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재미로 들어가 봤을 뿐이지, 더 듣고 싶은 말이 있던 건 아니니까.
나는 충격을 털어 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크루엘로의 어깨엔 아직도 떨림이 남아 있었다.
쫓겨난 게 즐거워?
“몰랐네, 결혼도 전인 어느 공작님께서 그렇게 아이에 관심이 많으실 줄은.”
“관심이야 있는데 지금은 괜찮아.”
“뭐?”
“너랑 있는 쪽이 좋아서.”
놀리려고 꺼낸 말이 영 먹히질 않는다.
나는 금세 공격을 단념했다.
“뭘 물어보려고 했던 거야?”
“나랑 살면 네가 외로워지지 않을지, 궁금해서.”
“계속 쓸쓸해하면 놔주게?”
“고양이라도 기를까?”
빈말로도 그러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
됐다.
내겐 이미, 함께하기로 한 동물이 있었다.
“저 말은 왜 믿어? 어차피 맞히는 척하는 거잖아.”
바깥에 나온 지 10년이 안 된 나라도 안다.
점쟁이에게선 성력도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치를 보며, 누구에게나 통할 법한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너무 자신감 넘치게 이야기해서 사알짝 믿을 뻔하긴 했지만.
“그건 그렇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크루엘로는, 더 이상 점쟁이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화가 잠시 멎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내 머릿속엔 거기서 파생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라…….
작위가 있는 귀족에겐 후계를 낳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원로회와의 기 싸움으로 결혼을 미뤘던 미뉴엣도 슬슬 상대를 알아보는 듯했고.
물론 크루엘로가 내게 강요할 리는 없고, 나도 그런 이유로 아이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기에,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잘 상상은 가지 않는다.
페불라께서도 사라지신 마당이니 내가 내 부모만큼 형편없이 굴지는 않겠지만.
“딸로 둘.”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 건 아니라도, 상상하는 건 제법 즐거웠다.
정말로 자매를 낳는다면, 개중 한 명쯤은 크루엘로를 닮지 않을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재 보듯 사내를 살폈다.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당연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크루엘로를 봐 온 세월이 어디 1, 2년이던가.
가면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히 그려졌다.
그의 얼굴이 중성적이지는 않았으나, 누가 보더라도 그 외관은 아름다웠다.
여자로 태어났더라고 해도 멋지게 자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 완벽한 유전자가 합쳐지면 아마도…….
한창 그런 상상을 할 때쯤, 돌연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널 닮으면 좋겠는데.”
“……너야말로 점쟁이를 해 봐, 크루엘로.”
“하하.”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알았담.
이렇게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듯이 굴 거면, 말하기 곤란한 이야기도 좀 알아주든가.
아, 아니다. 취소.
전번의 악몽을 꾸던 때, 그가 내 비밀을 알고 추궁해 왔다면 창피해서 진작 페불라의 곁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털어 버렸다.
슬슬 허기가 져, 우리는 가판의 음식들을 사 먹고 다녔다.
줄이 달린 가면이 목에 걸려 덜렁거렸고 이따금 불어닥친 바람에 한 번씩 후드가 벗겨지려 했지만, 그조차도 즐거웠다.
그러나 크루엘로는 입을 대는 시늉만 했을 뿐, 먹는 건 거의 내 몫이었다.
이해는 한다.
저택의 요리와 달리 길거리 음식들은 식감이 거칠고 자극적이었으니까.
나야 한창 미감을 넓혀 가는 중이니 뭐라도 좋았지만, ─적어도 의식주 면에서는─귀하게 자란 도련님 입맛엔 맞지 않겠지.
심지어 그는 저택에서도 입이 짧았다.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잦았고 좋아하는 음식도 없는 것 같고.
내가 화이트데저트에 머무를 때는 삼시 세끼를 함께했지만, 요즘엔 또 내키는 대로 먹고 있을 게 뻔했다.
말을 해도 해도, 듣지를 않아.
생각하니 얄밉다.
크루엘로가 샌드위치를 깨작거리다 뱉으려기에 나는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당황한 듯하면서도 남은 걸 잘 씹어서 삼켰다.
나는 경고하듯 말했다.
“잘 먹고 다녀.”
그가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리자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렸다.
크루엘로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강요한 건 한 번뿐이었다.
축제 음식이 몸에 좋을 것 같지도 않았고, 입에 맞지 않는 걸 굳이 먹일 이유는 없었으니까.다만 한 번씩 ‘더 먹을까?’ 하고 물어보듯이 쳐다보는 게 조금, 음, 귀여웠다.
다 큰 크루엘로에게 귀엽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해지면 그랬다.
계속 귀엽게 굴면 좋을 텐데.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 우리는 광장으로 향했다.
“와, 딱 3시야.”
이번에도, 가면을 쓴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그러나 저번과는 장소의 분위기가 달랐다.
전해는 좀 더 햇빛이 강렬했던 것 같은데.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니, 절반쯤 구름에 덮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금방 빗방울이 떨어진 대도 이상치 않은 색이다.
혹 날씨 때문에 일정이 취소되지는 않을까 걱정이었으나 다행히 악단은 연주를 시작했다.
안심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러면 한 곡,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장난스러운 투로 말하며 크루엘로가 손을 뻗었다.
“발이라면 수백 번을 밟아도 괜찮아요.”
“아예 발등에 올라가서 추는 건 어떨까요?”
“그럴래?”
“농담은 좀 농담으로 받아. 됐어, 춤만 어려워지지.”
남의 발등에 서서 턴을 할 정도면, 춤이 아니라 기예다.
못한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음유시인이 말장난을 끊었다.
[나는 마리오네트.]
“어라, 또 이거야?”
“첫 곡은 매번 그렇다던 걸. 나름대로는 전통이야.”
그렇게 딱 맞추고 싶으면 차라리 12시에 시작하지.
아쉬운 점을 꼽아 보며 나는 크루엘로의 손을 잡았다.
저번에 췄던 춤이기에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작년에는 내 껍데기가 시오라 보네티였지만, 내용물은 나였으니 기억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나는 마리오네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네.]
경쾌한 리듬이 울려 퍼지고,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사만 듣지 않으면 마냥 해맑은 노래 같은데 가사는 역시 음침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크루엘로, 너는 이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지?”
음유시인의 목소리와 겹쳐 부르던 크루엘로의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줄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라네.]
맞아, 이 부분.
크루엘로가 의미심장하게 내뱉은 말 때문에 확 긴장했던 것이 생생하다.
돌이켜 보면, 당시 그의 말대로였다.
크루엘로뿐 아니라 나 또한, 마리오네트였다.
바라는 것 없이 사명에 끌려다니며 살았는데, 모순적이게도 그러면서 배역을 거스를 마음이 들었다.
크루엘로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면 이 애는 어떨까.
“지금도 좋아해? 이젠 다른 처지가 됐는데.”
그에게도 이제 족쇄는 없다.
원로들은 모두 죽었고 에덴은 그 혼마저 찢겨 나갔으며 모리온이 녹아 사라진 것도 얼마 전에 함께 확인했다.
크루엘로와 같은 입장인 나로서는, 지나간 감정을 되짚는 이 노래가 여전히 별로였다.
그리고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실은, 축제에서 벌어지는 이벤트 중에 이 노래의 뒷부분이 있어.”
“응?”
“전에는 볼 마음이 안 들었지만.”
뒷부분이라면, 2절이 있다는 말인가?
[무엇도 될 수 없는 가엾은 나무토막.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는 배역 잃은 그림자.]
“보러 갈래?”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만큼은 아니지만, 가을도 해가 짧았다.
광장에서 춤을 다 추고 났을 땐 벌써 놀이 지기 시작했다.
길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크루엘로가 나를 데려간 곳은 익숙하게 생긴 박스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페불라 악신설을 연극으로 처음 목도했던 그 장소였다.
나는 정색하고 물었다.
“혹시 내가 요즘 너무 즐거워 보였어?”
마음의 평형을 맞춰 주려고 내 기분을 좀 끌어내리려는 걸까?
크루엘로는 소리 내어 웃고는 박스 앞의 팻말을 가리켰다.
그곳엔 모르모로의 희생과는 아예 딴판인 제목이 적혀 있었다.
「?시의 마리오네트」
오.
“그 인형극은 올해부터 공연될 일이 없을 거야. 레카논에서 교단을 해체하기로 했거든.”
“진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라스티로 돌아온 이후, 따로 레카논을 찾아볼 일도 없었거니와 그들의 이야기는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으니.
“그래서 마믹이 수습 신관이 된 건가.”
“반대일걸.”
“마믹이 수습 신관이 됐기 때문에 교단을 해체했다고?”
“이단을 통합하고자 했던, 신전의 목적이 통했다는 이야기지.”
레카논의 후인으로, 성녀 소리까지 듣던 마믹이 돌아섰으니 남은 교인들도 희망을 잃은 건가.
교단이 사라졌다면, 그러면 레카논도 사라졌겠네.
마음이 조금 울적했다.
고대신이 사람들에게 잊히며 사라지는 건 조금도 의외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으니까.
레카논도, 그리고 페불라도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알면서도 사소한 소식 하나하나에 마음이 휩쓸린다.
언제쯤이면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릴 수 있게 될까.
“아.”
크루엘로의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희게 질릴 만큼 힘주어 쥔 주먹을, 그가 부드럽게 펴 내고는 내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마치 이거라도 붙잡고 있으라는 듯이.
한결 능숙해진 위로에 마음의 응어리가 단번에 녹아내린다.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려던 부정적인 생각을 흩어 내고, 힘주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딱 적절한 순간에, 박스의 커튼이 열렸다.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은 단 한 개의 목각인형.
관객의 시선을 빨아들인 주인공이 곧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마리오네트.]
소리가 인형의 입에서부터 들려와서, 정말로 마리오네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마나의 흔적이 느껴지는 걸 보면, 안에다가 마도구를 넣어 놓은 건가?
돈이야 많이 들었겠지만, 볼 맛이 났다.
목각인형은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멋들어지게 춤을 추면서 가사대로 움직였다.
[유리구두를 신은 공주도 용을 무찌르는 용사도 대륙을 다 가진 황제도.
인형사의 명령대로 보는 이의 기대대로 무엇이든 된다네.]
유리구두를 신고 춤을 추던 인형은 돌연 구두를 깨뜨리더니 그 조각을 검처럼 쥐었고 용에게서 승리를 거머쥔 뒤에는 손에 든 걸 내던지고 왕관을 썼다.
공주와 용사와 황제가 다 같은 사람이었구나.
소소한 반전에 즐거워할 무렵, 종소리가 들렸다.
[뎅뎅뎅, 오늘도 종이 울려 버렸어. 12시가 되었다.]
뒤쪽의 커튼에서 사람의 손이 튀어나왔다.
손은 인형의 왕관을 가져가고 무대로 관을 밀어 넣었다.
마리오네트가 버둥거리며 저항했으나, 뚜껑이 열리고 인형은 그 안으로 쑤셔 넣어졌다.
[음음음. 어둠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네.]
인형사가 조작하고 있을 게 뻔한데도 인형이 살아 있는 것처럼 실감 났다.
노랫소리는 점점 슬퍼졌고 힘을 잃어 갔다.
[줄에 매여 춤추는 가엾고 순종적인 마리오네트.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내가 있다네.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있다네.]
쿵,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무대의 불이 꺼졌다.
이걸로 끝?
요즘은 새드엔딩이 유행인가.
눈치를 살피던 때 스으윽, 하는 소리가 주의를 끌었다.
그러더니 도로, 무대 위에 불씨가 피어났다.
조금 전에 본 빛보다 확연히 어둡고 작았으나, 무대 위의 형상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줄 알고?]
조그만 손이 낑낑거리며 관 뚜껑을 밀어 떨어뜨렸다.
쾅 소리에 놀란 것처럼 어깨를 떨며 주위를 두리번거린 인형은 조심스럽게 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어서 마리오네트는 무대에 널브러져 있는 유리 구두의 잔해물을 손에 쥐었다.
그 날카로운 조각으로 사지에 매달린 줄을 하나하나 공들여 잘라 냈다.
마침내 제 몸에 달린 줄을 모두 끊어 낸 주인공은 무대의 한가운데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며 다시 한번 노래를 불렀다.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있다네.]
마침내 공연이 끝난 순간, 마리오네트는 관객을 향해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껑충 뛰어올랐다.
관중들 틈바구니에 몸을 숨기고 인형이 어딘가로 달려 나간다.
무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