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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59화 (159/162)
  • 159화

    걷다 보니 어느새 난 보네티 백작저를 나와 있었고 눈앞에는 크고 새까만 마차가 보였다.

    그 앞에서 아름다운 장신의 사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크루엘로는 웃었다.

    그는 자리에 멈춰 선 내게 다가와 익숙하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왜 또 비구름이야.”

    “내가?”

    “거울 보여 줄까.”

    크루엘로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허공에 깨끗한 얼음이 얼었다.

    그 표면에 내가 비추어지기 전에 나는 주먹을 쥐고 깡, 얼음을 깨뜨렸다.

    그러고는 마차로 쏙 들어가 버리자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사내는 곧바로 나를 따라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마차가 출발했다.

    “또 네 신을 생각하고 있었어?”

    “신의 장례식이니 인간보다는 오래 추모해야지.”

    “계속 존재하길 바랐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어차피 당신께서도 사라지길 바라셨으니까.”

    차라리 잊힌 신의 격이 추락해 인간이 되는 거라면 좋았을 텐데.

    내 몇 없는 인간관계에서 큼직한 한 덩어리가 도려진 것 같아서 허전했다.

    습관처럼 양팔을 벌리자 크루엘로가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잠시 온기에 갇혀 슬픔이 가시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밀어냈다.

    내가 울었는지 확인하듯, 그의 시선이 빠르게 내 눈가를 훑고 지나갔다.

    이제 안 운다니까.

    분위기를 바꿀 겸 나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경쾌한 톤으로 말했다.

    “참. 너 이제 나 못 가둘 거야, 크루엘로.”

    “그것참 유감이네.”

    크루엘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봐, 이거.

    감금에 진심인 건 가보트뿐이라니까?

    한때 크루엘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나 거기에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일이 정리되고 한 달이 지난 후 내게 고해성사를 하길, 크루엘로의 몸에 모리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페불라의 성물이 크루엘로에게서 그 흔적을 지워 주었다고.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심장이 철렁했으나 동시에 퍼즐 조각이 맞추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기의 크루엘로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유독 예민하게 군 게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가보트는 그 말을 듣고도 크루엘로가 모리온에게 죄를 다 뒤집어씌운 거라고 믿지 않았지만, 원래 그 애는 의심이 많다.

    “왜 못 가두는지는 안 물어봐?”

    “글쎄. 그러고 보니 보네티의 정령 소환실이 터졌다고 하던데 다친 곳은 없어?”

    “또 저택에 감시 붙였어? 어째 갈수록 너구리 같아져.”

    “보호라고 해 줘, 라스티.”

    허.

    또 이런 걸 보면, 가보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닌데.

    내 생각이 표정으로 티가 났는지 크루엘로는 또 불쌍한 척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네가 도망갈까 봐 무서워 그러니까 조금만 이해해 줄래.”

    “결혼 날짜까지 잡혔는데 어디로 도망쳐?”

    “매리지블루라고 지금이 한창 철이라던데.”

    “안 도망가. 네 입에서 이혼 소리만 나오면 화이트데저트를 날로 먹을 수 있는데 내가 어딜 가?”

    “……내가 이번에도 그런 계약서를 썼던가?”

    “왜. 일이 마무리되니까 가문을 통째로 건네주긴 아까워졌어, 로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놀리듯 말하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도 잠시, 눈꼬리를 접고 해사하게 웃었다.

    “결혼 계약서를 한 장 더 쓰지 않을래, 라스티?”

    “뭐?”

    “앞으로 평생 이혼 소리를 입에 담지 않으면, 화이트데저트를 통째로 넘겨줄게.”

    “계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데?”

    “법은 무서운 거야, 라스티.”

    퍽이나.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계약서에 왜 그런 조항을 넣었던 거야?”

    “나도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비가를 되살릴 생각이었거든.”

    “……되살아난 비가랑 결혼하려고? 내가 결혼해 줄 거란 보장은 어디 있었는데.”

    “음.”

    크루엘로는 말을 늘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 뒤로 가보트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네 그 잘나신 약혼자 말이야. 널 가두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되살아난 비가의 의사 같은 건 상관없었다는 뜻으로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너 설마 감금─.”

    “하하.”

    “웃지 마. 안 웃겨.”

    “곧 도착이네. 마차는 근처에 대려고. 마차에 화이트데저트의 문양이 선명히 찍혀 있는데 굳이 눈, 귀를 붙여 놓을 필요는 없잖아.”

    “법은 무서운 거야, 크루엘로.”

    “로브는 미리 준비해 뒀는데 어때?”

    티 나게 말을 돌리며 크루엘로가 로브와 가면을 꺼내 들었다.

    로브야 디자인이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함께 나온 가면이 멋있었다.

    생김새가 몹시 화려하고 반짝거리는데도 촌스럽지 않았다.

    딱 축제에 어울리는 물건이라, 나는 고민하다가 이쯤에서 합의하기로 했다.

    “이번만 넘어가 주는 거야.”

    “반성할게.”

    마침 마차가 멈추었다.

    ***

    나무의 색이 불그스름하게 물들 때부터, 수많은 제국민들은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수확제의 날이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날씨가 참 좋았다.

    새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햇볕은 딱 기분이 좋을 정도로만 따뜻했다.

    와글와글 몰려든 인파를 보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저번에 참가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또 오게 됐구나.

    그건 그런데.

    “사자와 가젤이 많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가면을 쓴 페어 중 30~40%가 익숙한 조합이었다.

    분명히 저번에 왔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 소문이 났다고 하더라.”

    “너, 악명 높은 거 아니었어? 심지어 시오라는 죽었다고 사망 신고까지 했잖아.”

    “그래서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던데.”

    크루엘로는 작금의 유행이 퍽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미치광이 공작이 연인을 너무 사랑해서 죽였다나 어쨌다나.”

    “……나랑 약혼한 건?”

    “라스티한테 죽은 시오라 보네티의 유령이 씌었다던 걸.”

    그 말에 나는 흠칫했다.

    라스티한테 시오라가 씐 게 아니라 그 반대였으나, 얼추 비슷한 수준으로 맞힌 게 놀라웠다.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재밌지?”

    “재밌다.”

    우리는 본격적인 축제 구경에 나섰다.

    겨우 1년 만에 돌아온 축제였기에, 구성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저번에도 수확제를 100% 즐겼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가판을 조금 구경하던 중에, 나는 전에 해 보지 못한 재밌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짙은 보라색의 천막 앞에 작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어느 점술 선생의 예언」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점쟁이가 우리를 맞았다.

    특이하게도 중년의 여자가 새하얀 수염을 붙이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가짜란 티가 확 나는 장식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싶으면 베일을 쓰지, 너무 성의가 없다.

    천막과 같은 색의 테이블 위에는 어린아이의 머리통만 한 구슬이 올라가 있었다.

    얼핏 봤을 때는 통신구처럼 생겼으나 그런 류의 아티팩트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에 별이 든 것처럼 반짝거리는 것이 예쁘긴 했다.

    무어라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떼었다.

    “인당 1실버.”

    앗, 실버로 바꿔 오는 걸 잊었다.

    하지만 괜찮다.

    말없이 크루엘로를 바라보면 짜잔!

    그가 준비해 온 동전 두 개를 상대에게 건네줄 테니까.

    돈을 챙기는 점쟁이의 손이 몹시 재빨랐다.

    우리가 맞은편에 앉자마자 그녀가 곧장 내뱉었다.

    “남자가 바람둥이야.”

    푸흡!

    웃음이 터질 뻔해서,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웃지 마, 이것아! 농담 아니야! 여자가 하나도 둘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있다고, 넷!”

    “그중에 저도 있나요?”

    “뭐여, 안 놀라네. 알고 있었어?”

    점쟁이는 김이 샌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그야 알고 있었지.

    엄밀히 말하면 열하나다.

    개중 내가 들어갔던 몸만 따지면 넷이 맞긴 했지만, 설마 그런 걸 알고 말했을 리는 없으니까.

    “너도 있긴 해. 제일 끄트머리에 붙은 걸 보니까, 뭐 임자를 만난 것 같긴 한데.”

    그녀는 마땅치 않아 죽겠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바람둥이 같은 걸 주워. 하여간 요즘 그 로맨슨지 뭔지가 문제야. 어린 여자애들한테 이상한 환상이나 심어 놓고 말이야.”

    “하하.”

    “너도 딴 걸 만나진 않을 것 같아서 말리진 않겠는데 그래, 요놈이 그렇게 잘생겼냐?”

    점쟁이는 마치 가면 안쪽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크루엘로를 빤히 쳐다봤고, 그는 어깨를 떨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로 맞혔을 리는 없으니, 기분이 좋으라고 서비스 차원에서 말해 주는 듯했다.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잘생기긴 했어요. 얼굴값이라고 생각하고 데리고 살아야죠.”

    “하여간, 쯧쯔. 너, 외로움을 많이 타지? 그래서 저거 못 떨쳐 내. 저놈만큼 그걸 잘 막아 줄 놈이 없으니까.”

    “엥, 제가요?”

    “그래, 구슬에 다아 나온다.”

    구슬은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또 거기서 나온 것처럼.

    나는 웃었으나 이어진 말에는 조금 당황했다.

    “뭔, 똥강아지처럼 사람을 좋아하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네. 부모가 어지간히도 바빴나 봐?”

    어…….

    부모님이 바쁘다는 것도 사실 흔한 가정사이긴 한데.

    “씁. 그렇다기엔 부모가 방치한 느낌은 아닌데.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학구열이 과하다고 해야 할지, 관심이 많다고 해야 할지.”

    “혹시 고대 종교 믿으세요?”

    “안 믿어, 안 믿어! 여기서 포교하지 마, 안 믿어!”

    “음.”

    질색하고 손사래를 치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 한 번에 사라졌다.

    크루엘로는 이제 웃다가 죽을 사람 같았다.

    내 발언에 경계심이 치솟았는지 점쟁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몸을 한껏 뒤로 뺐다.

    페불라가 남아 있었더라도 포교할 생각 같은 건 없었지만.

    나는 뚱하니 그녀를 흘겨보았다.

    “아무튼, 둘이 잘 살긴 할 거야. 나라면 저런 바람둥이 놈은 안 만나겠지만, 넌 헤어질 생각도 없잖아.”

    “으음, 그야 뭐.”

    “더 들을 말 있어?”

    “잠, 시만요.”

    크루엘로가 뭘 더 물어보려는지, 웃음기가 짙게 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듣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딸로 둘.”

    “네?”

    “뭐야, 크루……. 그런 거 물어보려고 했어?”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결혼할 때 된 것들이 물어볼 거야 뻔하지. 들었으면 나가! 다음!”

    우리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천막에서 나왔다.

    망연해져서 나는 눈만 끔벅거렸다.

    이거 진짜야?

    돈을 내고 이런 취급을 받았다고?

    바깥은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던 건가.

    나는 다시금 선배 신도들의 거주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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