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3화 (4/67)
  • [3화]

    “이거 놔!”

    태영이 험악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대방의 힘이 더욱 세져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너 보고 싶어 하는 애들 많거든? 내 전화 한 통이면 당장 달려올걸?”

    험악남이 한 손으로 태영을 제압하고 나머지 한 손으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를 본 태영은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났는지 험악남을 세게 밀쳐 버렸다. 그러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왼발로 험악남의 손을 아니, 손에 쥔 핸드폰을 차 버렸다.

    “이런 미친!”

    험악남이 경악을 하며 저 멀리 날아간 핸드폰을 어이없게 쳐다봤다.

    “너 진짜 내 손에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태영은 솔직히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 얼굴도 모르는 놈한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먼저 시비 건 사람은 너잖아! 대체 내가 너한테 어쨌다고 이러는 건데?”

    “아직도 지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네? 나 세원중 축구부였어.”

    “그, 그래서 뭐! 뭐 어쩌라고!”

    어깨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한마디도 지지 않고 덤비는 태영을 험악남이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다 크게 욕을 지껄이며 태영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태영의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험악남의 주먹을 가로챘다. 그러곤 태영을 제 뒤에 숨겼다.

    “괜찮아?”

    태영은 저를 구해 준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를 구해 준 이는 다름 아닌 유일반이었다.

    뛰어왔는지 항상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혹여 태영이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정한 말투와 행동으로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반을 올려다보던 태영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 * *

    “잠깐 여기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라도 좀 사 올게.”

    일반은 파라솔 밑에 태영을 앉힌 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태영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직도 지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네? 나 세원중 축구부였어.’

    억울했다. 아니, 내가 왜 축구부 애들한테까지 원망을 들어야 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 말대로 지방으로 이사 가 버릴걸.

    아니지. 그랬다면 해니도 수아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그건 아니야. 명원고에 입학한 건 잘한 일이야. 그나저나 아까 걔 내 교복 봤을 텐데 소문이라도 내면 어떡하지? 그래서 그 애들이 날 찾아오면…….

    “후우…….”

    태영이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있는데, 한쪽 뺨에 뭔가 닿았다.

    “앗, 차가.”

    “미안. 넋 놓고 있길래 정신 차리라고.”

    일반이 음료수 뚜껑을 따서 태영에게 내밀었다.

    “마셔.”

    “고마워. 근데 너 원진남고 애들이랑 아는 사이야? 다들 너 보자마자 도망가던데.”

    “나 유일반이잖아.”

    일반이 교복에 달린 자신의 명찰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명원시에서 나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 나지. 나 명원시 자랑이잖아.”

    일반은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태영의 긴장을 풀어 주려 노력했다. 그를 알아차린 태영은 그가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근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태영이 너 걸음도 엄청 빠르더라. 겨우 따라잡았네.”

    “날 따라왔어? 왜?”

    “그냥. 지나가는 길에 니가 보여서.”

    “그래서 따라왔다고?”

    “어. 왜? 안 돼?”

    일반이 피식 웃으며 음료수를 마셨다. 그 모습을 옆에서 흘끔 쳐다보던 태영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자꾸만 뱃속이 간질거리고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었다.

    눈썹을 덮는 댄디한 헤어스타일에 선한 눈매. 곧게 뻗은 콧대와 웃을 때마다 생기는 보조개. 그리고 음료수를 마실 때마다 움직이는 남성적인 목울대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얘는 이렇게 생긴 주제에 왜 착하기까지 하지? 왜 다정하냐고.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왜?”

    “계속 쳐다보길래.”

    “아, 아냐 아냐. 그, 그게……. 맞다. 너 손목!”

    속마음이 들킬세라 태영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때마침 캔 음료를 들고 있는 일반의 손목이 눈에 들어와서 다행이었다.

    “손목 안쪽에 있는 별 모양 그거 타투야?”

    태영의 물음에 일반이 제 손목에 새겨진 별 모양을 응시했다.

    “타투는 아니고 흉터.”

    “아…… 근데 그거 원래 오른쪽에 있었어?”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더듬거리며 태영이 말했다. 그러자 일반이 약간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왜?”

    “넌 기억 못 하는 것 같아서 원래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뭔데?”

    “너 입학식 전날 수영장에서 사람 구해 준 적 있지?”

    “…….”

    “그때 니가 구해 준 사람이 나야. 기억 안 나? 분명 그땐 왼쪽에 그 별 모양 흉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미안. 기억 안 나. 그 무렵에 좀 많은 일이 있어서…….”

    “그렇구나. 하긴 그때 너 되게 예민해 보였어. 나한테 막 욕도 했다니까.”

    “욕을 해?”

    “어. 눈으로 욕했어. ‘당장 꺼져’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말야.”

    태영은 그 당시 일반을 떠올리며 흉내 냈다. 그러자 일반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 왜 웃어? 너 설마 기억 못 하는 척하는 거 아니야?”

    “미안. 그때 모습은 그냥 잊어 주라. 내가 잘못했네. 되게 무서웠겠다.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봤으니.”

    “괜찮아. 암튼 이제 말할 수 있겠다. 그때 구해 줘서 무지무지 고마웠어.”

    “그래. 그때의 나에게 전해 줄게.”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일반이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태영의 가방도 어깨에 둘러멨다.

    “집이 어디야? 데려다줄게.”

    “아니야. 여기 바로 앞이라 괜찮아. 가방 이리 줘.”

    남자한테 받는 친절이 익숙하지 않았던 태영은 얼른 가방을 뺏어 들었다. 그러자 일반이 잔뜩 서운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우리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사실 나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뭐든 물어봐.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말을 할까 말까 머뭇거리던 태영이 일반을 흘끔 보더니 결국 얘기를 꺼냈다.

    “너 왜 나한테 잘해 줘?”

    태영의 물음에 일반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가 잘해 줬다고?”

    “응. 동아리방에 멋대로 들어가도 뭐라고 하지도 않고, 로봇 사진도 맘껏 찍게 해 주고. 아까처럼 위험할 때 구해 주고, 기분 풀라고 음료수도 사 주고.”

    “아…….”

    잘해 줬다는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는지 일반이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잘 들어. 이거 절대 수작 부리는 거 아니다?”

    일반의 말에 태영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자 곧장 일반이 대답했다.

    “실은…… 니가 많이 닮았어. 내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다고? 누구?”

    “누구냐면…… 다음에 직접 보여 줄게.”

    이상하다. 이거 되게 신박한 수작 같은데. 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금 나 꼬시는 것 같은데.

    “어? 안 믿는 표정이네? 진짜야. 넌 그 사람이랑 진짜 닮았어. 그래서 자꾸 니가 눈에 밟히는 것뿐. 딱 거기까지야. 정말 너한테 딴마음 같은 거 없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아…… 그, 그래?”

    사적인 마음은 절대 없다고 극구 부인하는 일반의 태도에 태영은 은근 기분이 나빴다. 그 말인즉슨 나 너 안 좋아하니까 괜한 오해 하지 말고 꿈 깨라는 것인가.

    “그럼 나 먼저 간다.”

    게다가 저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간다. 가란다고 진짜 가다니. 그 순간 태영은 확신했다.

    그린 라이트는 개뿔, 꿈 깨라 모태영!

    이렇게 빨리 러브 모드가 저세상으로 가 버릴 줄 알았으면 맞팔 얘기나 꺼내 볼걸!

    미친 듯이 아쉬워하던 태영은 아까 일반이 한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실은…… 니가 많이 닮았어. 내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다고? 대체 누구랑? 설마 첫사랑은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나같이 생긴 애가 유일반의 첫사랑과 닮았을 리가 없잖아. 그럼 대체 누굴까?

    태영의 궁금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 * *

    “아오, 궁금해 죽겠네!”

    주말이면 항상 늦잠을 자던 태영이 웬일인지 아침 일찍 깨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부모님? 아니야. 유일반 외모는 타고난 유전자 덕분일 거야. 그렇다면…… 엑스!”

    공책에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 대신 부모님, 삼촌, 이모, 할머니, 중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 따위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위에 하나씩 엑스자를 그리던 태영은 볼펜을 휙 던져 버렸다.

    “에잇, 모르겠다!”

    책상을 벗어나 침대 위에 점프해 몸을 눕힌 태영은 천장을 바라보며 두 눈을 끔뻑였다.

    “유일반은 지금쯤 뭐 하려나? 공부하겠지?”

    문득 이틀 전 자신을 구해 준 일반의 모습이 떠오른 태영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내일은 등교하자마자 유일반한테 감사의 표시로 매점에서 제일 비싼 거 사다 줘야지.

    태영은 일반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옴마얏!”

    태영이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하얀 천장 위에 태혁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넌 어째 누워 있어도 못생겼냐?”

    “우씨! 노크 좀 하고 들어와!”

    “노크했거든?”

    태영은 누워 있는 저를 무슨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오빠를 째려봤다.

    “나가. 나 더 잘 거야.”

    “너 잘 시간 없어.”

    “왜?”

    “옆집에서 전동 드라이버 빌려 와야 되거든.”

    “내가 왜? 싫어. 오빠가 갔다 와.”

    “그래? 그럼 너 오늘부터 TV 못 봐. 안 고쳐 줄 거야. 이게 기껏 시간 내서 고쳐 주려고 했더니만.”

    앗, 어떡하지? 오늘 드라마 마지막 회 하는 날인데.

    에이, 아니야. 됐어. 나중에 핸드폰으로 다시 보기로 보면 되지. 옆집은 절대 안 가!

    고민을 끝낸 태영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송바위 때문이지?”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옆집 갔다가 송바위 만날까 봐 싫다는 거잖아. 중딩 때까지만 해도 그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애가. 너네 대체 언제 화해할 거냐?”

    “그런 거 아니거든? 나가!”

    태영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태혁은 나가려다 말고 책상 위 태영의 핸드폰을 몰래 주머니에 넣었다.

    “야, 모탱.”

    “나가라고!”

    “너 나한테 팔로우 신청했더라? 그래서 내가 바로 거절을 눌렀지.”

    꼼지락거리는 이불에서 태영의 분통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게 재밌어 죽겠는지 태혁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대신 이 오빠가 너 인플루언서 만들어 줄게. 나만 믿어.”

    “뭐래? 나가라고!”

    참다못한 태영이 별안간 이불에서 나와 태혁을 향해 베개를 집어 던졌다. 하지만 태혁이 좀 더 빨랐다. 그는 이미 거실로 달려 나간 뒤였다.

    “아오, 저 웬수!”

    주말에도 편히 쉴 수 없게 만드는 오빠 때문에 태영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 * *

    오늘은 뭔가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일단 핸드폰이 없어졌고, 시리얼을 먹으려고 잔뜩 그릇에 담았는데 우유가 없었고, 샴푸도 똑 떨어져 비누로 감은 머리가 뻑뻑했고,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쳐 지각까지 했다.

    “오늘 왜 이러지?”

    안 좋은 일이 연속되자 태영은 심란했다. 하지만 애써 밝게 웃으며 교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교실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뭐랄까. 나를 보는 친구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달까? 게다가 왜 다들 나만 쳐다보지?

    “모탱!”

    반 아이들이 태영을 흘끔거리며 수군대는 사이, 해니가 달려와 태영을 끌고 자리로 돌아갔다.

    “너 그거 진짜야?”

    “뭐가?”

    “너 SNS에 올린 로봇 말이야. 그거 어떻게 된 거야?”

    “뭐? 뭘 올려? 로봇?”

    태영은 얼른 해니의 핸드폰을 뺏어 자신의 SNS 계정을 확인했다.

    피드에 떡하니 올라가 있는 로봇 사진을 확인한 태영은 경악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유일반이다!”

    동시에 창문 너머로 유일반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유일반을 발견한 태영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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