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56화 (156/162)
  • 156화

    “동의서? 아.”

    보네티 입적 동의서 말이지.

    워낙 경황이 없어 두고 왔나 보다.

    이젠, 슬슬 그쪽도 대답하려고 했는데.

    나는 슬쩍 크루엘로의 눈치를 살피고는 꿈질꿈질 몸을 일으켰다.

    “너, 근데 보네티를 왜 그렇게 싫어해?”

    “뭔가 오해하나 본데 라스티, 나는 그냥 관심이 없는 거야.”

    “가식적인 대답은 들었으니까, 이제 솔직하게 말하면?”

    “네 주변에 있는 사람이 다 싫어.”

    “오…….”

    “최근에 가장 싫었던 건 윌리엄 래버린스인데, 어제부로 다인 로츨리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웃으며 농담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게 그의 진심이라는 건 명백했다.

    뭐, 넘어질 뻔한 사람을 잡아 줬다고 질투를 하나 싶었지만, 이제는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아이린 호버는 그 옆에 서 있기만 했으니까.

    그게 질투라고 확신하는 것까진 아니라도, 전처럼 어깨가 당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네 인내심을 길러 주려면, 싫어하는 사람을 계속 늘려 줘야겠다.”

    “……네가 애쓰지 않아도 내 인내심은 괜찮은 수준이야.”

    “근거는?”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잖아.”

    “네 농담 재미없어.”

    “하하.”

    크루엘로는 웃음기가 남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다정해 보여서 괜히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곧, 보네티에 혼담을 넣을 거야.”

    이어 나온 말에는 당황하고 말았지만.

    나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백작이 나와 결혼하기 싫다면, 누구라도 입양해야 할걸.”

    “……나 동의서에 서명할지 말지 아직 안 정했어.”

    “난 내 얘기를 하는 거야, 라스티.”

    허.

    “안타깝게도 내 사랑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보네티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거든.”

    “너, 지금 나더러 보네티가 되라고 부추기는 거야?”

    “정확히는 거래를 하자는 거지.”

    거래라니 말 한번 무섭게 하네.

    나는 헤드에 몸을 기대며, 일단 크루엘로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어제 네가 해 준 이야기를 듣고 많이 생각해 봤어.”

    그 입에서 나올 말을 미리 짐작해 보려 했지만, 별의별 말을 다 한 탓에 불가능했다.

    “나한테는 가족도 친구도 스승도 연인도 전부 너였지만, 너한테는 다를 거라는 걸 이제야 알겠어.”

    “음.”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라스티. 여기에 너를 붙잡아 두는 게 많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행복할 테니까.

    이어진 말에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확신이 필요해. 네가 사랑하는 게 많아지더라도,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어.”

    “……프러포즈를 이상하게 해.”

    투덜거리듯 말하자, 옅은 웃음소리가 났다.

    “허락해 준다면 제대로 할게.”

    크루엘로는 나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흐트러진 부분이 신경 쓰여서 나는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딱히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도 저절로 입이 열렸다.

    “바깥에 나오면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어. 그랬는데 지금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네.”

    “그래?”

    “사실 이거 되게 신기한 일이야. 나, 성력 덕분에 기억력이 되게 좋거든. 지나가다 읽은 문구도 하나하나 다 기억난단 말이야. 그런데 다 잊어버렸어, 이상하지?”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잖아, 시간은 많으니까.”

    “……그러게. 이제 시간이 많구나.”

    늘 등 뒤에 모래시계를 달고 살아서, 아직은 여유 자체가 낯설었다.

    가만히 있으면, 또 금방이라도 다른 사람이 되어 깨어날 것 같았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선히 불어온 바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열린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맑고 푸르르다.

    근래 봤던 것 중 가장 예쁜 하늘이다.

    그럼에도 내 품에 끌어안은 색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생각해 놓고도 그게 퍽 느끼하게 느껴져서 나는 웃고 말았다.

    “조만간 영지에 내려가 봐야 하거든? 내 땅이 됐으니까 이거저거 해야 한다더라.”

    “그래.”

    “같이 갈래? 그러니까…… 결혼할 상대라면 어차피 얼굴을 비쳐야 하잖아.”

    크루엘로가 나를 끌어안은 채였기에 그가 멈칫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잠깐 동안 숨을 멈추었다가 답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뭐?”

    얼토당토않은 말에 잘못 들었나 되묻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예고도 없이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사랑해, 라스티.”

    어떻게 대답할 새도 없이 그가 내 숨을 집어삼켰다.

    낯간지러운 말 때문인지, 아니면 어제에 비할 바 없이 익숙해진 입맞춤 때문인지.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으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뒤늦게 눈을 감으면서, 나는 그 말을 되돌려 줄 날이 그렇게 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앞으로 수없이 이어질, 어느 평화로운 날 중의 하루였다.

    ***

    라스티와 생각지도 못한 밤을 보낸 새벽.

    크루엘로는 불현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치 누군가가 꿈에서 몸소 그의 의식을 끄집어낸 것처럼, 정신이 단번에 또렷해졌다.

    인위적인 각성에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사내는 라스티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침대를 빠져나왔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침실의 테이블 위였다.

    여타 사물처럼 숨을 죽이던 두 개의 성물은 갑작스럽게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겉면에 흐르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성력이다.

    그걸 확인한 크루엘로가 흘금 라스티를 살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 곤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걸 보니 확실해졌다.

    저를 깨운 건 저 물건들이었다.

    아니, 페불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

    “…….”

    크루엘로는 느릿하게 걸어 테이블 앞에 멈추었다.

    등을 켜지 않았으나 성력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사물의 형태가 분명히 드러났다.

    라스티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조사한 자료 중에는 성물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악업을 재는 천칭과 징죄의 검.

    전자는 이 생에 쌓은 업보, 카르마를 재는 물건이다.

    이야기와 운명의 신, 페불라의 교리에는 이번 생의 카르마를 토대로 다음 생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내용이 있었으니 말하자면 다음 생을 위한 지표였다.

    어차피 모든 게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면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자료를 보던 당시의 크루엘로는 그 교리를 비웃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사내는 천칭 앞에 섰다.

    성물을 다룰 수 있는 건 해당 교단의 신관뿐이니 자신은 기적을 발휘할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기묘하리만치 확신하며 성물을 들어 올렸다.

    접시엔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았으니 저울은 평형을 유지해야 했으나 천칭은 곧장 왼쪽으로 기울었다.

    ‘왼쪽의 저울은 악업, 오른쪽의 저울은 선업이라고 했던가.’

    성물은 자신을 희대의 악인이라 고발하고 있었다.

    그의 입매가 차게 비틀렸다.

    구태여 잠든 저를 깨워 천칭을 들게 한 이유가 무얼까.

    어차피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란 더러운 죄인에 불과하니, 주제를 알고 라스티에게서 떨어지라고?

    웃기지도 않았다.

    정말로 페불라가 그런 걸 바랐다면, 처음부터 라스티를 제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에게 침묵하라는 말 대신 저를 죽이라는 계시를 내렸어야 했다.

    신도 후회를 할지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크루엘로의 손에 냉기가 모여 들었다.

    라스티가 깨어 있을 때도 성물이 이따위 짓거리를 벌이면 곤란했으니, 그녀가 알기 전에 망가뜨리기 위해서.

    그 순간.

    ‘저건…….’

    불현듯, 크루엘로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천칭의 왼쪽 접시.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던 공백의 공간에, 작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눈이 붉은, 새하얀 뱀.

    악업의 접시에 매달린 미물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하필이면 흰 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근거를 댈 수 없는 직감 때문일까.

    환영 같은 형상을 보며 크루엘로는 에덴을 떠올렸다.

    성물을 파괴하기 위해 끌어 올렸던 냉기는 작은 얼음 조각으로 변했다.

    그는 천칭 대신 뱀을 향해 마법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공격은 그대로 뱀을 통과해 테이블에 틀어박혔고, 미물은 크루엘로를 비웃듯이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평범한 방식으로 없앨 수 없는 건가.’

    눈가를 찡그린 사내의 눈에 다른 성물이 들어왔다.

    징죄의 검, 그것은 페불라 교단의 성직자가 변절한 신도를 파문할 때 쓴다는 물건이었다.

    이게 통할까.

    처음엔 회의적인 생각이 일었으나 검에도 성력이 흐르는 걸 보면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크루엘로는 단검을 쥐고 뱀의 몸체에 내리꽂았다.

    콰드득.

    “윽!”

    그의 머릿속에 요란한 비명이 울린다.

    그러나 그건 뱀이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수백, 수천,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인간의 목숨이 끊어질 때 나는 단말마의 비명.

    뇌가 타오르는 듯한 두통에 크루엘로는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책의 낱장을 넘기는 듯한 소리가 고통스런 외침과 어우러져 들린다.

    그리고.

    「그날은 미뉴엣 보네티의 결혼식 날이었다.」

    크루엘로가 에덴의 앞에 무릎 꿇었을 때 들은 환청과 똑같은 소리로 책이 펼쳐진다.

    라스티가 말했던, 예언서라고 의심하던 이야기.

    그의 머릿속에 활자를 쏟아 낸 것처럼 많은 정보가 욱여져 들어왔다.

    그 끝에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말로 길이 이것뿐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이 모든 게 정해져 있었을까. 인간의 운명도 내 삶도, 페불라가 바라고 기획한 걸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건 분명히 제 목소리였다.

    그러나 크루엘로에게는 그런 말을 내뱉은 기억이 없었다.

    애당초 페불라의 존재를 알게 된 지조차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노도와도 같이 쏟아진 환청이 멎고 두통이 천천히 가라앉았으나, 크루엘로는 밭은 숨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조금 전의 그건 무엇이었는가.

    페불라는 왜 제게 그런 걸 보여 주었는가.

    [떠나기 전, 대답하고 싶어서.]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크루엘로가 흠칫 몸을 떨었다.

    “대답, 이라고……?”

    반문했으나 더 이상의 말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비틀거리며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다시 성물을 살폈으나 두 개의 물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하기만 했다.

    흰 뱀은 없었고, 성력이 흘렀던 흔적조차 사라졌다.

    크루엘로는 답을 구하려는 듯이 성물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뒤, 침대에서 뒤척거린 라스티가 몸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