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태영은 납득할 수 없는 얼굴로 녀석을 향해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동아리방을 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진짜 쟬 어쩌면 좋지? 금방 기억 돌아오겠지?”
태영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문밖을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옥상 난간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짝다리를 짚고, 시선은 저 멀리 어딘가쯤. 단추를 잠그지 않은 교복이 봄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불량해. 쟨 어제의 유일반이 아니야.
무의식적으로라도 전과 같은 행동이나 말투가 튀어나올 법도 한데, 이건 어떻게 된 게 기억을 잃기 전 유일반과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0.00000001퍼센트도 없다.
얼굴만 똑같다고. 이게 말이 돼?
“어?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녀석을 매의 눈초리로 관찰하던 태영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녀석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 상자를 꺼낸 것이다.
“쟤 진짜 돌았나 봐!”
태영은 후다닥 동아리방을 달려 나갔다. 그러곤 녀석이 상자에서 꺼낸 하얗고 기다란 것을 잽싸게 낚아챘다.
“야! 여기 학교거든? 금연 구역이라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학생이 담배 피우면 안 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태영은 손에 든 것을 휙 구긴 다음 바닥에 버려 버렸다.
근데 좀 이상했다. 어디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냄새의 근원지는 하얗고 기다란 그것이었다. 바닥을 보니 담뱃재가 아닌 검은색 잔해들이 보였다.
초콜릿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녀석에게서 뺏은 것이 담배가 아니라 초콜릿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이미 늦었다.
녀석이 뭔가 깊은 빡침을 느낀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영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우와. 그거 외국 건가 봐? 나도 그 초콜릿 하나만 주면 안 될까?”
“먹고 싶다는 말을 참 과격하게도 하네?”
녀석은 바닥에 떨어진 초콜릿을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상자 안에서 하얀색 포장지로 감싼 초콜릿을 꺼냈다. 그러곤 태영에게 내밀었다.
“자, 한 대 피워.”
“치이. 야, 솔직히 오해할 만하지. 무슨 초콜릿이 그런 상자에 들어 있냐? 포장지는 왜 하얀 거냐고. 게다가 너 폼이 꼭 피울 것 같은 분위기였어.”
“뭐? 너 그거 도로 내놔.”
“줬다 뺏는 게 어딨어.”
태영은 냉큼 껍질을 까서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대박.”
이제껏 수많은 초콜릿을 먹어 봤지만, 이건 정말 최고의 맛이었다. 태영의 미간이 절로 춤을 췄다.
“와, 이거 어디서 팔아? 너무 맛있다.”
뭐랄까, 입에서 사르르 녹아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엔도르핀이 마구 샘솟아 에너지가 몸 전체에 가득 충전되는 느낌.
황홀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태영을 녀석이 빤히 쳐다봤다. 무슨 초콜릿 하나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참 이상하게도 또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고민하던 녀석은 아예 상자를 통째로 태영의 품에 던지듯 줘 버렸다.
태영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쁜 얼굴로 방방 뛰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다 먹어도 돼?”
“입술에 묻은 거나 마저 먹어.”
“헙!”
태영이 부끄러워하며 얼른 손등으로 입술을 슥슥 닦았다.
“이제 됐어? 안 묻었지?”
태영이 가까이 다가와 입술을 쭉 내밀자 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태영의 어깨를 툭 밀었다. 뒤로 밀려난 태영이 녀석을 흘겨봤다.
“뭘 봐? 근데 넌 교실 안 가도 되냐?”
“아, 맞다! 나 어떡하지? 이번 달 벌점 엄청 쌓였는데. 일단 나 갈게!”
정신없이 발을 동동거리던 태영이 비상구 쪽으로 달려가려는데, 녀석이 태영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왜?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뭘?”
“동아리방 저 꼴 난 거. 내 머리 이 꼴 난 거.”
녀석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태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동아리방 저렇게 된 건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야? 누군진 몰라도 범인 때문에 너도 이렇게 된 거잖아. 집에는 얘기했어?”
“당분간 너만 알고 있어.”
“나만?”
이 엄청난 일을 나만 알고 있으라고? 태영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잠깐, 왜 나한테만 얘기한 건데?”
“니가 아침부터 귀찮게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암튼 그렇게 알고. 쉬는 시간마다 와서 청소 좀 해 놓고.”
“야! 내가 무슨 청소부냐? 그리고 저긴 원래 저렇게 좀 더러웠어. 니가 보기보다 정리를 썩 잘하는 타입은 아니었거든.”
“그래서 안 하겠다고?”
“응!”
“안타깝네. 너 하는 거 봐서 기억 찾으면 다시 사귀어 볼까 했는데.”
그 말은 보류 끝, 다시 연애 시작?
“청소할게!”
태영은 아주 진지하게 다부진 얼굴로 외쳤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설마 나 놀린 거야?”
“그게 아니라 방금 니 표정이 누구랑 닮아서. 하, 진짜 웃기는 애네.”
녀석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리고 일부러 헛기침까지 해 댔다.
녀석의 순수한 웃음을 비웃음으로 오해한 태영은 기분이 점점 나빠지려 하고 있었는데,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잠깐, 내가 누굴 닮았다고? 누구? 너 전에도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었거든. 내가 니가 아는 어떤 사람을 닮아서 자꾸 신경 쓰인다고.”
“사람이 아닐 텐데?”
“뭐야. 그럼 뭔데? 너 기억나는 거야?”
태영의 예리한 지적에 녀석은 짐짓 태연한 척하며 턱을 매만졌다. 그러곤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다는 녀석의 표정에 태영의 얼굴이 별안간 환해졌다.
“어떡해! 유일반 너 기억이 돌아오고 있나 봐. 빨리 잘 생각해 봐. 내가 누굴 닮았는데?”
재촉하는 태영의 물음에 골몰히 뭔가를 떠올려 보던 녀석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윽!”
“왜 그래?”
“몰라. 생각하려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
“아프다고?”
태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녀석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보건실 가야 되는 거 아니야?”
“됐어. 일단 너만 없어지면 될 것 같아. 빨리 가.”
“어?”
“가라고!”
“그래도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갈게!”
망설이던 태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옥상을 벗어났다. 녀석이 빨리 안 가면 뒤진다, 고 눈으로 욕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우……. 이제야 조용하네.”
사람 한 명 없을 뿐인데 이토록 평온하다니.
태영이 없는 옥상엔 적막이 흘렀다.
이제야 그는 언제 아팠냐는 듯 기지개를 켜며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초록색으로 물든 교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운동장엔 체육 수업을 받는 학생들.
때마침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곧 교내 이곳저곳에선 더 많은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정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그는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널브러진 책과 노트북, 각양각색의 부품들, 먼지 쌓인 창틀을 본 그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더러워. 좀 치우고 살지.”
그는 허리를 굽혀 급한 대로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하나씩 주워서 정리하다가 구석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이게 뭐야?”
그가 바닥에서 주운 것은 빨간색 손목 보호대였다.
* * *
“송바위!”
벌컥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이닥친 태혁은 침대로 직행했다. 그러곤 이불 속에 파묻힌 바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오, 왜요?”
바위가 잔뜩 피곤한 얼굴로 눈을 비비며 태혁을 쳐다봤다. 그러자 태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전동 드라이버 어딨냐?”
“신발장. 됐죠?”
하고 다시 누우려는 바위의 팔을 태혁이 잡아당겨 다시 일으켰다.
“으, 또 왜요?”
“모태영 말이야.”
“왜요? 걔 무슨 일 있어요?”
졸려서 반쯤 감겨 있던 바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요고 봐라? 태혁이 남몰래 웃음을 참으며 놀리듯 말했다.
“인마. 그냥 남자답게 고백을 해.”
“뭘요.”
“너 모탱 좋아하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니거든요? 내가 걜 왜 좋아해요?”
강하게 부정하는 바위를 태혁이 쳐다보며 쯧쯧 혀를 내찼다.
“그러니까 뺏기지. 너도 알지? 모탱 남친 생긴 거.”
“어차피 둘이 오래 못 가요. 그 새끼 좋아하는 여자애 따로 있거든.”
“뭐? 헐……. 대박. 그래서 어제 모태영이 울었나?”
“울었어요?”
바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태혁의 표정은 더더욱 심각했다.
“어. 걔 울었어. 어제 데이트라고 신나서 나가더니 밤늦게 들어왔더라고.”
“밤늦게? 언제요? 몇 시?”
“몰라. 암튼 엄청 늦게 들어왔어. 뭐 하다 이렇게 늦게 들어왔냐니까 울었는지 눈이 빨갛더라고. 차였나 보다 생각했는데 역시 차였구나. 우리 불쌍한 모탱. 니가 위로 좀 잘해 줘라. 혹시 알아? 그러다 둘이 눈 맞을 수도…….”
“아니라니까요!”
“짜식, 부끄러워하긴. 암튼 드라이버는 신발장에 있다고?”
“네.”
“알았어. 인마, 방 좀 치우고.”
태혁이 나가려다가 발가락에 걸린 빨간색 손목 보호대를 뻥 걷어차 버렸다.
아씨. 저걸 왜 발로 차?
바위가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가 보호대를 주워 들었다. 소중한 물건인 듯 어루만지며 먼지를 털어 내던 바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머지 한쪽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는 태혁이 나가자마자 서랍장과 쓰레기통을 마구 뒤졌다.
“어디 갔지?”
기억을 더듬어 보던 바위는 문득 어제저녁 동아리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별안간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