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6화 (7/67)
  • [6화]

    “저 유일반 맞는데요.”

    다소 경직된 얼굴로 그가 대꾸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장난이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뭘 그렇게 정색을 하나. 그나저나 일반 군, 2학년 1반 교실은 옆 건물이야.”

    “네?”

    “어허. 오늘따라 우리 일반 군이 참 이상하네? 복장도 그렇고…… 이 시간에 가방 메고 있는 걸 보니 설마 지금 등교한 겐가? 아무리 전교 1등 명원고의 자랑 유일반이라지만, 교장인 내가 이걸 보고 그냥 넘어가야 하는 것인가…….”

    박 교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려던 그때.

    “교장 선생님!”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태영이었다. 커다란 화분 뒤에 숨어 있던 태영은 두 사람을 지켜보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등판하고 말았다.

    얼떨결에 박 교장 앞을 가로막은 태영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제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교. 장. 선생님!”

    태영은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녀석에게 이분은 그냥 할아버지가 아니라 교장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녀석을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2학년 2반 모태영이라고 합니다.”

    “알지. 잘 알지. 우리 태영이.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해 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동안 놀기만 했다지?”

    아오. 얘기가 또 왜 그리로 튀어?

    태영은 박 교장의 디스에 열불이 났지만 겨우 참았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이 시간에 왜 교실이 아니라 밖을 돌아다니는 거지?”

    박 교장의 물음에 태영은 녀석을 흘끔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은 니가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게다가 박 교장의 매서운 눈초리도 태영에게만 향해 있었다.

    태영의 이마엔 식은땀이 났다. 박 교장한테 잘못 걸리면 벌점이 아니라 강제 전학은 일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박 교장은 교내에서 독불장군으로 유명했다.

    “어서 대답 못 해!”

    “네! 대답할게요. 대답, 그러니까 어…… 제, 제가 유일반 대신 체육 대회 주장을 맡아서요.”

    “오호. 그래?”

    박 교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우리 일반 군은 세계로봇대회 준비만 열심히 하면 되겠네?”

    “네! 그렇죠. 제가 꼭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유일반 좀 데려가도 될까요? 그 인수…… 그, 그.”

    “인수인계?”

    “네! 그거 인수인계받아야 되거든요.”

    “그래. 싹 다 인수인계받고 우리 일반 군은 체육 대회엔 일절 신경 안 쓰게 태영이가 잘 준비하면 되겠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간신히 고비를 넘긴 태영은 계단 위에 멀뚱히 서 있는 녀석의 손목을 잡아끌고 후다닥 본관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행여 박 교장이 보고 있을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교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것 좀 놓지.”

    “어? 아, 미안.”

    뒤늦게 자신이 녀석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태영이 얼른 손을 놨다. 그러자 녀석은 제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태영을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2학년 1반 교실은 옆 건물이라던데? 너 왜 거짓말했어?”

    “그냥 일종의 테스트랄까. 니가 기억을 잃었다는 게 도저히 안 믿겨서.”

    “그래서 지금은 믿고?”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어. 교장 쌤도 못 알아보는 너를…….”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사고가 났다고 그랬지? 근데 어디 다친 덴 없는 것 같단 말이지, 겉으로 보기에도 멀쩡하고.

    그렇다면 설마…… 드라마에서처럼 뭔가 큰 충격을 받고 기억이 지워진 건가?

    “그 표정은 뭐냐?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봐?”

    태영은 넋을 놓고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기 있잖아. 나 질문 하나만 해도 돼?”

    “어떤 사고길래 기억을 잃었냐고?”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다 쓰여 있다는 걸 본인만 모르는 건지.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뭔가 곰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동아리방으로 가자.”

    “거긴 왜?”

    “거기 답이 있으니까. 내가 왜 사고가 났는지에 대한 답. 그니까 앞장서. 동아리방 어딘지 몰라.”

    “세상에, 동아리방도 기억 못 하는 거야?”

    교실보다 동아리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유일반인데. 그렇게 소중한 자신의 공간조차 기억을 못 하다니. 태영은 갑자기 녀석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표정은 뭐냐?”

    “유일반, 너무 걱정하지 마. 넌 똑똑하니까 금방 기억 돌아올 거야. 내가 도와줄게.”

    “니가 뭘 도와줄 수 있는데?”

    “기억 찾는 거.”

    “됐고. 빨리 가기나 해.”

    녀석은 태영의 작은 몸을 돌려세운 후 앞으로 툭 밀어 버렸다. 고꾸라질 뻔한 태영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왠지 모르게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꾹 참았다.

    아오, 불쌍하니까 봐준다.

    태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 * *

    “이게 다 뭐야?”

    태영은 난장판이 된 동아리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흘끔 옆을 보자 녀석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어떡해…….”

    태영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망가진 로봇을 내려다봤다. 감히 만질 수도 없었다. 너무 처참했다.

    “왜 이렇게 된 거야? 얘 되게 멋있었는데…….”

    “…….”

    태영은 저만큼이나 아니 저보다 더 착잡한 얼굴로 로봇을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을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어떡하지? 이거 니가 되게 열심히 만든 거잖아. 게다가 대회도 얼마 안 남았고…… 꺅!”

    갑자기 태영이 비명을 지르며 놀라 나자빠졌다. 로봇 옆에 핏자국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녀석도 덩달아 놀랐다. 아니, 놀란 게 아니라 뭔가 좀 이상했다. 녀석은 핏자국과 망가진 로봇을 보더니 휘청거렸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진 모양이다. 녀석은 괴로운 듯 두 눈을 가린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태영은 얼른 가방에서 체육복을 꺼내 핏자국 위에 올려놓았다.

    “저기…… 괜찮아? 혹시 사고가 났다는 게…… 여기서?”

    태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자 녀석이 겨우 고개를 들고 망가진 로봇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

    태영은 순간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로봇 사진을 찍을 때 실물이 훨씬 낫지 않느냐며 로봇 자랑을 하던 일반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그래, 충격받을 만도 하지. 얼마나 공들여 만든 로봇인데, 이렇게 망가져 버렸으니 저 심정이 오죽할까.

    태영은 어떻게든 녀석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속으로 어떻게 위로를 하면 좋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오, 씨X, 잡히면 죽여 버릴 거야.”

    “!”

    헐, 얘 방금 욕한 거야? 씨…… 씨 뭐라고?

    태영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렇게 과격한 녀석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데.

    “야, 보류!”

    “어? 어. 왜?”

    아, 이제 내 이름은 ‘보류’가 된 거구나.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괴롭고 슬펐던 녀석의 눈빛이 어느새 돌변해 있었다.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너 나 도와준댔지?”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얘 지금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은데. 불안한데.

    태영은 아까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도와……줘야지? 내가 너 기억 찾을 수 있게 도와줄…….”

    “기억은 됐고. 일단 내가 누굴 좀 찾아야겠거든?”

    “누굴?”

    “내 로봇…… 내 머리, 망가뜨린 새끼.”

    “뭐? 그럼 이거 누가 일부러 망가뜨렸다는 거야?”

    태영은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대체 누가 그랬는데?”

    태영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녀석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이제 찾아야지.”

    “어떻게?”

    “몰라. 이제 생각해야지.”

    태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책 없는 녀석을 쳐다봤다.

    하긴, 자기 새끼 같은 로봇이 이 지경이 됐으니 제정신일 수가 없지. 내가 이해해 주자.

    “유일반, 있잖아…… 내 생각엔 넌 일단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좀 쉬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그럴 수도 있지. 어쩌면 너 자고 일어나면 싹 다 기억날 수도 있어. 분명 일시적인 걸 거야.”

    “그래? 그니까 지금 나 미쳤다는 말을 돌려서 한 거지?”

    “그렇지. 넌 지금 살짝 미친 거……. 아니, 그게 아니라.”

    “야, 보류. 나 안 미쳤어. 진지하다고.”

    녀석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더니 태영을 쳐다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뜨거운지 태영의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 그럼 진지하게 대답해 봐. 이 로봇은 어떻게 할 건데?”

    “고쳐야지.”

    “기억 안 난다며.”

    “그거랑 별개로 내 지능은 멀쩡하니까. 일단 여기 좀 치워.”

    “내가 왜?”

    “그럼 누가 해?”

    “여기 니가 쓰는 곳이니까 니가 해야지.”

    “너 내 여친이라며.”

    “보류라며.”

    “깨끗하게 안 치우면 보류 끝나자마자 너 차 버릴 거야.”

    “뭐?”

    태영은 너무 황당해서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하는 말마다 사람을 이렇게 열받게 할 수가 있는 건지. 믿을 수 없어. 얘가 진짜 유일반이라고?

    “야! 너 진짜 유일반 맞아? 이건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완전 딴사람 수준이잖아. 너 원래 이렇게 막돼먹지 않았다고. 얼마나 착하고, 배려심 깊고, 자상하고…….”

    “그만.”

    읊조리는 목소리. 갑자기 녀석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태영은 왜 저러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녀석이 동아리방을 나가며 말을 이었다.

    “난 남이랑 비교당하는 거 싫어.”

    태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방금 유일반과 유일반을 비교한 건데. 그게 왜 남이랑 비교한 거야? 어제의 유일반도 지금의 유일반도 같은 유일반인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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