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 정도면 완벽이 아니라 갓벽이지!”
생애 첫 데이트 준비를 마친 태영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빨간색 머리띠, 분홍색 미니 원피스, 노란색 양말. 완벽하게 투머치한 패션. 하지만 괜찮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랬다.
태영은 거울 속 제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무려 두 시간 동안 공들여 한 화장이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웃음이 절로 뿜어져 나왔다.
“최니! 나 어때?”
태영은 뒤로 휙 돌았다. 그러곤 제 방 침대에 누워 과자를 먹고 있는 찐친 최해니를 향해 물었다.
“이러고 나가면 유일반이 못 알아보려나? 나 너무 딴사람 같지?”
“!”
친구의 화장한 모습을 오늘 처음 본 해니는 먹던 과자를 떨어뜨릴 정도로 놀라워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나 어떠냐니까.”
“어떠냐고? 너 진짜 양심도 없다. 뭘 물어. 완전 대박이지.”
“그치? 나 앞으로 맨날 화장하고 다닐까 봐. 소질 있는 듯.”
“응. 그래. 대신 내 원피스 도로 내놔.”
해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분홍색 원피스를 가리켰다. 그러자 태영이 곧장 양팔로 제 몸을 감싸 안으며 원피스를 사수했다.
“갑자기 줬다 뺏는 게 어딨어?”
“뺏기기 싫음 당장 화장부터 지워. 완전 대박이야. 대박 별로라고.”
“뭐?”
“너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원피스 빼놓고 다 구리거든?”
특히 저 진한 볼 터치는 아주 술주정뱅이가 따로 없었다. 대체 철 지난 숙취 메이크업을 왜 이제야 따라 하는 건지, 해니는 태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다 내 친구 모쏠 탈출 1일 만에 다시 솔로 지옥에 갇히는 거 아니야?
친구가 심히 걱정된 해니는 태영을 향해 충고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화장 지우고 와. 내가 봤을 때 넌, 화장 진할수록 얼굴이 죽는 타입이야. 그니까 오늘 데이트는 쌩얼로 가자.”
“쌩얼? 싫어! 난 이게 맘에 든다고.”
“모탱, 이 언니 말 들어라. 나 이래 봬도 뷰티 너튜버다?”
“구독자 천 명도 안 되면서.”
“너튜브 계정도 없는 사람은 일단 닥치시고요. 세수하고 와. 셋 준다. 하나, 둘, 둘 반…….”
“아니, 왜…….”
도대체 어디가 이상하다는 건지, 태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쾅!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태영과 네 살 터울 오빠 모태혁이었다.
“쉣! 이게 방이야 쓰레기장이야?”
널브러진 옷과 온갖 잡동사니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방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태혁이 혀를 내찼다. 그러다 뒤늦게 태영의 몰골을 확인하곤 박장대소했다.
“푸하하하. 여긴 겁나 웃긴 대형 쓰레기가 있네?”
“쓰, 쓰레기? 그만 웃고 닥치시지?”
태영은 이를 악물고 태혁을 째려봤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건수를 잡고 조용히 넘어갈 태혁이 아니었다. 이건 최소 1년짜리 놀림거리였다.
“씨스터, 내가 지금 안 웃게 생겼니? 아니, 우리 친구분은 뭐 하셨을까? 애 얼굴이 이 지경이 됐는데?”
“저도 말렸거든요?”
해니가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오빠가 좀 더 말려 봐요. 별로라는데 꿈쩍도 안 한다니까요. 저 똥고집.”
“그래? 꿈쩍도 안 해? 왜? 헐! 모탱 너 설마…….”
태혁은 뒤늦게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손뼉을 쳤다.
“나 알 것 같아. 모탱이 왜 지 얼굴에 낙서를 해 댔는지.”
낙서라는 말에 기막혀하는 태영과 달리 해니는 잔뜩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태혁의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장하다 내 동생. 넌 역시 난놈이야.”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태영이 태혁을 째려봤다. 그러자 태혁이 바닥에서 주운 하얀색 스카프를 들이밀었다.
“이것도 해. 그래야 더 못생겨 보이지. 아니다. 지금도 좀 완벽하긴 해. 완벽하게 못생겼어.”
“죽을래?”
“칭찬이야. 넌 못생겨야 돼. 왜? 그래야 커플 컨셉과 딱이니까. ‘명원고 존못 여고생과 전교 1등 존잘 남신’ 너튜버 쑤쑤 님도 그걸 바라고 너희 커플 섭외한 거잖아.”
“…….”
태영은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오빠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니까.
그렇다. 오늘은 전교 1등 유일반과 내가 사귄 지 1일째 되는 날. 그리고 유일반과 첫 데이트 겸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너튜버 쑤쑤 님과의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사실 전자와 후자 중 후자 쪽이 태영에겐 좀 더 중요했다. 그 이유는 바로 쑤쑤 님이 촬영에 응하는 조건으로 SNS 주소를 노출시켜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태영에겐 지금 높은 팔로워 수가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 이유는…….
“모탱, 너 근데 진짜 그 존잘이랑 사귀는 거 맞냐?”
태영의 상념을 깨운 건 태혁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그 남자애 무슨 세계로봇대회 우승도 하고, 집안도 빵빵한 데다, 얼굴도 장난 아니게 잘생겼다며. 쑤쑤가 보고 한눈에 뻑갔다더만. 그렇게 잘난 애가 왜 모탱이랑 사귈까?”
옆에서 알짱거리며 계속 시비를 거는 태혁을 태영은 그냥 투명 인간 취급 하기로 했다. 그러곤 들려도 못 들은 척하며 옷에 어울리는 가방을 고르기 바빴다.
“어쭈?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더 수상한데? 너 설마 팔로워 늘리려고 뻥카치는 건 아니겠지?”
“오빠, 아니에요. 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거 맞아요. 오늘부터 1일.”
해니가 대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태혁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동생 얼굴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너 인마, 너튜브 출연하는 거 잘 생각해라. 팔로워 수 늘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백퍼 악플 달린다고. 걘 존잘이고 넌 존못이니까.”
더 이상 못 참겠다. 태영은 가방 든 손에 힘을 세게 쥐었다. 그를 본 태혁은 순간 움찔하며 슬그머니 뒷걸음을 쳤다.
“인마, 노, 농담이야. 오빠가 동생 걱정도 못 하냐? 떽, 당장 그 손에 힘 빼지 못할까.”
태혁은 알고 있었다. 저 가방에 맞으면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제 동생이 이래 봬도 중학교 시절 이름 꽤 날리던 운동선수였기 때문이다.
“아, 알았어. 나갈게. 간다고!”
태혁이 잽싸게 나가자마자 태영은 겨우 화를 삼켰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해니는 순간 쫄아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곤 어떻게 하면 이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할까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모탱! 오늘 쑤쑤 님이랑 만나서 인터뷰하고 바로 촬영하는 거야?”
“아니. 오늘은 인터뷰만.”
“근데 진짜 대박이다. 어떻게 너한테 딱 이런 기회가 오냐?”
“그치? 완전 꿈만 같아.”
역시 태영은 단순했다. 촬영할 생각에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금세 행복한 표정으로 변해 배시시 웃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니의 말대로 대박을 넘어 이건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까.
사실 일주일 전만 해도 태영은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그냥 사귀는 건 어때?’
‘좋아.’
그냥 슥 던져 본 고백을 유일반이 덥석 물어 버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고.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근데 유일반은 왜 너랑 사귄다고 한 걸까?”
해니가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물었다. 덩달아 태영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하지만 곰곰 뭔가를 생각하던 태영의 표정이 별안간 발그레해졌다.
“그거야 당연히…… 날 좋아하니까!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태영은 확신했다. 분명 유일반도 날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런 게 아니면 대뜸 사귀자는 내 고백에 단번에 알았다고 하지도 않았을 거고, 사귀자마자 너튜브에 같이 출연해 줄 수 있냐는 부탁도 흔쾌히 받아 주지 않았을 테니까.
이 모든 게 유일반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태영의 가슴이 콩닥콩닥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1분 1초라도 빨리 유일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그 애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앗!”
태영은 뒤늦게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곤 허둥지둥 핸드폰과 가방을 챙겨 들었다.
“어떡해, 늦었다! 최니, 나 먼저 갈 테니까 여기 정리 좀 해 줘.”
폭탄 맞은 방을 해니에게 맡기고 태영은 냅다 달려 집을 벗어났다.
인생 첫 연애. 첫 데이트. 그게 바로 오늘이다.
약속 장소는 길 건너 공원 분수대 앞.
분수대에 먼저 도착한 태영은 설레는 마음으로 유일반을 기다렸다.
하지만 10분, 30분, 한 시간, 두 시간…… 한참이 지나도록 유일반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학교 근처 담벼락 밑을 서성이던 태영은 정문 쪽을 쳐다봤다.
지각을 면하기 위한 학생들이 우르르 정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쾅, 소리와 함께 결국 교문은 닫혔고, 학생 부장 선생이 지각한 학생들을 교문 앞에 세우고 벌점을 매기고 있었다.
하지만 태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정문 멀찍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1교시 시작종이 울렸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유일반이 아직 등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영은 끝까지 유일반을 기다렸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사실 어젠 너무 화가 나서 오늘 만나기만 하면 아주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학교에 왔다. 그런데 천하의 유일반이 평생 안 하던 지각까지 하는 걸 보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고, 아예 담벼락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태영은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
그토록 기다리던 유일반이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영은 달려가서 녀석의 앞을 막아섰다.
“유일반! 너 내가 어제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너 원래 이렇게 약속 안 지키는 애였어? 내가 사람 잘못 본 거야? 왜 대답이 없어?”
“…….”
태영은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녀석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너…….”
태영이 말끝을 흐렸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단 저 눈빛. 세상 스윗하던 유일반의 눈빛이 아니었다. 냉랭해도 너무 냉랭했다.
게다가 항상 단정하게 이마를 덮는 헤어스타일도 변해 있었다. 앞머리 반이 까져 있었다. 덕분에 드러난 이마 때문에 잘생긴 이목구비가 더욱 도드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장. 오늘 뭔가 불량해 보인다 싶더니 저거였다. 단추!
항상 교복 단추를 위까지 꽉꽉 잠근 것과 달리 오늘은 단추 두 개를 풀어 헤쳤네? 와우, 치명적이야. 섹시하고 잘생기고 난리도 아니구만.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암튼 얘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분위기가 왜 이렇게 다르지?
태영은 걱정되는 마음에 조금 수그러든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니가 무슨 상관인데? 비켜.”
차갑다 못해 살벌함이 느껴지는 말투. 하지만 거기에 굴할 태영이 아니었다.
“못 비켜! 어제 니 멋대로 약속 깬 이유, 난 들어야겠어.”
“그니까 니가 뭔데? 내 여친이라도 되냐? 그런 거 아니면 꺼져.”
“못 꺼져! 왜? 난 니 여친이니까.”
태영은 당당했다. 비록 오늘이 2일째긴 하지만 여친은 맞으니까. 도리어 당황한 건 녀석인 것 같았다.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하. 여자 친구? 니가? 어째서?”
“너 기억 안 나? 우리 어제 사귀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어제가 1일. 오늘은 2일…….”
“기억 안 나.”
“그게 무슨 소리야? 너처럼 똑똑한 애가 어제 일이 왜 기억이 안 나? 농담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지나친 건 너지. 어제 왜 안 나왔냐고 물었지? 사고가 있었어. 난 그 사고로 머리를 다쳤고, 기억을 잃었어.”
“어제 본 드라마 얘기야?”
“내 얘기야.”
“뭐라? 뭐…… 어?”
태영은 어버버거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진 넌 내 여친도 아니고, 우리가 2일도 아닌 거야. 그래, 보류.”
“뭐래.”
“보류라고. 내가 기억 되찾으면 그때 다시 사귀어 줄게. 됐지? 그니까 비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쩐지 쉽다 했다. 그 대단한 유일반이 너무 쉽게 나랑 사귀어 주겠다고 하더라.
잠깐, 이 녀석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이런 식으로 참신하게 나 뻥 차 버리려고 사귄다고 한 건가? 날 갖고 논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태영은 눈가에 맺히려던 물기를 박박 닦았다. 그러곤 저를 지나쳐 가는 녀석을 뒤따라가고 있었는데.
“헐!”
태영은 깜짝 놀랐다. 녀석이 교문이 꽉 닫혀 있는 것을 보곤 망설임도 없이 담벼락을 넘으려는 게 아닌가!
“자, 잠깐! 너 그런 캐릭터 아니야! 명원고 유일반이 왜 담벼락을…….”
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은 담벼락을 넘어 학교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질세라 태영도 담벼락을 넘어 녀석의 뒤를 잽싸게 쫓아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던 녀석은 본관을 비롯한 학교 건물들을 두리번거리며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더니 갑자기 뒤를 돌았다.
“야, 보류!”
“내 이름 모태영이거든?”
“너 나에 대해 얼마나 알아?”
“그 대사 집에서 연구해 온 거야? 너 방금 진짜 기억 상실증 걸린 사람 같았어.”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태영은 계속 의심의 눈초리로 녀석을 쳐다봤다.
“나 어디로 가야 되냐?”
“뭐?”
“교실 어디냐고.”
녀석의 물음에 태영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테스트를 해 보는 거다!
태영은 호기롭게 2학년이 아닌 3학년 교실이 있는 본관을 가리켰다. 그런데 당연히 어디서 날 속이려 드느냐며 뭐라고 할 줄 알았던 녀석이 성큼성큼 걸어 본관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
세상에 이거 찐이야? 유일반이 교실을 모르다니. 얘, 진짜 기억을 잃은 건가?
“말도 안 돼…….”
세상에 신이시여 이거 실홥니까? 어째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이제 겨우 모쏠 탈출 하나 싶었는데.
어떻게 사귄 지 1일 만에 남친이 날 기억 못 하는 일이 벌어집니까. 이게 말이 되냐구요.
태영은 점점 더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