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57화 (157/162)
  • 157화. 외전1 : 초고draft

    곳곳에서 재의 냄새가 난다.

    온통 검게 물든 폐허에서 사내는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불태워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르다는 게 신기했다.

    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은 몇 남지 않았겠지만.

    크루엘로는 벽면이 통째로 뚫린 폐건물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적인 건물은 아니었다.

    이곳은 검은 뱀 교단 중에서도 소수만 출입을 허가받은 특별한 기도실이었으니까.

    그 신성한 공간이 이 꼴이 될 줄은 그들조차 몰랐겠지.

    뒤쪽에서는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여성체 석상과 제단의 앞에, 한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바짝 야위고 안색이 창백한 여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움직이기만 했다.

    언제 죽더라도 이상치 않을 만큼 생기가 옅다.

    그럼에도 사내가 관심을 두는 건, 그녀가 쓰고 있는 책뿐이었다.

    “얼마나 남았지?”

    “거, 거의 다 썼습니다. 조금 남았어요.”

    “오늘 중 마무리할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멀리서도 눈에 보일 만큼 어깨를 떤 여자는 눈을 질끈 감고 애원했다.

    “정말이에요. 조, 금만 시간을 주시면 진짜로…….”

    크루엘로가 물끄러미 여자를 보았다.

    스산한 시선에 주변의 온도가 몇 도씩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짧은 정적 끝에 나온 답은, 예상외로 시원스러웠다.

    “그래.”

    어차피 시간은 썩어 넘치도록 많았으니까.

    크루엘로는 벽에 기대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여자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어깨너머로 글을 배운 탓에, 수려하지 못하고 독특한 필체가 종이를 수놓는다.

    그는 눈을 감고, 여자, 마믹이 책을 다 써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젊은 화이트데저트 공작은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드높은 신분과 완벽한 혈통, 역사서에 기록될 만한 마법적인 재능과 믿기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외모.

    심지어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벌이는 난폭한 행동마저 동경하는 이가 많았다.

    실상, 그가 공들여 만들어진 마리오네트에 불과하다는 건 모르는 채로.

    크루엘로는 모리온을 담기 위한 껍데기였다.

    힘에 적합한 기질을 만들기 위해서 그의 인생은 탄생부터 설계되었고,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불행으로 인해 마음은 피어날 새도 없이 죽어 버렸다.

    마침내 성인이 되고 대원로의 인도를 받아 모리온에 다다랐을 때, 그의 자아는 없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모리온을 담기 위해 태어난 그는 그야말로 그릇으로서 행동했다.

    모리온의 뜻을 따라, 혹은 그 안에 담긴 사명대로 움직였다.

    전쟁은 금세 전 대륙을 뒤덮었다.

    전란의 초기, 교황과 대신관들을 먼저 제거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대륙의 나라들은 신전의 눈치를 보며 평화를 유지했으나, 그러면서도 왕좌 위의 존재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을 억제하던 신의 사자가 사라진 순간, 그들은 힘겹게 지켜 온 평온을 스스로 내던졌다.

    세상은 잿더미가 되었다.

    일을 벌인 크루엘로 자신도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쉬웠다.

    과장하자면 마치 이 세계가 스스로 부서질 준비를 해 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모순적인 말이었으나, 그러며 크루엘로는 신의 존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수많은 인간이 믿었던, 믿음에 보답해 성력과 기적을 베푸는 선하고 위대한 존재.

    그 절대적인 이는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에 처했음에도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

    신이란 건 뭐였을까.

    실재하기는 했던 걸까.

    정말로 전지전능하다면 어째서 이 일을 막아 내지 못한 걸까.

    그가 의문을 느끼던 때, 에덴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덴 화이트데저트의 몸은 진작 수명이 다해 죽었기에 이후 그가 삼킨 미뉴엣 보네티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야겠다.

    그는 도구나 다름없는 크루엘로에게 서슴없이 제 계획을 늘어놓았는데 그 모습이 제 성취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크루엘로는 에덴을 해치고 있었다.

    어쩌면, 그조차 에덴의 뜻대로 행동한 건지도 모르겠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에덴은 웃었다.

    가여운 크루엘로.

    “조금만 기다려, 곧 너를 삶에서 해방해 줄 테니까.”

    그렇게 에덴은, 다음 육신으로 넘어갔다.

    크루엘로는 그가 남기고 간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페불라.

    에덴이 부흥시키고자 하는 그 고대 신에 대하여.

    신에게 두었던 관심이 페불라에게로 이어졌다.

    크루엘로는 운명과 이야기의 신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자료는 거의 말소되었으나 에덴이 머물렀던 곳에는 제법 많은 양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가 남긴 말과 그 기록들을 읽으며, 크루엘로는 다시 의문을 느꼈다.

    에덴의 신이 운명이라면, 그러면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 또한 정해진 대로 흘러왔을 뿐일까.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는, 심지어는 에덴의 신앙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

    크루엘로는 페불라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신이 신으로 존재하는 한, 직접 말을 섞을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크루엘로는, 마믹을 찾아갔다.

    어느 날 레카논의 성물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여자.

    그러나 그 성물은 레카논이 아닌 페불라의 교인에게 넘겨진 것이었다.

    에덴은 일찌감치 마믹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 기록 덕분에 크루엘로도 마땅한 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살려 달라고 벌벌 떠는 여자에게 그는 툭, 하고 만년필을 내던졌다.

    “살고 싶다면, 신에게 애원해 봐.”

    그건 마냥 꼭두각시로 살아온 사내가 처음으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 순간이었다.

    크루엘로가 가장 잘 아는 건 당연하게도 그 자신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남의 뜻대로 살아왔다고 할지언정 세계를 짓밟은 악당을 가엾이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뉴엣 보네티가 〈운명〉의 화자로 선택된 건 단순히 그 때문이었다.

    마침표를 찍은 마믹이 고개를 들었다.

    “다, 썼어요.”

    크루엘로는 눈을 뜨고, 그녀에게서 책을 건네받았다.

    가볍게 훑어봤으나 빠진 내용은 없는 듯했다.

    하기야 상대에게 그럴 배짱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는 가 보라는 뜻으로, 허물어진 벽면 쪽을 턱짓했다.

    불안해하던 마믹은, 크루엘로가 생각을 바꾸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어 내기 직전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되나요?”

    “뭘.”

    “왜 이런 걸 쓰게 하신 거예요?”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도 그런 게 궁금할까.

    그 얄팍한 용기가 경이로웠기에, 크루엘로는 마믹의 질문을 천천히 곱씹었다.

    실상 고민할 필요는 없는 문제였다.

    그건 내내 그가 하고 있던 생각이기에.

    “이미 잊힌 지 수백 년이 된 신이잖아요. 사라진 신에게 제물을 바치더라도─.”

    “정말로 길이 이것뿐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네?”

    “이 모든 게 정해져 있었을까. 인간의 운명도 내 삶도, 페불라가 바라고 기획한 걸까.”

    그토록 강대한 힘을 지녔다면 구태여 이런 과정을 거쳐 올 필요가 있었는지.

    그건 정말로 악마가 아닌, 신의 이름이 맞는지.

    이해하지 못할 말에 마믹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게 제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련을 버리고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하나 이런 세상에서 마믹이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란 건 크루엘로도, 그리고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크루엘로는 곧 관심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제단에 〈운명〉이 올라간다.

    본디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선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경건한 신관과 예법, 기도, 마음가짐 같은 것들.

    그러나 그런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고, 또 설령 예법을 칼같이 지켰더라도 저 같은 이가 바치는 제물이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크루엘로는 덩그러니 책을 올려 둔 제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긴 시간을 기다렸다.

    제단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받아 주지도 않는구나.”

    그게 아니라면, 페불라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허상이든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몸을 돌리려던 순간, 천둥이 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다시 크루엘로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제단에 올려진 〈운명〉은 사라지고 없었다.

    페불라가 제물을 받았다.

    크루엘로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발을 디딘 세계 전체에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았다.

    책의 낱장이 이전으로 돌아가는 듯한, 시곗바늘이 역행하는 듯한.

    아니, 그보다는 그가 살아온 인생 전체가 새하얀 물감에 뒤덮이는 듯한 기분.

    사내의 몸을 점령한 모리온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힘을 쓰면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페불라가 뭘 계획하고 꾸며 내더라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그럼에도 크루엘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 순간 에덴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했고, 다음에 벌어질 일이 무얼까 궁금해했으며 마침내 제가 존재했던 시간이 모두 지워진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그래, 그 마지막 순간에는 분명히 미소 지었다.

    원하는 대답을 얻었기에,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