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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55화 (155/162)

155화

“라스티?”

크루엘로는 당황한 듯 나를 불렀으나, 나보다 놀랐을 리는 없다.

그가 덧붙인 설명이 꼭 당시의 내 상태를 설명하는 것처럼 정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루엘로가 질투로 논문을 써 본 건 아니잖아?

그 말을 다 믿을 필요는 없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이런 결론도 가능하다.

“너도 그냥 체했던 거야, 크루엘로.”

“내가?”

크루엘로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가 내뱉어 놓고도 간만에 강아지의 소리를 빌린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순순히 인정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까짓 거, 내가 크루엘로를 좋, 좋아할 수도 있긴 하다.

어렸을 때부터 봐 왔건, 뭐가 어쨌건 사람 마음이란 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걸 인정해 버리면 내가 꾸는 꿈은 뭐가 되는데?

“설마 그 꿈도 페불라의 음해가 아니라 내 사심 때문에…….”

“꿈이라니?”

“…….”

입이 방정이지.

의도치 않게 흘러나온 말에 나는 내 입을 찰싹 때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뻔뻔하게 굴려 했으나,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이 하이에나는 직감마저 뛰어났다.

“혹시 네가 날 피해 다녔던 거랑 관련 있는 일이야?”

“…….”

“라스티.”

크루엘로가 채근해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눈동자가 순진무구해 보여서, 심정적으로 내가 얼마나 몰려 있는지를 객관적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변명하자면, 꿈이란 게 내가 원하는 대로 조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어디서 봤는데 기억을 짜깁기하는 거라고 하대. 그러니까 이건 다 너 때문이거든?”

“그래.”

뭔지도 모르면서 ‘그래’는 무슨.

크루엘로가 무작정 긍정하는 바람에 더 말문이 막혔다.

개수작 부리는 연애편지든 뭐든 간에 써 놨어야 했다.

최소한 무도회장에서 귀가한 즉시, 편지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곱씹으며 나는 억지로 말을 밀어냈다.

“그, 래서 있잖아.”

그 순간, 헛것이 보였다.

내 손끝에서 성력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나비가 피어났다.

내게 아주 익숙한 형태였다.

“어……?”

저거, 전음 주문인데?

나는 분명히 성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주문을 쓰지도 않았는데 왜 내 손끝에서 나비가 생긴단 말인가.

페불라께서 소멸하신 게 아니었던 건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나비가 날아가는 방향을 본 순간, 굳었던 뇌가 활동을 재개했다.

“자, 잠깐만.”

내게서 나온 나비, 심지어 한두 마리도 아닌 것들이 연달아 크루엘로에게로 날아간다.

전음은 소리를 전하는 주문이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전할 만한 정보라면.

“안 돼, 가지 마!”

나는 뒤늦게 소리쳤으나 내 주문도 아닌 걸 통제할 수 있을 리 없다.

기어이 새하얀 나비가 크루엘로의 이마로 스며들었다.

그 성력 덩어리가 무슨 말을 전했을지, 안 보고도 알 것 같았다.

역시 페불라에게 농락당한 게 틀림없다.

이딴 배려 필요 없어!

추측하는 것만으로 얼굴이 익을 듯이 뜨거워져서 나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안 되겠다, 일단은 도망치자.

나는 크루엘로가 굳은 새 잽싸게 몸을 돌리고 창문으로 향했다.

여기가 3층이고 내가 성력을 잃은 상태라는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든 창틀을 넘으려던 순간 뒤에서 뻗어 온 손길이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라스…….”

“악!”

나는 뒤돌며 일단 그 입부터 손으로 틀어막았다.

“한, 마디도 하지 마! 지금부터 한 마디라도 하면, 뛰어내릴 거야.”

이미 붙잡힌 상태면서 어떻게 뿌리친다는 건지, 설령 그런다 한들 그게 무슨 협박 거리가 된다는 건지.

내가 말하고도 멍청하게 느껴져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고는 차라리 내 눈을 가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의 입에서 손을 떼어 내 얼굴을 덮었다.

얼떨결에 붙잡았을 뿐, 크루엘로도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말이 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던 중.

“푸흡.”

그가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웃음소리를 들은 뒤였다.

크루엘로는 어깨까지 떨어 가며 웃었다.

나는 화가 나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이건 페불라의 농간이야. 내 잘못이 아니야. 봐, 나는 성력도 쓸 수 없게 됐다고!”

증명하듯 나는 성력을 끌어 올렸고, 보란 듯이 손에서 흰 빛이 터져 나왔다.

이 신이 진짜!

하하하, 크루엘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누구라도 달려와 그를 쫓아내 주면 좋겠지만, 그 와중에도 마법으로 방음을 해 두었는지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어흑흑, 진짜 살면서 이렇게 창피한 적이 없어.

나는 도망갈 길을 모색하다가 포기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되는 일이 없다.

이게 다 페불라 때문이야.

그 신을 믿은 것부터가 일생일대의 잘못이었다.

크루엘로는 실컷 웃고 나서는 속이 시원해졌는지 내 맞은편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라스티.”

못 들은 척하자, 그가 대담하게도 입을 맞췄다.

가볍게 맞닿고 떨어졌을 뿐이지만 움찔 어깨가 튀어 올랐다.

꿈에서 무수히 겪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으나 역시 꿈과 현실은 달랐다.

크루엘로는 그대로 나를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나를 피해 다녔구나.”

“……너라면 그런 꿈을 꾸고도 사람 얼굴을 떳떳이 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꾸지 않았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해?”

꿨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수중 신전에서 입을 맞출 때 태도가 퍽 자연스럽긴 했는데.

긴가민가하여 나는 눈만 깜박였다.

“내가 싫어진 줄 알았어.”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크루─.”

“그런데 이런 꿈을 꿔서 그랬다니.”

달래려던 마음이 단번에 사그라졌다.

나는 뚱한 얼굴로 그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키스해도 돼?”

“안 돼.”

제국어를 못 알아듣는지, 그는 양팔을 풀고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피하려거든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였으나, 나는 굳이 얼굴을 돌리지는 않았다.

말랑한 살덩이가 몇 번 부딪칠수록, 간질간질한 감각이 입술에 쌓이는 듯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크루엘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웃어?”

“너는 안 웃겨?”

최근 며칠간의 일이 너무 말 같지도 않게 돌아갔는데, 그 고생을 해 놓고 현실에서도 입을 맞추고 있다니.

“꿈 때문에 진짜 갖은 고생을 했는데. 주변에 물어보고 다녔어, 왜 이런 꿈을 꿀까 하고.”

물론 다른 사람의 이름을 팔긴 했지만.

“생리 현상일 수도 있다고 해서 내가 문란 서적까지 찾아다 읽었단 말이야.”

“그래서 해결됐어?”

“됐겠어? 꿈만 더 안 좋아졌지.”

내뱉은 푸념에 그가 입매를 늘여 웃었다.

“지금도 뭐가 뭐였는지 모르겠어. 그게 정말 질투였는지, 내가 진짜 그런 의미로도 널 좋아하는 건지.”

“그러면 확인해 볼래?”

“뭘?”

그는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덩달아 나를 들어 올렸다.

훌쩍 높아진 시야가 불안정해,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고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크루읍!”

달라진 위치에서 다시 입술이 맞붙는다.

조금 전처럼 가벼운 접촉에 그치지 않았다.

습윤한 숨결이 깊은 곳까지 섞이고 뒤엉켜 입 안에서 움직이는 게 나인지 크루엘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생각이 멈춘 듯 감각만이 이어진다.

그러다 얼굴을 떼어 냈을 때는, 숨결이 달구어진 채였다.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농담이라고 할까?”

“아니.”

나는 한숨을 쉬듯, 입 안의 열기를 빼내고 재차 말했다.

“좋은 생각 같아.”

나도 불분명한 건 싫으니까.

진심임을 확인하듯 크루엘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느리게 깜박이며 속눈썹이 흔들린다.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어쩌면 이미 답을 아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후회하지 마.”

그렇게 말해 놓고 크루엘로는 꼭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래서 조금은, 음, 덜 창피했다.

그날, 나는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로 내 꿈이란 게 페불라가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니었다는 것.

둘째로 꿈으로 백날 꾼들, 현실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 꿈은 크루엘로에 비하면 그렇게 난잡하지도 않았다는 것까지.

밤이 깊어졌다.

***

짹짹, 새 우는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린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오감이 천천히 깨어났다.

햇빛에 닿아 있는 손이 따뜻했고, 폭신한 이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몸은 노곤했으나 오래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조금만 더 잘까?

고민하며 몇 번 눈을 깜박이던 때, 현실적인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버베나한테 뭐라고 말하지.”

“이미 왔다 갔어.”

나는 크루엘로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페불라의 성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마주치고는, 눈꼬리가 접히도록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라스티.”

포식한 육식동물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들은 말을 확인했다.

“왔다 갔다고?”

“문 쪽으로 기척이 다가오길래 환각 마법으로 돌려보냈는데, 전할 말이 있었어?”

“아.”

“욕심 같아서는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소문이라도 내고 싶었는데.”

“소용없을걸, 버베나는 입이 무거운 것 같더라.”

황실에서 사람을 잘 구해 줬지.

흐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동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침대 옆쪽이 움푹 들어가며 크루엘로의 존재감을 전해 왔다.

“오늘도 꿈을 꿨어?”

“꿈이 졌다고 도망갔어.”

시답잖은 농담에,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나는 베고 있던 베개를 끌어안은 채 꾸물거렸다.

일어날까 잠깐 고민했으나 허리가 뻐근해서 아직은 누워 있고 싶었다.

크루엘로가 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는데 그러고 있으니 또 졸음기가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넌 왜 왔어, 크루엘로? 무서운 기세로 선언하고 왔잖아.”

“문제가 있어서 상담할까 했는데, 이제 괜찮아.”

내가 문제였다고 돌려 말하는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루엘로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아침부터 이렇게 유혹하면 곤란한데.”

그렇게 말해 봐야, 이젠 민망하지도 않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그의 가슴팍을 한 대 때리자 작게 웃음소리가 났다.

“공작저에 동의서를 두고 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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