

걱정스레 로봇을 쳐다보던 태영은 그 옆에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녀석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녀석은 청소하느라 고단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와. 유일반한테 저런 모습도 있었구나? 뭔가 친근하네.

녀석은 졸다가 놀라서 깨고, 또 졸다가 놀라서 깨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재밌는지 태영은 몰래 키득거리며 녀석을 지켜봤다.

“!”

그러다 하필 녀석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녀석은 비몽사몽 게슴츠레 뜬 눈으로 태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곤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태영은 저도 모르게 쪼르르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너 또 왜 왔냐?”

“왜 오긴. 너 밥 안 먹어?”

“밥?”

“나와. 급식실 가자.”

녀석은 배가 고팠는지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순순히 태영의 뒤를 따랐다. 그게 귀여웠던 태영은 남몰래 웃으며 비상구로 향했는데.

쾅!

갑자기 문이 열리고 웬 여학생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여학생의 얼굴을 확인한 태영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수아야?”

태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며칠째 결석이던 수아가 옥상엔 무슨 일로 온 걸까?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수아의 시선이 제가 아닌 제 뒤에 있는 녀석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태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봤다.

‘누구야?’

녀석이 눈빛으로 묻자, 태영은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내 친구.’

“뭐?”

태영의 대답에 녀석은 화를 버럭 내며 태영을 끌어다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니 친구가 여길 왜 와? 너 혹시 쟤한테 말했냐?”

“아니거든? 일단 최대한 친한 척하는 게 좋을 거야. 둘이 같은 학생회란 말이야.”

가까이 붙어서 서로 속닥이는 두 사람을 수아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혹시 내가 두 사람 방해한 거야?”

“아니! 아니야.”

태영은 빨리 인사하라며 녀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움찔한 녀석은 정말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안녕?”

저게 뭐람. 전혀 유일반스럽지 않은 미소라고. 태영은 혀를 쯧쯧 내찼다. 그런 태영을 흘겨보던 녀석은 아까부터 계속 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수아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너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냐?”

“어? 아……니.”

“그럼 얘한테?”

녀석이 태영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수아는 이제껏 제가 알던 일반과는 사뭇 다른 말투와 표정을 한 녀석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수아의 표정을 흘끔 보던 태영은 혹시 다 들킨 건 아닌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여기서 태연한 사람은 녀석 혼자였다.

녀석은 수아의 놀란 얼굴을 보고도 그러든지 말든지 태영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보류. 얘 너한테 할 말 있는 것 같으니까 얘기하고 내려와. 나 먼저 급식실 가 있을 테니까.”

녀석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수아를 쏘아보더니 옥상을 벗어났다.

“수아야!”

태영의 부름에 수아가 뒤늦게 대답했다.

“어?”

“진짜 나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거야?”

“응. 너 여기 있다길래.”

“근데 난 왜?”

“그냥 오래간만에 학교 왔는데 니가 안 보여서. 걱정돼서…….”

“야, 걱정은 내가 더 했거든? 너 어디 아팠던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집에서 경시대회 준비하느라 바빴어.”

“으이구. 그럴 줄 알았어. 그나저나 점심은 먹었어? 급식실 가자.”

태영이 수아와 팔짱을 끼고 계단을 내려갔다. 근데 좀 이상했다. 수아가 원래도 그렇게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표정이나 말투에서 냉기가 흐른달까?

태영은 수아를 흘끔 쳐다봤다. 그러다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수아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영아, 너 유일반이랑 언제부터 친했어?”

뜻밖의 질문에 놀란 태영이 되물었다.

“언제부터 친했냐고?”

“아까 거기, 동아리방 말이야. 아무나 못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니까 유일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아…… 그, 그건…….”

“오늘 학교 오니까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 아니지?”

“그게 있잖아…… 사귀는 건 맞아. 맞는데, 얘기하자면 길어. 일단 밥 먹고 얘기하면 안 될까? 나 진짜 겁나 배고픈데.”

위기를 모면하고자 태영은 괜히 더 어리광을 부리며 배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수아가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미안. 난 속이 좀 안 좋아서 교실에서 쉬고 있을게. 너 혼자 먹고 와.”

수아가 제 팔에 낀 태영의 팔을 떼어 내더니 반대쪽으로 가 버렸다.

친구를 따라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던 태영은 왠지 따라갔다간 큰 싸움이 날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급식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내가 수아한테 뭐 잘못한 게 있나? 왜 저러지?”

태영은 구시렁거리며 식판을 들고 배식대에 섰다. 너무 늦게 온 탓인지 오늘의 주메뉴 치킨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국과 몇 가지 반찬만 받아서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쟨 왜 왕따처럼 저기 혼자 앉아 있어?”

태영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저 구석에 앉아 홀로 밥을 먹는 녀석을 쳐다봤다. 어쩔 수 없네. 내가 같이 먹어 줘야겠군.

태영은 녀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야? 너 치킨 몇 개야? 하나, 둘, 셋, 넷, 넷? 네 개?”

녀석의 식판 위에 가득 쌓인 치킨을 세어 본 태영은 배식해 주는 아주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나한텐 치킨 다 떨어져서 없다더니 얘한테 다 퍼 주셨구만.

“나 하나만 주면 안 돼?”

“너 말이야 아까부터 계속 나한테 달라고 하는데, 나한테 뭐 맡겨 놨냐?”

말을 해도 꼭 저렇게 얄밉게 하냐.

태영은 괜히 말했다는 얼굴로 식판에 코를 박고 밥을 먹고 있었는데.

툭. 툭. 툭. 툭.

갑자기 식판 위로 치킨 조각이 날아와 밥 위에 안착했다.

아까 초콜릿도 그렇고 얘는 왜 자꾸 하나만 달랬는데 전부를 다 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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