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혹시 오늘 방과 후에 시간 있어?”
“있어! 나 시간 많아!”
으악, 너무 빨리 대답했다. 태영은 제 입술을 원망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일반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방과 후에 운동장으로 좀 나올래?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그 할 말이라는 게 뭔지 느낌이 팍 오고야 말았다. 순간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싫어?”
“아니! 좋아.”
이번에도 너무 빨랐다. 남자한테 만나자는 말 처음 듣는 사람처럼.
으, 나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막 설레지?
태영은 속마음이 들킬세라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이곤 후다닥 동아리방을 벗어났다.
동아리방에서 굳어 있던 표정과 달리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태영의 광대가 점점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두 뺨은 발그레해지고 두 눈에선 하트가 뿅뿅 쏟아지고 있었다.
* * *
“이거 그린 라이트 맞지?”
청소 시간에 걸레로 창틀을 닦는 둥 마는 둥 하던 태영은 해니를 붙잡고 재차 물었다.
“맞지? 맞을 거야. 사실 그 말을 듣는 순간 느낌이 딱 오더라고.”
확신에 찬 태영과 달리 해니는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유일반이 할 말이 있다면서 방과 후에 만나자고 했다고?”
“그렇다니까!”
“근데 왜 운동장이야?”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태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지. 나한테 할 말이 있다잖아 할 말이.”
“그 할 말이 고백이라고?”
“응. 그런 뉘앙스였어. 나 어떡하지? 유일반한테 고백받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바로 알았다고 하면 없어 보이니까 좀 더 생각해 본다고 할까?”
잔뜩 들뜬 태영을 해니가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모탱, 정신 차려. 고백 아니면 어쩌려고.”
“절대! 네버! 아닐 리가 없어. 내 생각엔 유일반도 날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나처럼 그때부터 쭈욱 지켜보고 있었던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태영이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해니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태영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사실 입학식 전날……. 에이, 아니야. 일단 고백받으면 얘기해 줄게.”
“고백 못 받으면 얘기 안 해 주고?”
“그럴 일 없거든요?”
뭐에 꽂히면 뒤도 안 보고 경마장 말처럼 마구 달리는 태영의 성향을 잘 알고 있던 해니는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그저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며 걸레를 들고 춤까지 추는 태영의 행복한 표정을 안타깝게 쳐다볼 뿐이었다.
* * *
드디어 그 시간이 다가왔다.
태영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해니의 립스틱을 뺏어 바른 후 교실 밖으로 냅다 달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또 가슴은 왜 이렇게 두근두근하는지. 태영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유일반에게 고백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아직 결정하진 않았다. 그냥 그때의 내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는데.
“어?”
운동장으로 달려 나온 태영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태영은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손으로 마구 문질렀다.
운동장엔 저 말고도 여학생 수십 명 정도가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꺅! 저기 온다!”
그리고 그때였다.
멀리서 유일반이 다가오자 여학생들이 우르르 달려가 유일반을 삥 둘러쌌다. 그리고 여학생들을 향해 유일반은 미소로 화답하고 있었고…… 태영은 그때 깨달았다.
할 말이 나한테만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그들과 동떨어져 홀로 우뚝 서 있던 태영은 생각했다. 이대로 땅이 꺼져 버려 지구 핵까지 파고 들어가 숨어 버리고 싶다고.
* * *
다음 날. 아침 자습 시간.
“풉!”
어제 운동장에서 있었던 얘기를 태영의 노트를 통해 전달받은 해니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태영, 최해니! 조용히 좀 해!”
학습 부장이 태영을 째려봤다. 그러자 해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우리 한마디도 안 했거든? 살짝 웃기만 했지 말은 안 했다고.”
사실 해니는 그동안 학습 부장 오필희가 툭하면 자신과 태영을 지목해 학급 분위기를 잡아 왔던 게 마음에 안 들던 터였다.
그렇게 오필희와 해니 사이에 신경전이 오고 갔고,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태영이 중재에 나섰다.
“필희야, 미안한데 나랑 해니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될까?”
태영이 애교 있게 말했다. 그러자 오필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태영은 가기 싫다는 해니를 억지로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왜 싸우고 그르냐?”
“저 계집애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너랑 내가 떠들면 뭐 얼마나 떠들었다고 걸핏하면 조용히 하래.”
“우리가 평소에 좀 떠들긴 했잖아. 습관 됐나 보지, 물리처럼. 물리도 뭐 좀만 잡담 소리 들리면 ‘모태영!’ 하잖아. 우씨, 내가 그거 땜에 어제 얼마나 쪽팔렸는 줄 알아?”
태영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모를 수가 없던데? 너 물리 시간에 맨날 복도에서 벌서고 있잖아. ‘모태영!’ 하는 물리 선생님 목소리가 우리 반까지 들리거든.’
아오, 됐어. 유일반한테 떠드는 애로 낙인찍혔든 말든 이제 상관없잖아. 걔한테 잘 보여서 뭐에 쓴다고……. 그치만! 하지만! 어젠 정말 치욕스러웠다고.
“모탱, 어제 일은 잊어.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뭐가 어떻게 돼?”
“어제 유일반이 하려던 말이 체육 대회 발야구 멤버로 출전해 달라는 거였다며. 하기로 했어?”
또다시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태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다고 했다고?”
“그럼 어떡하냐? 거기까지 갔는데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게다가 그 얼굴로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하냐고.”
“거절을 왜 못 해? 하기 싫으면 안 한다고 하면 되지.”
“잘생겼잖아.”
“뭐?”
“너 유일반 가까이서 본 적 없지?”
“넌 있고?”
“있지 그럼. 나 사실 걔랑 그…… 그…….”
“아오 답답해. 뭔데? 너 유일반이랑 뭐 있었지? 어제도 입학식 전날 뭐라 뭐라 말하려다 말았잖아. 고백받으면 해 주겠다던 얘기가 뭔데?”
“고백 못 받았으니까 말 안 할래.”
“이 치사한 모탱! 그러게 내가 아니랬잖아. 누가 고백을 운동장에서 하냐?”
“왜? 운동장에서 고백하면 안 되는 거야?”
태영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해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친구야, 생각을 해 봐. 유일반같이 잘난 애가 그렇게 확 트인 운동장에서 고백할 리가 없잖아. 전교생한테 다 소문날 텐데. 진짜 미친 듯이 사랑하는 여자면 몰라도. 암튼 말해 봐. 유일반이랑 입학식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해니가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자 태영은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 전날 벌어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키스했어!”
“뭐? 뭐, 뭘 해?”
해니가 너무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 그 정도로 쇼킹한 얘기였다.
“유일반이 내 첫 키스 상대라고.”
“너 혹시 꿈꾼 거 아니야? 꿈에서 그런 거 아니냐고.”
“진짜라니까!”
“연애도 안 해 본 애가 무슨 키스를 했다고…….”
“일단 들어 봐.”
태영이 은밀한 목소리로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입학식 전날 내가 학교에 온 적 있었거든? 그때 수영장에 빠진 거지.”
“누가?”
“내가. 근데 그때 마침 누가 날 구한 거야. 그리고 인공호흡을…….”
“에라이! 너 꼭 키스 안 해 본 티를 내야겠냐? 인공호흡이 키스냐? 키스는 말이지…….”
자세히 묘사를 하려던 해니가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았다. 다음 말을 기다리던 태영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게 키스가 아니면 뭔데?”
“말 그대로 인. 공. 호. 흡! 마우스 투 마우스. 오케이? 암튼 그때 널 구한 사람이 유일반이라고?”
“응. 내 생명의 은인.”
“근데 그런 엄청난 일까지 있었는데, 넌 왜 지금껏 유일반이랑 교류가 없었어?”
“날 기억 못 하는 것 같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그땐 내가 머리도 짧고, 살도 좀 쪄 있는 상태였잖아.”
“하긴 너 입학식 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사람 됐지. 그러니까 이제는 좀 자신감을 가져. 당장 유일반한테 가서 그때 일 말하고, 그 핑계로 친한 척해 보라고. 혹시 알아? 맞팔 해 줄지?”
“아! 맞팔!”
어제 동아리방에 간 게 맞팔 때문이었는데. 로봇에 정신이 팔려 까먹고 있었다. 그게 이제야 생각난 태영은 제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으, 이 똥멍청이!”
“왜 자학하고 그르냐? 아직 늦지 않았어. 이따 종 치면 동아리방에 다시 올라가 봐.”
“또? 그건 너무 민폐지 않나? 어제도 사진…….”
절대 어제 찍은 로봇 사진을 남에게 보여 줘선 안 된다던 일반의 말이 떠오른 태영은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해니가 화장실 거울을 보며 외모 점검하느라 못 들은 것 같았다.
“최니, 나 먼저 교실 간다.”
“잠깐! 모탱, 근데 넌 중학교 때 친구 없어?”
“어?”
해니의 물음에 태영이 평소답지 않게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를 이상하게 여긴 해니가 걱정스레 쳐다봤다.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근데 중학교 친구는 왜?”
태영이 애써 밝은 척 웃으며 은근슬쩍 물었다. 그러자 해니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 팔로워 수 말이야. 고작 5명이 뭐냐. 그중에 둘은 나랑 유권이. 나머지 셋은 광고 계정. 이 스피드로 청소년 기자단 합격하겠냐? 중학교 친구들한테라도 연락해서 맞팔 하자고 해.”
“어? 어. 그럴게. 아, 수아! 수아한테도 맞팔 해 달라고 해야겠다.”
“쯧쯧. 정신 차려. 수아 며칠째 결석이잖아.”
어제 운동장에서 있었던 후유증 때문에 절친 수아의 결석 소식을 깜빡 잊고 있었다. 태영은 이제야 수아의 안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리 수아 또 밤새 공부하다 쓰러졌나? 병문안 갈까?”
“아니. 그건 수아한테 도움 안 될 듯. 걍 냅둬. 아파서 안 오는 게 아니라 집에서 공부하느라 안 온 것 같으니까. 과학 경시대회 얼마 안 남았잖아.”
“아. 그렇겠구나. 니 말대로 집에서 공부하고 있겠네. 나도 본받아야 되는데. 수아 성적 반만 돼도 4년제는 갈 수 있을 텐데.”
“신세 한탄 그만하시고, 넌 유일반한테 맞팔이나 해 달라고 해. 그럼 게임 끝이니까.”
역시 내게 유일한 기회는 유일반인 것인가. 태영의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유일반과 맞팔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편지를 보낼까?”
그래, 그게 좋겠어. 태영은 편지 내용을 궁리하며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해 질 무렵 가로등도 켜지지 않은 골목은 꽤 으슥했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원진남고 교복을 입은 무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서 있는 폼이 불량한 게 양아치가 분명했다.
태영은 망설임도 없이 뒤로 휙 돌았다.
그리고 점점 걸음을 빨리해 뛰듯이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그 순간.
“꺅!”
누군가 태영의 가방을 확 잡아당겼다.
태영이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인상이 험악한 남학생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 모태영 맞지? 나 몰라? 우리 같은 중학교 나왔는데. 세원중.”
학교 이름을 듣는 순간 태영의 표정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