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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58화 (158/162)
  • 158화. 외전2 : 그리고 그들은

    내 신의 마지막은 마치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일어난 샹들리에 같았다.

    희망 고문이라도 하듯이 성력은 사라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그 간격은 점점 길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페불라께서 소멸하셨을 때에도 난 슬퍼하기보다는 현실을 부정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성력을 쓰지 못하게 된 지 한 달째가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페불라께서 정말로 사라지셨다는 걸.

    그리고.

    “난 쓰레기야.”

    내가 무능해졌다는 현실을.

    “쓰레기는 네 약혼자야.”

    가보트의 말은 귓속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전성기를 회고하며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신의 대리인이며 교황이며 성녀이며 성기사이며 사제이며 모든 걸 할 수 있던 화려한 나날들이여, 안녕.

    그리고 할 줄 아는 게 쥐뿔도 없는 쓰레기의 인생이여, 안녕.

    “어떻게 사람이 주문도 못 쓰고 치료도 못 하고 해독도 못 하고 하다못해 날붙이에 성력을 내두르는 것도 못 해?”

    “……여태 네 눈에는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로 보였냐?”

    “너는 공감 능력이 없어?”

    “할 줄 아는 거 많잖아. 저번에 우리 기사가 너랑 대련하고 울던데.”

    “그거야 당연한 거고!”

    마나조차 사용하지 않는 대련에서 져 버리면, 창피해서 죽어 버렸을 것이다.

    “가보트는 이해 못 해.”

    세상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으로 살다가 추락하는 기분을 어찌 안단 말인가.

    우는 시늉을 했으나 크루엘로와의 재약혼 이후 부쩍 냉정해진 내 동생은 휘말려 주지 않았다.

    “됐으니까 정령 소환이나 해 보라고.”

    가보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사실, 정령을 불러내 보라는 제의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다시 보네티가 되기 전부터 미뉴엣이 계속 권해 왔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매번 나중을 기약하며 미루어 왔었다.

    페불라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찝찝하기도 했고, 미뉴엣을 배려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보네티는 정령 가문이었고, 지금은 아니라지만 한때는 위대한 정령을 불러내는 것만으로 가주직을 차지할 수 있는 시절도 존재했다.

    그녀가 가주의 시험, 템페스타스를 거쳐 백작이 되었기에 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했다.

    내가 미뉴엣보다 대단한 정령을 불러내리란 보장이 어디 있냐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하지만 지금은…….

    “……싫어.”

    “도대체 왜 싫다는 건데? 답답해 죽겠으니까 이유를 좀 말해 봐.”

    “…….”

    “네가 정령을 불러내기라도 하면 공작이 파혼할 거라고 협박하디?”

    “크루엘로가 그렇게 너 좋은 일을 해 줄 것 같아?”

    “젠장, 일평생에 도움이 안 되는 자식.”

    가보트는 분한 목소리로 당연한 소리를 했다.

    “그래서 진짜 이유가 뭔데, 라스티.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들을 테니까 좀 말해 봐!”

    “화 안 낼 거야?”

    “안 내.”

    “제대로 공감할 자신 있어?”

    “어떻게든 해 볼게.”

    나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입술을 떼었다.

    지금 정령을 불러내고 싶지 않은 이유, 그건.

    “내가…….”

    “그래, 말해 봐.”

    “내가 볍씨를 소환하면 어떡해?”

    “뭐?”

    부드럽게 다듬어졌던 가보트의 목소리가 한순간 튀어 올랐다.

    그러나 억눌러 왔던 두려움을 막 토해 낸 나는 멈추지 않았다.

    “소환진을 쫙 깔고 멋들어지게 소환 주문도 외웠는데 기껏 나온 게 뱁새면?”

    “…….”

    “비둘기를 소환하면? 닭은? 오리는!”

    가보트가 피아니시모를 불러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심지어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흘렸더랬지.

    그 꼴이 되긴 싫다.

    차라리 소환을 못 하는 편이 낫지!

    “너, 그게 피아니시모를 옆에 두고 할 소리냐!”

    삐약, 뺙.

    다혈질의 제 주인과 달리, 뱁새는 다정하게 내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나는 계약자가 아니라서 이 새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함께 지내 온 세월이 있다 보니 눈치껏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럴 리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대충 이런 느낌이다.

    “피아니시모, 지금 쟤, 네 욕한 건데!”

    “이간질하지 마!”

    삐약!

    언제나처럼 피아니시모는 내 편을 들고 함께 소리쳐 주었다.

    억울해 죽겠다는 듯, 가보트의 얼굴이 붉어졌으나 그는 이미 제가 피아니시모의 1순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여운 가보트.

    “뱁새든 벌새든, 뭐가 됐든 간에 불러.”

    그리고 공감 능력 없는 가보트.

    “너, 그렇게 안일하게 있다가 진짜로 큰일 난다.”

    “무슨 큰일?”

    “네 그 잘나신 약혼자 말이야. 널 가두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오.

    “크루엘로가 작정하면, 무슨 새를 불러도 소용없을걸.”

    “네가 그렇게 얕보는 피아니시모만 있어도 안 들키고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뭔 소리냐.”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날 가두려 들진 않을 거야.”

    “상식적인 인간이면, 그 말이 더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어쩔 수 없다.

    상대는 다름 아닌 크루엘로였으니까.

    그가 상식적이라고 말하면, 그건 단어를 모욕하는 셈이 될 것이다.

    “너 좋다는 인간들이 다 어떻게 됐는지 알기는 해? 요즘 공작 별명이 걸어 다니는 비리 장부야.”

    “어쩐지. 요즘 귀찮은 편지가 안 오더라.”

    “그게 좋아할 일이야? 됐으니까 소환실로 가!”

    목청껏 소리치는 것만으로 나를 설득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가보트가 애써 성질을 죽였다.

    그는 시원하게 찻물을 들이켜고는 애써 달콤한 목소리를 내어놓았다.

    “네가 정말 네 기준에 안 맞는 정령을 불러내면 계약 안 해 버리면 그만이잖아.”

    “……보는 눈이 있는데?”

    “모르는 척해 줄게, 내가 그런 걸 약점 잡을 사람으로 보여?”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 오늘쯤 계약을 시도하려 했다는 건, 가보트의 성취감을 위해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는 오래간만에 보네티의 정령 소환실에 들어왔다.

    이번이 두 번째던가, 언제 와도 참 채광이 좋다.

    정령을 불러내는 장소라 그런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기에 소환실의 모습은 기억 속 그대로였으나 단 한 가지의 차이점이 있었다.

    “가보트, 진짜 작정했구나.”

    이미 정령 소환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내가 저번에 보완해 준 부분을 그대로 재현해서.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 둔 게 크루엘로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웃기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는 가보트가 내어주는 단검을 거절하고 징죄의 검─페불라의 성물. 크루엘로가 이름을 가르쳐 줬다─을 들어 올렸다.

    페불라의 유산이라고 생각해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사특한 욕심이 섞였다.

    보네티의 선조도 페불라의 신도였다고 하니 음.

    돌아가신 페불라께서도 분명 지옥에서 나를 지켜보며, 한 점의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하실 거다.

    믿습니다, 페불라시여.

    징죄의 검으로 손끝을 살짝 베어 내자 핏방울이 진에 섞여 들었다.

    나는 소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세상을 이루는 지고한 자연께 청하나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진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혹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가보트의 뒷목을 후려쳐 기절시키고 아무 일도 없던 척하려고 했는데, 그의 목덜미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점점 자신감을 얻고 목청을 돋우었다.

    진은 이렇게까지 기세가 올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요란해졌다.

    “너, 뭘 부르는─.”

    경악한 가보트가 무어라 말하려던 때, 폭발적으로 바람이 솟구쳤다.

    ***

    정령 소환실은 가을맞이 새 단장을 하게 되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사방의 벽면이 터져서 공사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지출이다.

    보네티에서 라스티라는 거인을 품기 위해서 이쯤은 감당해야 할 테니까.

    나란 사람은 정말!

    집사장을 불러 사고를 보고하고 우리는 소환실을 나왔다.

    그러는 우리의 기세는, 소환실로 향할 때와는 반대가 되었다.

    나는 어깨를 활짝 편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 만물이 다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 이게 사는 거지!

    “난 쓰레기가 아니었던 거야.”

    “시끄러워, 조용히 해.”

    가보트가 우중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령을 부르자고 꼬드긴 건 그 자신이면서 누구보다 패배감에 절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게 안돼 보였는지, 이번에는 피아니시모가 그를 위로해 줬다.

    뺙뺙.

    뱁새를 대신해서 내가 해석해 줬다.

    “라스티가 워낙 특별한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거야. 평범한 가보트가 이해해, 라고 말한 것 같은데.”

    “……창작하지 마.”

    아무튼 볍씨의 저 따뜻한 마음가짐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뱁새의 조생 만족도가 주변에서 제일 높은 건 아마 저 성품 때문일 거야.

    한창 침울해하던 새 주인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너, 네 정령 정말 비밀로 할 거야?”

    그건 소환실을 나올 때 합의한 이야기였다.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걸 불러냈다 보니 아무래도 페불라께서 소멸하시기 전에 했던 고민이 다시 떠올랐으니까.

    “미뉴엣이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는 그래야 잡음이 안 생길걸.”

    “걔가 그걸 원하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뭐.”

    언제나처럼 갑작스럽게 미뉴엣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기척을 느끼고 있던 터라 나는 놀라지 않았고, 가보트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았다.

    심약하기는.

    “소환실이 터졌다고 들었는데 네 짓이지, 라스티?”

    “헤헤.”

    “기분 좋아 보이네. 뭘 불러낸 거야?”

    “아니, 음, 진이 터졌잖아? 소환은 실패했어.”

    “믿지도 않을 거짓말은 말고.”

    “……나중에 보여 줄게. 은밀한 데서 너한테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자 미뉴엣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열등감을 느끼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얼마든 자랑할 수 있었다.

    미뉴엣은 손을 뻗어 바람에 흩어진 내 머리를 하나하나 정리해 주었다.

    “밖에서 공작전하께서 기다리셔.”

    “벌써 왔냐? 징하다, 진짜.”

    “입조심, 바티.”

    “……알았다고.”

    바지를 탈탈 털고 일어난 가보트는 구시렁거리면서 미뉴엣을 흘겨보았다.

    미뉴엣이 제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배신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실상 그녀의 태도가 달라진 지는 제법 되었다.

    크루엘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부터였던가.

    어쩔 수 없는 일에 골머리를 썩이기 싫었는지, 미뉴엣은 더 이상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와 다시 약혼했을 때조차도.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뭐, 그래 봐야 내 걱정을 해 주고 있겠지.

    나는 미뉴엣을 믿는다.

    “알았어, 지금 갈게.”

    옷을 갈아입을까 고민하다가 나는 대충 옷매무시만 가다듬었다.

    어차피 위에 로브를 걸칠 테니 구김쯤이야 상관없겠지.

    돌아서는데 가보트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불렀다.

    “12시 전에 들어와.”

    “가보트, 나 네 딸이나 동생이 아니고 누나야.”

    “어, 누나. 12시 전에 들어와.”

    “…….”

    도대체 내 어디가 그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켰는지.

    솔직히 겉으로 봐서도 능력을 봐서도 더 연약한 쪽은 가보트였는데 말이야.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함부로 건물 부수지 말고 사람 때리지 마라.”

    아니면 그냥 말썽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건가.

    어쨌거나 그게 나쁘지는 않아서 나는 씨익 웃었다.

    그러자마자 불길하게 웃지 말라고, 한 소리를 들었지만.

    가보트 바보.

    나는 내면에 집중하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현실도 꿈도 아닌 기묘한 차원에서 다른 존재와 내 감각이 연결된 것이 느껴졌다.

    신을 섬기는 것과도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결국, 불러내긴 했구나.”

    시오라 보네티로 지낼 적, 불러내려다 포기했던 그 정령이었다.

    나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내 새는 소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잽싸게 튀어나왔다.

    그만큼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니면 외로웠던 건지.

    “어떻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나 봐.”

    새삼스럽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아도 어떻게든 삶은 흘러간다.

    신을 잃은 내게 다른 존재가 나타난 것처럼.

    줄리안의 면회를 다녀온 데이디어가 혼란에 빠진 것처럼.

    마믹이 명예 성녀직을 내려놓고 수습 신관이 된 것처럼.

    한때는, 그 모든 게 운명이라고 믿은 적도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안다.

    정해진 운명 같은 건 별이 질 때 함께 저물어 버렸다는 걸.

    “라스티.”

    문득 불린 이름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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